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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Sep 04. 2019

할 일이 있다고 좋아하는 걸 안 할 수는 없잖아요

가을 문턱의 크고 불확실한 행복

(의식의 흐름이 조금 담긴 끼적임) 새로 준비해야 하는 강의계획안, 몇 안 되지만 당장 마감이 있는 글, 진행 중인 모임의 다음 구상과 준비, 그 밖의 불규칙적인 일들, 그것들을 짜거나 쓰거나 하거나 고민하면서도 동시에 좋아하는 책이나 영화를 손에서 놓을 수는 없는 마음에 있다.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에 실린 단편 하나를 단숨에 읽고, 책 뒤에 실린 작가의 말에서 한 대목을 읽으면서 작지만 큰 위안을 잠시 얻게 된다.



"다행인 건 되도록 물러서지 않고 모든 상태를 기록하려 노력했다는 점이다. 아름다움이 있다면 아름답다고 썼다. 사랑이 있다면 사랑이 있다고, 잃어버리거나 비극과 직면했다면 슬프다고 썼다. 어리석었다면 고통스러울 정도로 어리석었다고 용서할 수 없을 듯한 순간에는 용서할 수 없으리라고 썼다. 완전히 혼자라는 생각이 들면 그렇다고, 하지만 그것이 강제적인 고립을 뜻하지는 않는다고 썼다. 우리는 스스로 그런 선택을 하며 상처 이후의 시간을 예비할 수 있다고. (...)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을 붙드는 일, 삶에서 우리가 마음이 상해가며 할 일은 오직 그뿐이라는 생각을 한다."

(김금희, 『오직 한 사람의 차지』, 292-293쪽, '작가의 말'에서(문학동네, 2019))



최근 개봉한 정지우 감독의 영화 <유열의 음악앨범>에는 "내가 한 선택들인데 왜 불안하기만 할까"라는 '미수'(김고은)의 말이 있다. 출판사의 정규직을 택한 자신과, 라디오 프로그램의 단기 아르바이트를 택한 동창 '현주'(정유진)의 사이에서, 불확실한 나날들과 관계 사이에서 '미수'는 불안해하고 자신을 작게 만든다. 김금희 작가의 위 말이 꼭 내 말이었던 것처럼, '미수'의 그것 역시 꼭 내 말이다. 하고 싶었던 말이나 하지 못했던 말을 누군가의 말과 글이 대신 담고 있을 때 나는 그 작품이 (적어도 내게)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훗날이 있다면 어떤 모습일지 모르지만 만약 그때에 가 지금을 생각하게 되면 오늘의 내일에는 그때의 어제를 어떻게 느끼게 될지를 생각한다. 영화 속 '미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지금을 적어도 '후진' 시기라고 기억하진 않을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중이다. 나는 '좋아하고 하고 싶은 일'을 직업으로 경험했고 꿈꾸는 것과 현실인 것 사이의 차이 정도는 잘 알고 있다.


어제 아침에 아빠에게 카톡이 왔다. 그리 살갑고 다감한 자녀는 못 되는 나는 주로 부모와의 사이에서 연락을 하는 쪽보다는 받는 쪽이다. 아빠의 꿈자리가 어땠는지를 나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최근 새롭게 제안받았거나 진행하게 된 일들을 몇 가지는 자랑삼아 공유하기도 했다. 그건 지금의 내 일상이 다소 어수선하기 때문인데, 우스개처럼 '바쁜 척'에 대해 여러 사람에게 말하곤 했지만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지 못하거나, 잡힌 약속을 내 사정 때문에 취소하거나 미룬 적이 최근에 여럿 있다. 어떤 방향으로 정리되어 있는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하면서도 지금은 그러고 있지 않다는 점을 상기하면 적어도 지금까지의 2019년을 간추리게 될 키워드의 하나는 '혼돈'이나 '안개' 같은 말들이 아닐까 생각한다.


친구와 연락을 하다 "바쁜 척할 수 있는 건 좋은 거야"라는 말을 들었다. 그건 맞는 말이기도 하다. 지금도 나는 스스로를 "좋아하는 일이 직업이어야만 더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 거기에는 동시에, 이상만이 아니라 직업적 커리어 패스(Career-Path)가 중요하다는 판단도 하고 있다. 말하자면 이건 뒤처지는 기분이다. 뒤처지지 않는 기분이 되고 싶다. 어쩌면 작년 가을을 꽤 한량처럼 보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2019.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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