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전 늦여름, 지인이 알려준 '브런치'라는 플랫폼. 그 지인은 인스타그램에서 알게 돼 오프라인에서 지금껏 교류한다. 자주 보는 건 아니어서 다음 만남에서 지난 만남을 떠올리면 대부분 한 개에서 두 개의 계절은 건너야 한다. 마찬가지로 브런치를 통해 글을 먼저 접하고 오프라인에서 사람으로 교류하는 일이 아주 많지는 않지만 내게도 있다. 온라인에서 만나 오프라인의 인연이 된 사람들. 그래서 나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굳이 경계로서만 생각하지 않는다.
행사나 일이 있을 때 최소 30분 이상 일찍 가는 걸 좋아하는데 그건 부지런해서가 아니라 시간에 겨우 맞춰 허겁지겁 도착해 땀을 훔치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선택할 수 없는 자리에 앉는 일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늦은 잠에 들어 거의 오전 내내 이불속에 있다 급하게 준비하고 노들서가에 도착한 건 행사 시작 시간 오후 2시를 얼마 남기지 않은, 1시 45분경. 돈도 없으면서 자신 있게(?) 택시까지 탔다.
카카오 '크리에이터스 데이 2019' 행사의 마지막 일정은 '나의 글감'이라는 주제로, 바로 카카오브런치의 날. 작년 행사에 참석하지 못한 나로서는 올해만큼은 놓치고 싶지 않다는 기분이었고 참석 확인 전화를 받았을 때의 기쁨은 수상이라도 한 것처럼 생생하다.
여유롭게 즐기지는 못했지만 늦잠 자서 아침도 못 먹고 달려온 사람의 생존력을 높여주는 소중한 음식들,,,
카카오프렌즈,, 존재 자체가 귀여움 아닌가요,,,
1. 반가운 만남의 시간
다행히 행사 전 음료와 다과를 맛볼 만큼의 시간은 남아 있었다. 인스타그램을 통해 행사에 참석한다는 걸 알게 된, 한 브런치 작가님을 만났다. 곧 도착한다고 메시지를 드렸던 터라 그분은 입구에서 출입문 밖을 살피고 계셨다. "혹시 ㅇㅇ님이세요?" "네 안녕하세요!" 피드와 글로만 접했지 오프라인의 대면은 처음이었다. 감사하게도 좀 더 일찍 도착한 그분 덕에 꽤 좋은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맨 앞에서 두 번째!
쓰는 일을 계속하다 보면 '쓰는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결과물이 아니라 과정으로서, '지속 가능한 글쓰기'에 대해 고민하는 '쓰는 사람'이 나만은 아니겠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일은 물론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듣는 매 순간마다 일어난다.
아는 사람을 만나러 왔다기보다 글 쓰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러 온 것이지만, 동반인이 있다는 건 꽤 좋은 일이기도 했다. (꼭 포토존에서 남길 사진을 찍어주셨기 때문만은 아니고!) 브런치에 대해, 쓰고 기록하는 일에 대해 관심사와 공감대를 나눌 수 있었다. 글로만 접했을 때보다 글만으로는 알 수 없는 작가의 이야기를 함께 들었을 때 생기는 일종의 친밀감이나 연대감 같은 것. 물론 사적 친분과는 다른 것이다.
행사 시작 전, 위층에서 다과를 흡입하면서 내려다 본 1층
나다! 브런치다!
2. "우리는 좋은 글이 가지는 힘을 믿습니다."
카카오브런치 '나의 글감' 행사의 패널들
백영선 님의 사회로 진행된 이번 행사는 크게 세 개의 파트로 나뉘어 있었다. 1)'독자를 덕질할 때 나오는 글'이라는 주제의 정문정 작가의 강연과 '등잔 밑의 글감'이라는 주제의 강이슬 작가의 강연. 2) 김혜민 브런치 마케터와 김진호 브런치 기획자, 손현 매거진 <B> 에디터의 브런치 토크 '브런치와 매거진 B는 왜 에디터에 주목하는가'. 그리고 3)'내가 쓰고 싶은 글을 남이 읽고 싶게 쓰기'라는 주제의 서메리 작가의 강연. 그에 앞서 오성진 브런치 파트장의 브런치 서비스 소개와 향후 운영 방향에 대한 이야기들까지.
