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동진 Oct 05. 2019

새 노트를 자주 구입하는 이유

쓰는 행위에 색인과 범주를 부여하기


상황과 용도에 따라 몇 종류의 노트를 병행해서 쓴다. 가령 두께가 제법 있는 노트는 일정한 분량과 시간이 들어가는 기록을 남기기 위해 쓰고, 로이텀에서 나오는 이 시집보다도 얇은 노트를 쓰는 건 대체로 영화모임이나 책모임 중 생각나는 것들을 즉석에서 메모해두기 위함이다. 이 '메모'에 담기는 주된 내용은 누군가 소개해준 책이나 영화의 제목이라든가, 누군가의 질문에 제대로 답하기 위해 적어놓는 질문의 요점, 혹은 대화를 나누면서 더 찾아봐야겠다 싶어진 어떤 주제나 분야 같은 것이다.


얇은 노트는 쓰는 이유는 노트를 자주 새로 사야 하기 때문이다. (김규림 작가의 말처럼, 문구를 소비하는 일은 아무래도 '실용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기도 하다!) 새 노트를 빈번히 사는 일이 괜찮은 이유는 당연히 돈이 많아서가 아니라 상술한 메모의 성격이 제때에 별도로 정리해놓거나 찾아두지 않으면 금방 기록으로서의 가치가 퇴색되는 것이어서다. 가령 누군가 소개한 책 제목을 적어놓기만 하고 그 책에 대해 따로 검색해보거나 서점에 가 살펴보지 않으면 그 메모는 금방 쓸모없는 것이 된다. (그래서 기록에는 수시로 색인화와 범주화가 필요하다.)


이 얇은 로이텀 노트를 쓰는 이유가 하나 더 있는데, 노트에 자기만의 제목을 붙일 수 있는 라벨 스티커 때문이다. 스티커에 처음에는 'Quotes & Thoughts' 같은 항목을 적어두었는데 요즘에는 그런 것보다 노트를 처음 쓰기 시작한 연월 정도를 쓴다. 노트에 제목을 붙일 때는 책 제목을 쓰는 것처럼 사뭇 진지한 기분이 된다. 기록에 있어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역사성이겠는데, 이 노트를 '2019년 10월에 샀다'는 사실 자체가 훗날에는 특정한 의미를 지닐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한 '금방 쓸모없는 것이 된다'는 말과는 상충된다. 메모의 내용 자체는 재정리하지 않으면 금세 휘발되겠지만, 훗날에는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메모를 주로 했다는 사실 자체가 '그때 내 관심사나 흥미가 대략 이런 것에 있었구나' 하는 단서가 되어서다.


오늘이 사진 속 노트를 구입한 날이다. 노트의 포장 비닐을 뜯고 라벨의 색(로이텀은 보통 4종의 스티커가 동봉돼 있다)을 고른 뒤 부착할 위치를 정해 보는 일은 마치 오늘을 중심에 두고 다음날의 방향을 가늠해보는 일과 비슷하다. 상하좌우 정중앙에 붙일까, 조금 위에 붙일까, 약간 아래에다 붙일까. 그 후 첫 장을 펼치면, 새 물건 특유의 빳빳한 느낌을 지나 한 장 두 장 넘기면서 조금씩 내 것이 되어간다.


새 노트를 산다는 건 단지 비닐을 뜯고 라벨지를 붙이는 등의 물리적 행위가 좋아서만이 아니라 지금(연월)이 지금임을 인식하고 '앞으로 무엇을 쓰겠다' 하고 다짐하는 일이 스스로에게 기운을 북돋는 일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새 노트를 펼치는 일이 내게는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에 나오는 빵집 주인이 주인공에게 빵을 권하는 일과 비슷한 것이다.


따뜻하게 구운 빵을 권하는 일이 새 노트를 사는 데에만 있지는 않다. 하나 더 적자면 '혼자여도 괜찮은 하루를 굳이 타인에게 노출하거나 공유하는 것' 역시 이에 포함된다. 고요한 하루에 소음을 불어넣는 일 정도 되겠다. (2019.10.05.)


(다음 글에서 이어집니다.)





*글을 읽으셨다면, 좋아요, 덧글, 공유는 글쓴이에게 많은 힘이 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책의 먼지를 털고, 손님과 이야기를 맞을 준비를 하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