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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Nov 07. 2019

뻔하지 않은 이야기만 가치 있는 건 아니어서

글배우 작가의 『지쳤거나 좋아하는 게 없거나』

모처럼, 평가하거나 가치를 매기는 일 대신 그저 누군가의 이야기를 읽고 싶어 가벼운 마음으로 고른 책이 『지쳤거나 좋아하는 게 없거나』다. (글배우, 2019) 어렴풋이 기억 속에 있는, 전봇대에 테이프로 붙인, 큼지막한 글씨로 적힌 짧은 길이의 문장들을 떠올렸다. 글을 어떻게 쓰는지 배우고 있다는 뜻에서 필명을 지었다고 어디선가 읽은 기억도 떠올렸다.


이런 것, 아마 많이들 보셨을 것이다. (이미지 출처: 구글)


(내 기준에서) '이 사람처럼 쓰고 싶다'라거나 '글을 아주 잘 쓴다!' 하고 탄복하게 되는 종류의 문장들을 이 책에서 많이 읽었다 생각지는 않는다. 그러면 이 책은 못 쓴 책인가. 소셜미디어에 쓴 글을 기반으로 만들어지는 책은 다 별로인가. 그렇게 여겨지는 책도 시중에는 있겠다. 출판계에서 최근 몇 년간 에세이가 강세를 보인 건 오랜 시간을 들여 긴 글 읽기를 꺼리는 대중적 동향과도 연관이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에세이 전부를 마냥 거기에 편승한다고 평가절하할 수는 없다. 좋아하는 시인의 시집에 쓰인 좋아하는 문학평론가의 발문 중, "팔리는 책만 따라 읽는 일도 바람직하지 않지만 팔리는 책이라면 무조건 낮춰 보는 것 역시 경박한 일인데 세상에는 그런 사람들도 있는 것이다."라는 문장을 재차 떠올렸다.


글배우, 『지쳤거나 좋아하는 게 없거나』

실제로 몇몇 에세이의 감상평을 찾다 보면 '이런 글은 나도 쓰겠다'라든가, '본인 일기장에나 써라'라는 부류의 말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 책의 마케팅 과정을 모르면서 무턱대고 '마케팅의 성공' 운운하는 사람도 더러 있다. (동종은 아니지만 마케팅에 종사했기에 여기에 대해선 할 이야기가 아주 많다.) 나는 그것이 적지 않은 경우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단순하게 말하면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그 글을 쓰지 않은 사람이라서인데, 책을 만들기 쉬워졌다고 해서 그것을 아무나 할 수는 없다. 나아가 좋은 말을 가져다 꾸며내어 붙인 이야기와 삶에서 스며 나오는 이야기는 다르고, 독자들이 그것을 모르지는 않는다.


이 책에서 (역시 내 기준에서) 비문에 가까운 문장들을 수시로 발견했기는 하다. 글이라기보다 말을 옮겨 적은 것처럼 느껴지는 문장도 자주 눈에 띄었다. 앞서 나왔던 이야기가 뒤에서 반복되거나 비슷하게 이어지는 대목도 보였다. 가독성 문제라기보다 요즘 느끼는 건 종이에 알맞은 글과 디지털에 알맞은 글이 따로 있는 것 같달까. 그러나 동시에 하는 생각은 문장만으로 거기 담긴 이야기의 가치를 섣불리 재단하는 일을 경계해야겠다는 것이다. 모두가 등단 15년 차 소설가처럼 글을 쓸 순 없지만 동시에 그 모두에게는 나름의 사연들과 세계관이 있기도 해서.


페이지 곳곳에 밑줄을 긋고 플래그를 붙이며 귀퉁이를 접으며 읽은 책은 아님에도 어쩐지 이 책은 제법 마음에 닿는 면이 있었다.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여도 그것이 뻔한 것 같아도 어떤 이야기는 누군가에게 꼭 필요할 때가 있고,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야기와 누군가가 해주는 이야기는 또 다르다. 저자가 어떤 경험을 해왔는지를 미약하게나마 알고 나니 책의 이야기는 조금 더 진솔하게 다가오기도 했다.



'나의 꿈' 중에서

어릴 때부터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은 딱히 아니었다. 청소년기의 책들 중 기억에 남는 건 『삼국지』나 『로마인 이야기』, 『먼 나라 이웃나라』 정도. 그 시기 내 관심사는 온통 컴퓨터 게임에만 있었으므로, 책을 (물론 내 기준에서) 제대로 만난 건 성인이 된 지 한참 후의 일이었고 그건 돌파구 내지는 도피처를 원해서였다. 딱 인스타그램 계정을 만들었을 무렵인 5년 전 찾아 읽은 책은 대부분 에세이였고, 그때 만난 책들 상당수는 지금도 좋아한다. 이후 영화 원작 소설이나 영화 관련 총서 등으로 범위가 자연히 조금씩 넓어지기 시작했고.


오랫동안 공부하듯, 숙제하듯, 해치우듯 문학과 인문, 사회 분야 책들에 둘러싸여 있다가 만난 글배우의 문장은 한결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꾸미지 않았고 화려하지도 않은 말들로 가득한, 삶의 경험이 담긴 이야기들 덕분이다.


(마찬가지로 내 기준에서) 그는 잘 팔리거나 인기에 편승하는 책을 찍어내는 사람이 아니라 투박하게 보일지라도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본인의 방식으로 하는 사람이다. 내게는 좋아하는 것과 하고 싶은 것이 명확히 있지만 적어도 지금은 얼마간 '지쳐 있는' 것은 맞다고 할 수 있는데, 대단한 이야기가 아니어도 어떤 말들은 응원의 에너지로 닿는다. 세상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이유로 지쳐 있거나 혹은 진정 좋아하는 무언가를 내려둔 채 싫은 것들을 감내하고 있을 테고, 그래서 누군가에게는 잠시 혼자의 시간을 선사할 수 있는 책이겠다.


신호등처럼

*신세계아카데미 겨울학기 영화 글쓰기 강의: (링크)

*4주 영화 글쓰기 클래스 <써서 보는 영화> 11월반: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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