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동진 Oct 20. 2019

문학이 세상을 바꾸지는 않지만

소설가 김연수 산문 『시절일기』

지난 7월에 출간된 소설가 김연수의 새 산문 『시절일기』. 진작 읽었지만 뒤늦게 남겨두는 기록이다. 『청춘의 문장들』이나 『지지 않는다는 말』, 『소설가의 일』 등 이전의 산문들이 사적인 기록과 개인의 성장에 좀 더 중점을 두고 있었다고 자의적 판단을 해본다면, 이번 『시절일기』는 명백히 작가의 시선이 사회와 타인으로 향해 있다.


내 기준에서 김연수의 글과 문체는 쉽게 읽히면서도 특정한 단어나 문장이 부분적으로 기억에 남는다기 보다는 (그렇다고 부분적 표현이 기억할 만하지 않다는 게 아니다) 해당 글 전체를 읽어야 그 맥락 속에서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쪽이다. 그래서 김연수의 어떤 문장을 인용하기도 하지만 늘 그 문장이 수록된 글 전체를 다시 읽고 싶어진다. 그럼에도 책 전체의 내용을 포괄하는 듯한 문장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그렇다면 한 권의 책을 읽고 인생이 바뀌었다고 누군가 말한다고 해도 비웃을 수만은 없지 않을까?"(176쪽) 일 것이다. 하나 더, "겸손이 세계의 실체에 접근하는 가장 기초적인 기술이라는 점은 바뀌지 않는다."(163쪽).


소설가 김연수의 산문 『시절일기』(레제, 2019)


"어떤 글이 내가 쓴 글이고, 어떤 글이 저절로 쓰여진 글인지 구분할 수 없다"(9쪽)라고 말하면서도 이 책에서 그가 언급하는 수많은 책들은 모두, 그 책의 무슨 이야기가 자신에게 어떤 의미로 와 닿아 삶에 영향을 주었는지를 아는 채로 등장한다. 쓰는 사람이 아니어도 삶의 고독 같은 건 피할 재간이 없다. 하지만 스스로의 판단이 옳지만은 않다고 유보하면서, 지난 시절들이 자신에게 어떤 과정으로 남았는지를 매 순간 의식하면서, 소설가는 오로지 홀로 계속 쓴다. 깊은 밤 심야 라디오의 낯선 목소리에 귀 기울이듯, 그는 마음까지 기울이며 온 몸으로 쓰고 또 고쳐 쓴다.



"이건 충분히 가능한 마음이리라. 어른들이 이런 가능한 마음을 꼭 붙들고 있는 동안, 그 소년은 어떤 꿈을 꿨다. 그러니까 소녀의 눈으로 멀어지는 자신을 바라보는 꿈. 가능한 마음들이 저마다 자기부터 이해해달라고 아우성치는 이런 세상에서, 소년은 그런 불가능한 꿈을 꿨다. 글쓰기에도 꿈이 있다면, 아마도 그런 것이 아닐까? 그런 꿈을 꾸기 위해서 작가가 신이 될 필요는 없다. 아니, 그 누구도 신이 될 필요는 없다. 단 한 번만이라도 다른 사람의 시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 (98쪽)


한 번뿐인 삶의 온갖 불확실함 속에서,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문학을 멈추지 않고 쓰는 사람은 이 세계에 필요한 사람이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같은 단어를 안고 쓰는 사람 역시 있어야 하는 사람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만의 이야기에 머무르지 않는 사람 역시 있어야 하는 사람이다. 혼자의 이야기를 함께 지나 보낸 이야기로 만들어낼 줄 아는 사람도 그렇다. 그런 사람은 이야기를 통해 삶이 한 번만이 아니라 두 번일 수도 있다는 걸 몸소 아는 사람이다.


그가 소설가가 아니라 '소설 쓰는 사람'이라고 표현한 것의 의미를 알게 된 뒤부터, "자신의 불안을 온몸으로 껴안을 수 있는 용기, 미래에 대한 헛된 약속에 지금을 희생하지 않는 마음, 다시 말해서 성공이냐 실패냐를 떠나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는 태도."(『소설가의 일』에서)를 알게 된 뒤부터, 나는 그의 전 작품 모두를 읽은 사람이 아님에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작가라며 주저하지 않고 김연수를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내 한 시절에, 가지 않은 길들 사이에서 방황하는 내게 이 책의 존재는 그 자체로 선물이었다. 신형철의 표현을 잠시 빌려 이렇게 적어야겠다. "내가 지금 가장 읽고 싶은 책은 김연수의 다음 소설이다." 한 권의 책이 능히 사람을 변화시킨다. (2019.10.20.)


<채널 예스> 9월호의 커버스토리, 소설가 김연수.




*이메일 영화리뷰&에세이 정기 연재 <1인분 영화> 11월호 구독자 모집: (링크)

*글을 읽으셨다면, 좋아요, 덧글, 공유는 글쓴이에게 많은 힘이 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할 일이 있다고 좋아하는 걸 안 할 수는 없잖아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