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궁화호나 KTX를 탈 때 주로 창가보다는 화장실 등 왕래가 편한 통로석에 앉는다. 좌석 열차를 탈 때 옆자리에 누가 앉는지는 중요하다. 오늘 옆자리에는 키가 195cm쯤은 될 것 같은 남자가 탔다. 키가 크다는 걸 안 건 옆자리에 앉은 그 사람이 다리가 너무 길어 창가 쪽을 향해 거의 대각선으로 앉았다는 것과, 그것 때문에 점퍼를 입은 그의 상체가 내 자리 쪽으로 약간 침범했다는 것 때문이었다. 거기까지는 그럴 수 있겠다 생각했는데 혼자 노래 가사를 흥얼거리기 시작하는 거다.
당연히 노래를 어떻게 부르고 못 부르고는 중요한 게 아니다. 열차를 타면 통화는 작은 목소리로 용건만 간단히 하라는 등의 안내 방송이 기본적으로 나오는데, 일행과 이야기를 나누며 가는 사람들도 제법 있으므로 노래를 부르는 것도 아아아주 어쩌면 그 자체로 문제가 되진 않는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아마 내가 이어폰을 꽂고 있어서 딱히 방해가 되진 않으리라 짐작했을지 모르나 문제는 객차 안에 나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내내 다리를 이쪽으로 꼬았다 저쪽으로 꼬았다 하면서, 탈 때부터 내릴 때까지 단 1초의 예외도 없이 양손으로 스마트폰을 붙든 채 대중교통이 개인 공간인 것처럼 전용하고 있는 모습 옆에서. 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좌석 밖으로 삐져나온 게 아니라 나 이렇게 키 크고 다리 길다고 하듯 튀어나온 다리와 어깨 옆에서 무심히 『82년생 김지영』을 읽고 있었다. 읽었던 책인데도, 지영이 학원을 마치고 귀가하는 버스정류장 앞에서 어떤 남자가 "제가 데려다줬으면 하시는 것 같아서요"라고 하는 장면에서는 속으로 욕이 튀어나왔다.
영화 개봉을 앞두고 조남주의 소설 『82년생 김지영』을 다시 꺼냈다.
소설 속 그 남자는 지영이 위기감을 느껴 문자를 보내고자 휴대전화를 빌린 버스 안 다른 여성이 상황을 눈치채고 버스에서 뒤따라 내리고 지영의 아버지가 버스정류장으로 달려왔을 때 "쌍년들" 하면서 자리를 피했다. 속으로 소설 속 그 남자를 향해 '미친 새끼' 하면서 계속 읽었다. 물리적, 신체적 상해를 입히는 것만 폭력인 건 아니다. 기차 옆자리에 조용히 자기 할 일 하고 옆사람에게 피해를 주진 않을까 염려하는 게 느껴지는 사람이 있을 때는 안도한다. 오늘 같은 사람이 있을 땐 '젊은 꼰대 꿈나무' 같은 사람의 마음이 된다. 요즘 나무를 너무 많이 키운다.
성별을 갖고 이야기하고 싶지 않지만 내 경험상 오늘 기차 옆자리에서 혼자만의 세계에 거들먹거리며 앉아 있던 그 사람과 같은 경우는 예외 없이 남자였다. 연령대는 다양했지만. 아까의 그 키 크고 노래 부르는 남자는 20대 중반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사람 인상은 선입견이 작용하는 걸까. 앉은 내내 눈길도 안 줬지만, 그 사람이 내린 원주역에 정차 중일 때 책을 향해서만 오래 숙였던 고개를 쉬어줄 겸 스트레칭을 하며 내리는 그의 뒷모습을 잠깐 보았다. 다시 시선을 책으로 두었다.
영주에 와 밥을 먹고 글을 썼고, 엄마 아빠의 새 폰들을 만지작거렸으며 서울에서 볼 영화 예매를 했다. 오전의 기차 안 옆사람의 둔감함에 가만히 스마트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의 음량을 높였다고 써본다. 공공장소에서 주변을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의 뒷모습은 전혀 당당해 보이지도 자신감 있어 보이지도 않는다고 쓴다. 둔감한 건지 오만한 건지 모르겠는 사람의 옷깃은 두 번 스치지는 않고 싶다고 쓴다. 그렇게 생각했다고 적는다.(2019.10.18.)
역에 마중 나온 아빠와 형과, 집 근처에서 삼선짬뽕과 탕수육을 먹었다.
