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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Oct 07. 2019

고요한 소음 속의 하루

가지 않은 길 앞에서 걸음을 옮겨보기

(이전 글에서 이어집니다.)


'그래서 내가 어두울 때 어떤 사람은 밝고, 내가 밝을 때 어떤 사람은 어두울 것이다.'

(문보영, 「FKJ는 프렌치 키위 주스의 준말입니다」, 『배틀그라운드』에서)



0. 미용실 예약을 할 때서야 오늘이 '서울세계불꽃축제' 날이라는 걸 알았다. 오후부터는 교통통제도 있다고. 미용실 직원은 오전 예약을 권유했다. 일찍 헤어컷을 마치고 여의도를 벗어났다. 몇 권의 책과 영화일기 노트, 그리고 노트북까지 모두 챙겼기에 갖가지 생산적 활동에 골몰할 작정이었지만 책 읽기에도 글 쓰기에도 제대로 몰입되지 않았다. 합정에서 몇 시간을 보내다 예정에 없이 근처에 있던 지인을 만났다. 라고 시시콜콜한 일과를 정리하다 말고 그냥 하나의 장소에서 이야길 다시 시작하기로.



1) 서점 안 카페에서 책을 읽는 중이던 나와, 책을 읽으러 집 밖으로 나온 지인은 서점 리스본 근처의 카페에서 책을 읽기로 했다. 주말 한낮임을 간과한 덕분에 여러 카페를 거쳐야 했고, 테이블이 네 개 있는 골목길 한 작은 카페에 도착했다. 여기도 책을 읽기에 적합하지는 않았다. 작은 공간임에도 음악 볼륨이 다소 컸고, 다른 테이블에 앉은 이들은 너무 시끄러웠을 뿐 아니라 요란한 셔터음을 내어가며 수십 장씩 사진을 찍어댔다.


다만 아담한 공간의 구성과 인테리어 소품들은 마음에 들었고, 저녁에 신청해놓은 행사에 가기 전 토스트로 배를 채웠을 뿐 아니라 문화와 엔터테인먼트 취향이 통하는 지인과의 대화와 독서를 겸할 수 있어서 알맞은 오후였다. 주변이 소란스러워도 자신의 일에 집중하는 일은 가능했다.



2) 정신건강 전문의인 하지현, 윤대현 선생님이 서점 리스본에서 진행하는 [심야치유책방] 공개녹화에 다녀왔다. 특정한 고민이나 이야기를 써서 보내고 그에 따라 선정된 사람만 초대되는 자리였고 다행히 나 역시 그중 한 명에 포함됐다. 평소 두 분에 대해 잘 아는 바는 아니었지만 서점 리스본의 기획력을 신뢰하므로, 내 삶의 나름대로 중요한 고민을 안고 있음에도 그 걱정을 단번에 해결할 수 있기를 기대한 쪽보다는 좋아하는 서점에서 유익하고도 귀중한 이야기로 저녁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좋아 신청한 쪽에 따지자면 더 가까웠다. 내게 있어 지금보다 삶의 방향에 대해 고민스러웠던 적도 없었기에 꼭 명쾌한 답을 내려주는 처방이 아니어도 누군가의, 전문가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은 반드시 필요했다. 시인이나 소설가의 낭독회나 북토크 행사에 갈 때와는 조금 다른 기분이었다는 이야기다.


두 선생님은 각각 책과 음악을 처방하고 안팎의 여러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몇 권의 책을 메모하거나 온라인 서점 장바구니에 담았고 몇 개의 곡을 멜론 재생목록에 넣었다. 추천 콘텐츠도 알맞았지만 내게는 선생님들의 말씀이 깊이 닿은 시간이었다. 동전 던지기 같은 일들 속에서 모든 게 50대 50으로 명확히 나뉘는 일은 흔치 않고 나는 언제나 선택해야만 한다. 간단하게는 하지 않는 것과 하는 것의 차이겠지만 간단하지 않게는 모든 것인 일들 앞에서.



3) 무엇보다, '오래가는 아픔과 오래가지 않는 아픔' 사이에서 어떤 것이 좀 더 낫겠느냐는 이야기에 수긍했고, 누구에게 뒤지지 않는 현재주의자라 생각했던 내가 어느 순간 불확실한 미래를 너무 걱정하느라 지금 여기의 크기를 스스로 줄여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게 만드는 말들이 두 선생님의 처방 속에 담겨 있었다. 당연히 그 처방은 '이렇게 하면 됩니다'가 아니라 스스로의 마음을 들여다보게 만드는 종류의, '마음에게 말 걸기'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4) 여전히 나는 가지 않은 길 앞에서 한 걸음을 떼지 못하고 있다. 먹고사는 일의 무게는 점점 더 커진다. 모집 중인 모임들은 늘 최소 정원을 채우지 못해 취소될 경우를 걱정해야만 한다. 그럼에도 내게 다행인 건, 마음을 열 수 있는 좋아하는 공간이 있다는 점. 이곳에서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무엇인가를 나눌 수 있다는 점. 한층 쌀쌀해진 밤공기를 느낄 온기가 남아 있다는 점이다. 저녁식사를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이야기들을 소화하다 보니 지하철을 타러 걸어오는 길에는 그저 배가 고프다는 감각과 함께했다. 걸음은 빨랐고 경의선숲길 주변에 자리를 펴고 도란도란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 하나하나의 표정이 달리 보이기도 했다.



5) 딱 1년 전의 오늘이 바로 서점 리스본에 처음 발걸음 하게 되었던 날. 허수경 시인을 추모하는 작은 낭독회가 있던 날이다. 1년 동안 나는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지만 동시에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기도 하다. 가을은 분명 좋아하는 계절이지만 동시에 아픈 계절이라고도 혼자 생각했다. 다만 그때엔 없었고 지금은 있다고 생각하는 몇 가지를 떠올리면,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오늘에 새 노트를 펼쳤다는 사실은 중요하게 다가온다. 공개된 공간에 남겨두기에는 다소 사적인 맥락으로 가득하고 아무것도 쓰지 않기에는 많은 일이 있었던 이 일기의 제목을 '고요한 소음 속의 하루'라 붙여보기로 했다. 이 노트에는 이제껏 쓰이지 않았던 것들이 적힐 것이다. (2019.10.05.)


2018년 10월 5일, 서점 리스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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