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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Oct 15. 2019

전장의 어떤 죽음

연예인의 비보를 애도하는 밤

롤플레잉 게임(RPG)에서 캐릭터는 자신의 방어력이 아무리 높아져도 누군가의 공격으로부터 반드시 '1'의 피해는 입는다. 상대의 공격력보다 캐릭터의 방어력이 높아도 '0'의 피해를 입는 일은 불가능하다. 0도 아니고 아예 피해 자체를 입지 않으려면('Miss') '회피율'이 필요한데 단어에서 이미 알 수 있듯 그것은 단지 확률이다. 체력과 재생력은 무한해질 수 없으므로, 높은 방어력의 캐릭터도 결국 누적된 '1'들의 피해로 끝내 죽을 수 있다. 회피율을 100퍼센트로 만드는 건 게임에서도 아주 비현실적인(비현실 속의 비현실) 조건으로만 간신히 가능하다. (물론 소위 '아이템 세팅'을 그렇게 맞출 수 있는 경우는 극소수다.) 그러니 회피율 100퍼센트인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되겠다. (아, 어떤 게임에서는 방어력이 피해를 일정 수치가 아니라 퍼센트로 감소시키기도 한다.)


게임 이야길 좀 더 해볼까. RPG에서라면 혼란, 기절, 출혈, 둔화 등과 같은 갖가지 '상태 이상'도 존재한다. 그 각각의 상태 이상에 대한 저항이나 내성을 기를 수 있지만 그것으로부터 면역될 수는 없다. 하나 더. 캐릭터의 체력 이전에 그가 착용한 장비의 내구력이라는 것도 있으므로, (내구력이 소진되면 그 장비는 파괴되거나 아니면 수리하기 전까지 사용불능의 상태가 된다) 게임의 상식적인 플레이어라면 1의 피해에라도 자신을 무한정으로 노출시키지는 않는다. 그러나 문제는 이 세계가 비상식적이라는 데 있다.


이 세계는 그러니까 전장(戰場)이다. 단지 아픔은 피할 수 없고 상처는 막을 수 없다는 데에서 문제는 그치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익명성에 기댄 채 무지하고 추한 언어들로 공격의 범위를 지구 반대편까지 확장시킨다. 게임에서라면 익명은 곧 공격 대상에게 보이지 않는 '투명화'에 해당한다. 물론 그 투명한 유저들은 그것이 공격 행위인 줄도 알지 못한다. '장난 좀 친 것 가지고 뭘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냐'라고 하고, 아니면 '네가 예민해서 그렇다'라고 한다. 게임 속 사회에서도 악플러는 존재하는데 게임 밖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이 세계는 판금갑옷과 보호구를 휘감을 수도, 마법과 소환술을 연마할 수도 없는 세계다. 게임 속 능력치 같은 것으로 따지자면 사람의 물리적 방어력은 너무나 허약하다. 전직은커녕 2레벨 말벌, 3레벨 멧돼지에게도 심대한 피해를 입어야만 하겠다.


굳이 게임 생각을 계속한 건 앞에서 쓴 '1의 피해' 때문이다. 누군가의 가벼운 말에도 상처 받지 않기란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어느 연예인의 죽음이 반드시 악플 때문인 것만은 아니다. 다시 말해 사인(死因)이 인신공격 하나만 있지는 않다. 그러나 우울증이 없는 사람에게도 그 언어폭력은 어떻게든 영향을 준다. 보이지 않을지라도 마음에 하나하나 상처를 일으킨다. 이 점에서 연예인은 언제나 대중보다 약자다. 항상 을(乙)이다. 사생활을 보장받지 못하고, 입 밖으로 꺼내는 말 한마디가 대중의 평가와 조리돌림 대상이 되며, 익명성에 기댄 불특정 다수 대중의 존재는 그 자체로 연예인이기 이전에 한 개인의 삶에 있어 중압감으로 작용한다. 그러니 연예인이 '대중의 관심을 먹고 산다'는 건 분명한 착각이자 오류다. 연예인이 '먹고사는' 건 어디까지나 자신이 가진 재능 덕분이다. 설혹 인기가 연예인의 생계에 기여한다고 해도 그것은 절대 악플을 정당화하지 않고 악플의 면죄부가 될 수도 없다. 인기가 많다는 건 더 넓은 공격 범위에 더 많은 투명한 익명들에게 더욱 더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는 뜻이다.


영화나 드라마, 광고, 공연장 등에서 겉보기에 비치는 화려함이 연예인의 삶의 전부는 아니다. 단지 직업의 한 현장일 뿐, 오히려 그의 직업은 차라리 감정노동에 가깝다. 다른 사람도 사람이라는 사실을 악플러는 생각하지 않는다. 따라서 자신이 생각 없이 함부로 뱉은 가벼운 문장 하나가 누군가에게 칼이 되어 꽂힘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타인의 마음을 염려하는 사람들로만 가득했다면 이 세상에 악플 같은 건 존재하지도 않았으리라.) 외모를 평가하고, 성적 희롱의 대상으로 삼고, 사생활과 취향의 자유를 존중하지 않으며, 자신의 표현을 '표현의 자유'에 해당되는 것이라 착각한다. 챙 달린 모자를 푹 눌러쓰고 선글라스를 착용해도 공격은 회피 없이 내성 없이 저항 없이 관통하고야 만다. 누적되고야 만다. 피해를 덜 입거나 무뎌질 방법이 아주 없지는 않겠으나, 그것으로부터 완전 면역되는 일은 누구에게도 일어나지 않는다. 악플러에게만 잘못이 있지는 않다. 일부(이기만 한지는 모르겠지만) 추측성, 자극성 기사(라고도 칭할 수 없을 수준의)를 쏟아내는 연예 매체도 마찬가지다. 조회수와 광고 앞에 그 매체들은 스스로 언론이기를 포기한다.


이제 게임 이야기를 더 꺼내지 않아도 되지만, 게임 이야기로 시작했으니 이 전장을 곧 게임에 빗대어야만 하겠다. 악플러는 애초 자신이 표출한 언어가 누군가에게 어떻게 닿을 수 있는지 그 현실 감각도 없는 인물일 테니까. 연예인이 공격으로부터 면역인 줄, 혹은 방어력이 무한대인 줄 착각하는 어리석은 '비매너 유저'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 수많은 연예인들이 우울증이나 자살로 뉴스에 오르내리는 동안 이 세계는 과연 무엇을 학습했나. 아무것도 학습하지 않았거나, 학습이 있었다 해도 그 경험치는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감소하는 종류의 것인 모양이다. 아니, 어떤 세계에서는 그 누구의 경험치도 오르지 않는 것인지도. 오히려 퇴보하는 것인지도. 왜 자꾸 게임에 빗대어 적느냐고? 그렇게 오래 산 것도 아니건만 이 세계가 꼭 전쟁터나 다름없는 것만 같아서. 게임에서 비매너 유저는 신고에 의해 제재당할 수 있고, 현실 속 악플러는 고소를 당해 처벌받을 수 있다. 그런다고 언어폭력이 어디 사라지기야 하나. 세계가 더 나아지지 않았다는 건, 더 나빠졌다는 뜻인지도 모르겠다. 학습하지 않는 세계는 나쁘다. (2019.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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