2. 영주 → 청량리: 커텐 치지 말을까?
청량리행 무궁화호를 타러 집을 나서기 전. 아빠는 "하이고 오늘 아들 짐이 많네." 하셨다. 나는 "부피만 크지 별로 무겁진 않아요"라고 했다. 얼마 전 스마트폰을 새 것으로 바꾼 아빠는 담배 한 대를 피우고 들어오시더니, 역 대합실에서 내 옆에 앉아 폰 게임으로 고스톱을 치셨다. (부모님이 계신) 집에 다녀올 때는 늘 그런 기분들이 된다. 딱 지금 역 대합실에 앉아 기차를 기다리는 기분. 서울에 가면 할 일이 있다. 그러니 서울로 돌아가야 한다. 하지만 가족과 보내는 시간은 물론 좋다. 혼자 사는 데 익숙해져서 씻는 거 하며 먹는 거 하며, 이것저것 '집'의 일들에 간혹 불편 내지는 낯섦 같은 것을 느낄 때도 있지만 그래도 가족이라서. 평소보다 좀 더 무거운 마음을 안고 가는 지금, 옆자리의 아빠가 고스톱에 열중해 있는 모습을 보며 나도 아빠의 스마트폰 화면을 따라 본다. 화투는 다룰 줄 모르지만 스마트폰 화면을 한 손가락으로 터치하는 어른들 특유의 그 제스처가 딱 아빠답다. 염색을 몇 달째 안 하셨다고 하는 아빠의 흰머리가 늘었다.
늘어난 흰머리가 눈에 띈다. 내가 탈 위치는 5호차. 열차 계단에 오르기 직전 "도착하면 전화해"라고 하셨고 "들어가서 전화할게요"라고 화답했다. 34번 좌석. 자리에 앉아 창밖을 보니 아빠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나도 손을 흔들었다. 창문이 소리를 일부 차단했기 때문에 정확하게 들린 건 아니었지만 아빠는 "주차장 가서 차 가는 거 보고 있을게" 하셨다. 몇 분 후 기차는 출발한다. 그 몇 분 사이 아빠는 나를 역까지 태워다 준 그 차가 세워진 주차장으로 향할 것이다. 몇 분 후 기차는 출발했다. 창밖의 목소릴 들은 건 오른편 창가였지만, 주차장은 왼편 창가를 봐야 보인다. 주차장에 선 아빠는 시야에서 기차가 사라질 때까지 계속 거기 있겠다는 모습으로 서 계셨다. 내가 그쪽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이자, 아빠도 같이 손을 흔들었다.
떠나기 전, 영주역.
오늘 옆자리에는 안동에서 먼저 탄 듯한 할머니가 앉아 계셨다. 귤을 몇 개 까서 드시더니 내게 하나를 권해주셨는데 정중히 사양했다. (원래 기차에서 물이나 커피 외에 다른 건 거의 안 먹는다) 창밖을 향해 계속 시선을 두던 할머니는 햇빛이 눈부신지 커튼을 치다가 "학생 책 읽는데 볕 들어오게 커텐 치지 말을까?" 물으셨다. 괜찮다고, 감사하다고 했다. 혹시나 더 말을 거실까 싶어 이어폰을 모처럼 뺀 채로 책을 봤다. 그분은 나처럼 청량리역에서 내리셨다. 서울 오는 길은 평온했다. 어제 아침 청량리역으로 향할 땐 해가 뜨는 모습을 보았고, 오늘 영주에서 다시 청량리역으로 올 때는 해가 지평선을 향해 넘어가는 게 보였다. 기차 시간을 딱히 일출 일몰을 생각하고 잡은 건 아니었지만 잘 맞추었다고 생각했다. 별 일 없는 하루였다. 어슐러 르 귄의 <밤의 언어>, 박완서의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를 읽었다. (2019.10.19.)
어슐러 르 귄의 『밤의 언어』도 다시 읽었다.
"가을이나 겨울 같은 때는 분명히 환할 때 극장에 들어갔는데 나와 보면 밤이었다. 종로 거리는 당시 최고의 번화가여서 전깃불이 밝고 사람들이 바쁘게 오가는 모습이 낮과 판이한 달뜬 활기에 넘쳤다. 영화 속 별세계의 연속인 양 낯익은 거리가 낯설어져 잠시 방향감각을 잃고 우두망찰하게 되는 것도 어딘지 감미롭고도 쓸쓸한 영화의 뒷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