글을 쓰고 글을 다루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모두 또렷하고 생생하게 다가왔다. 글이 아니라 말로 하는 글 이야기. 무대에 선 강연자마다의 화법과 개성이 어우러져 '좋은 이야기의 힘'이란 이런 것이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세 시간이 전혀 지루하거나 길게 느껴지지 않았을 만큼, '처음부터 끝까지 좋지 않은 대목이 하나도 없었습니다'라고 쓰고 싶지만 각 강연/토크마다 특히 인상 깊었거나 공감했던 부분들을 기록해두기로 한다.
3. 내 이야기를 타인에게 전하는 일의 기쁨과 어려움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서 내 식대로 들려줬는데 통한다는 건 특별한 재능이에요"라는, 영화 <스타 이즈 본>(2018)에서 브래들리 쿠퍼가 연기한 '잭슨'이 하는 말이 있다. 그건, 말 그대로 정말 특별한 재능이다. 뜻과 진심은 언제나 온전하게 전달될 수 없고, 잘 표현된 이야기를 통해서만 누군가에게 간신히 닿을 수 있을 따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적어도 나는, 그래서 쓴다. 내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누군가와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그리고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나의 글감'이라는 주제의 이번 행사에서 접한 모든 이야기들은 결국 '좋은 글감이란 무엇일까', '작가란 무엇인가' 같은 큰 질문에 대해서 답해낼 수 있는 수많은 갈래들의 하나였다. 행사는 '이렇게 쓰면 됩니다'가 아니라, '저희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당신은 어떤가요?' 하고 말을 걸어주는 사려 깊은 시간들로 채워졌다.
정문정 작가님의 강연 중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을 쓴 정문정 작가는 글이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는 법과 구체적인 독자를 상정하는 법에 대해 말했다. 독자를 '덕질'한다는 건 마치 사랑하는 이에게 쓰는 연서처럼, '내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당신이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는 무엇일지 고민하고 생각하는 과정이다. 참을성과 집중력 없는 요즘 독자들의 콘텐츠 소비 모습과 취향에 대해 생각하고, 단지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을 전하는 게 아니라 읽는 이가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대해 헤아리는 일이 결국 매력적인 글을 만든다. 그러기 위해 작가는, 자신의 취향이 아닌 것도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요즘 사람들'은 무엇에 관심을 가지고 있을지 고민하는 것이다. 그리고 한 편의 글만으로 재미도 공감도 의미도 모두 담아내기란 과욕에 가까우므로, 잘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는 일도 중요하겠다. 정문정 작가는 다년간의 직장 경험과 미디어, 콘텐츠 분야의 노하우를 차분하면서도 힘 있게, 그리고 일목요연하게 전했다.
<안 느끼한 산문집>을 쓴 강이슬 작가는 '이미 가지고 있는 글감'과 '작정하고 찾는 글감'의 차이에 대해 말했다. 오직 자신만의 경험과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누구에게나 있으므로, 바로 그것을 찾기. 글감을 품거나 찾는다는 건 그것을 어떻게 '내 식대로' 전달해낼지를 생각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글에서 작가가 독자로부터 너무 앞서 나가지 않는 일이기도 하다. 혼자의 생각이나 감정에 도취되어 있는 게 아니라, 읽는 이의 위치를 생각하며 눈높이와 보폭을 맞춰보는 것. '이불킥' 하지 않을 만큼의 정제된 글을 쓰는 일에 대해서 강이슬 작가는 본인의 경험을 토대로 위트와 철학을 모두 담아 진솔한 이야기를 공유했다.
브런치 토크 '브런치와 매거진 B는 왜 에디터에 주목하는가'
다음 순서로 진행된 '브런치 토크'는 브런치와 매거진 <B>의 협업에 대해 다른 곳에서 쉽게 접할 수 없는 실무자들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잡스 - 에디터> 단행본과 <잡스 - 에디터: 브런치북 에디션>으로 매거진 B>와 브런치는 각자의 결과물을 내놓았다. '좋아하는 것으로부터 좋은 것을 골라내는 사람'이라 명명한 에디터라는 직업에 관하여, 그리고 '에디터십'(Editorship)이라는 화두로 책과 잡지를 다뤄온 손현 에디터와 김진호 기획자의 발언들이 이어졌다. (진행한 김혜민 마케터께서 '노잼'을 여러 번 언급하셨지만, 이 분야에 관심 있는 이라면 흥미로울 수밖에 없는 이야기 보따리 한가득!) 브랜드를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주로 인터뷰 포맷을 활용해 취재하고 소개해 온 매거진 <B>와, 그리고 작가의 좋은 작품을 발굴해내고 작가 본인이 에디터의 마음으로 스스로가 가진 콘텐츠를 편집할 수 있게 '브런치북'을 선보인 브런치 각자가 지닌 개성과 차이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었다. '나는 결국 무엇을 쓰고 싶은가'라는 자문을 이야기 듣는 내내 품었다.
