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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Sep 21. 2019

다시 만나고 싶은 뫼비우스의 우주

유구했던 내 게임의 역사(1)

우주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 지금보다도 깊고 까마득한 무지로 가득할 때, 나는 다만 게임에 빠져 지냈다. 하교하는 길에 집 대신 PC방으로 달려가 했던 '스타크래프트'와 '워크래프트 3' 같은 RTS는 물론이고, 오랜 시간을 공들여 '플레이'해야만 하는 RPG에 이르기까지. '창세기전' 시리즈는 내 '게임인생'에서도 특히 많은 지분을 차지했다. 2000년 12월 네 장의 CD로 발매된 <창세기전 3 파트 2>. 주어진 운명을 바꾸거나 거스르는 사람들이 아니라 거부할 수 없는 운명 앞에 좌절하고 상처받고 고뇌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담은 이 게임을 하면서 등장인물들 사이의 파국적 사랑 이야기와 개인의 힘으로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거대한 소용돌이 앞에 노심초사 하며 이 이야기가 비극이 아니기를 바랐던 기억. 모든 이야기가 마무리 되고 주인공의 독백을 들으며 아득해졌던 기억. 엔딩에서 들을 수 있는 '베라모드'의 독백은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 불완전한 존재들은 서로를 보완하기 위해 결합합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그들 사이에 새로이 생겨나는 미묘한 오차율. 그것은 곧 삶으로의 욕구, 진화. 나는 또 다시 새로운 내가 되고, 새로운 나는 보다 더 새로운 나로 진화해 갑니다. 삶으로의 욕구는 언제나 쉽게 좌절당하겠지만 그런 고통 속에서 비로소 진화로 탈바꿈할 수 있지요. 죽음과 탄생이란 서로 마주 볼 수 없는 두 면이 뫼비우스의 띠가 되어 나란히 달리다 결국 하나로 이어지기에. (...) 내가 살고 세계가 살고 모든 게 끊임없이 변화하면서도 무한한 삶이 있게 되었다는 걸 알았어요. 그래서, 그래서 이제야 겨우 당신을 만날 수 있다는 예감이 들어요. 불완전한 나를 채워주는 당신의 존재. (...) 당신과의 만남 그 자체가 삶을 향한 나의 의지이며 삶을 위한 나의 진화입니다. 그 때문에 돌고 도는 세계라 해도 그 안에서 늘 변화하는 미지 속 진화가 있기에 이 모든 게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는 걸 알았어요. 이제 당신이 나에게 주었던 만큼 내가 다시 당신에게 돌려줄 차례가 오겠지요. 그 때 분명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당신에게 말하겠어요. 물론 그 때의 난 그 의미를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 안에서 진화하는 나의 일부는 그 말의 의미를 누구보다도 절실하게, 가슴 아프게 실감하고 있겠지요. (...) 그러니 다시 한 번, 다시 한 번 당신을 만나고 싶어요. 궤도가 달라져도, 결국 돌고 도는 세계라면 분명 당신과 재회할 수 있겠지요. 이름도 모르는 어느 장소, 어느 때에."



아련하게 '뫼비우스의 우주' 정도의 테마로만 기억하고 있었던 '창세기전'의 내용을 돌이키게 된 건 어느 게임방송 채널을 운영하는 크리에이터 덕분이었다. 출시 20년이 되어가는, 이제는 개발사가 더 이상 존속해 있지 않은, 추억 속으로만 가득해 있는 이 이야기를 떠올리며 자꾸만 과거의 나날들을 그린다. 아무것도 몰라고 좋았고 미래는 행복으로만 가득할 것 같았으며 내 세상만이 나날이 특별하다고 여겨왔던 때. 내 이야기도 아니고 현실에 존재하지도 않는 가상의 것들에 왜인지도 모르면서 막연히 눈물을 글썽이던 때.


나중에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읽고 <창세기전 3 파트 2>의 등장인물 '데미안'을 떠올린 건 우연이 아니었다. 그 이름을 헤르만 헤세의 소설에서 따왔다고 생각해도 될 만큼 캐릭터의 역할이 닮아 있다고 느겼기 때문이었다. 우주와 세계만 연결되는 게 아니라 사람과 사람도, 이야기와 이야기도 그렇게 연결된다. 전혀 다른 배경과 환경, 성격, 특질들 속에서도 타자에게 느끼곤 하는, 설명하기 힘든 동질감과 연대감이 있다.


좋아하는 배경음악을 듣기 위해, 좋아하는 캐릭터의 이미 알고 있는 대사를 또 듣기 위해 이미 끝을 아는 게임을 반복해서 플레이하곤 했다. 이제는 조금만 검색해보면 누군가 그 스토리와 설정에 대해 상세하게 정리해놓았고, 또 유튜브 같은 플랫폼에서 그 배경음악을 언제나 들을 수 있다. 요컨대 소설과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의 제목이 지니고 있는 함의처럼, 새롭고 낯선 세계로 들어간다는 느낌은 동시대에 더 이상 느끼기 어려운 것이 되었다. 흔히 '추억보정' 같은 단어를 꺼내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기도 하다.


몇 년간을 '길드'에 몸 담아왔던 모 온라인게임을 '접을' 때, 이제는 가상이 아니라 현실만을 보고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에 와 나는 영화와 문학을, 특히 그 '이야기'를 아끼는 사람이 되었고 본질적으로 이야기는 현실에만 있지 않다. 오히려 픽션이라는 세계는 논픽션의 세계보다 더 깊숙하고 사실적이고 입체적으로, '나'라는 자의식에 침투하고 '내 세계'라는 공간에 스며 있곤 한다. 기억과 추억의 힘은 그래서 무섭다. 유튜브에서 사운드트랙 하나를 들었을 뿐인데 그 게임 전체의 스토리와 등장인물들의 (성우가 연기한) 목소리 따위의 것들, 그 세계에 한창 빠져 있던 내 지난날의 경험이 고스란히 복기되어 재생될 때. 잠자리에 들며 '오늘도 지난 시간을 붙잡으며 보냈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2019.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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