<회사 체질이 아니라서요>를 쓴 서메리 작가는 꼭 필요한 이야기를 선택과 집중을 통해 담는 것과 독자를 너무 무시하지 않으면서 배려하는 글쓰기에 대해 말했다. '내가 쓰고 싶은 글'과 '남이 읽고 싶은 글'은 항상 같을 수는 없고 얼핏 상호 모순적이거나 대조적인 개념처럼 보이기도 하겠지만 결국 메시지와 짜임새를 모두 갖춘, 읽는 사람이 계속 읽고 싶다고 생각하는 글을 쓰는 건 작가의 역량에 달려 있는 것이기도 하겠다. 독자를 너무 과대평가도 과소평가도 하지 않으면서, 문장, 문단, 글의 길이와 글의 주제에 대해서 작가는 곧 기획자이자 편집자의 관점으로 고민해야만 한다.
5. 좋은 글이 가지는 힘을 앞으로도 믿어보려 합니다
작가와 에디터들의 강연과 토크에 앞서 무대에 선 오성진 브런치 파트장은 브런치의 1막과 2막에 대해 말했다. 1막은 1)글에 집중하는 공간, 2)출판 지원 프로젝트, 3)작가와 기회의 연결 이었다면 2막은 '작품을 완성하는 플랫폼'을 만들어가는 일이다. 작가의 필력 뒤에 숨은 기획력을 발휘할 수 있는 브런치북을 보완하고 다듬어가면서 브런치가 어떤 철학을 가지고 이 플랫폼을 운영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들을 수 있었다. 특히 곧 지원 예정인 브런치북의 전용 통계에 대한 이야기는 브런치의 앞으로를 더욱 기대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글이 작품이 되는 공간이 앞으로 어떤 '작품을 만들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갈 것인지에 관하여
글을 쓸 수 있는 플랫폼은 브런치가 아니어도 많이 있지만, 나 역시 브런치만이 갖고 있는 장점과 브런치만의 매력에 대해 짧지 않은 시간 느끼고 경험해왔고,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주변인에게도 반드시 브런치를 언급한다. 내 브런치 계정의 가장 오래된 글은 2015년 9월 4일에 발행되었다. 4년의 시간 동안 브런치는 'beta' 대신 정식 서비스를 선언했고, 나는 몇 백 편의 길고 짧은 글을 발행했다.
구독자가 몇 명이든, 조회 수가 몇이든, 그중 실제로 몇 명이 글을 다 읽은 사람이든, 그 어떤 사실들에도 변하지 않는 건 오직 '쓰는 사람'이라는 정체성뿐이다.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글을 써왔는지에 대해서는 그 당시에 쓸 수 있는 만큼을 썼다고 말하겠지만 브런치는 미완의 글들을 끼적거리는 내게도 '작가'라는 호칭을 붙여주고 브런치에 글을 쓴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내 삶을 버티게 하는 수많은 문장들을 안겨주었다. '영화를 보기 위해 글을 쓰고 있습니다'라고 쓴 적도, '취미는 천천히, 특기는 꾸준하게'라고 쓴 적도, '영화의 이야기는 보려고 한 만큼만 보인다고 믿습니다'라고 쓴 적도 있다. 저것들이 다 '나만 쓸 수 있는 문장'인 건지는 모르나 '내가 쓴 문장'들인 건 맞다.
글을 쓰는 일이 내 삶을 얼마나 달라지게 만들까? 그 방향에는 행복하고 윤택한 일들만 가득하진 않을 거다. 하지만 좋은 글의 힘을 믿는 한, 매 순간 무엇인가를 쓰는 한 계속해서 쓰는 사람으로의 길을 걷겠다. 그 길을 내 작지만 큰 브런치가 닦아나가고 있다.
내게 지난 시간 동안 브런치가 어떤 의미였고 앞으로 어떤 의미일 것인지를 생각하면서, 글을 쓴다는 일에 대해 더 오랫동안 생각하면서, 카카오 크리에이터스 데이 행사에 다녀온 이 사적인 기록은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행사가 끝나고 브런치의 여러 관계자 분들과 반갑고 감사한 인사를 나눈 뒤, 노들서가 앞에서 여의도 쪽을 바라본 순간의 그 노을빛과 그 시간의 알맞은 바람 같은 것을 생각하면서. 이 기록은 계속 쓰일 것이다. (2019.1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