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동진 Sep 06. 2015

한 계절이 가면 다른 계절이 찾아오고

<500일의 썸머>(2009), 마크 웹

특별한 누군가를 만나기 전까지는 절대 행복해질 수 없다고 믿는 남자 톰(조셉 고든 레빗)과, 영원한 사랑 같은 건 없다고 믿는 여자 썸머(주이 디샤넬)의 만남. 남자는 여자를 처음 만난 순간 그녀가 자신의 운명(오늘부터 1일!)이라 확신한다. 그녀의 미소, 머리칼, 무릎, 목에 난 하트모양의 점, 말하기 전에 입술을 핥는 버릇, 웃음소리, 자는 모습, 그리고 자신이 그녀를 떠올릴 때 생각나는 노래까지 모든 것이 좋다고 말하는 이 남자. 그녀 덕에 자신의 삶이 가치있고 행복하다고 믿는다.


그런 그녀가 갑자기 헤어지자고 말한다. 그 순간, 그는 그녀의 삐뚤삐뚤한 치아도 싫고 60년대 헤어스타일도 싫고 울퉁불퉁한 무릎도 싫고, 목에 난 바퀴벌레 모양의 얼룩도 싫어지며 말하기 전에 혀를 차는 버릇도 싫어진다. 그녀의 목소리도 웃음소리도 싫다.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슬픔과 친구가 되어버린 그는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과거의 퍼즐을 이어보려 노력하지만, 사라진 퍼즐조각은 맞출 수 없다. 그 때의 퍼즐은 지금 고 있는 퍼즐과 다르다.


퍼즐 조각이 사라진 건, 미리 결과(그녀가 자신의 운명이라고)를 정해놓고 모든 것을 그 결과에 끼워맞추려고만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체의 퍼즐을 바꿀 수 있는 우연이라는 조각도 단순히 수많은 조각의 하나로 치부해버리고 만다. 그 우연이란, 사랑 같은 건 없다고 말하던 썸머를 식당에서 만난 낯선 남자와 결혼하게 만들 만큼 커다란 것이었다. 헤어지자는 그녀의 말은 '갑자기'가 아니었다. 그걸 깨닫는 순간, 톰은 썸머를 원망하는 대신 깊은 절망에서 벗어나 썸머가 행복하길 진심으로 응원할 수 있게 된다.


썸머와의 만남은 톰을 성숙하게 했고, 어텀과의 만남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자신이 기차 안에서 들고 있던 <복의 건>이라는 책 제목처럼, 운명은 만들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나하나 쌓아가는 것이라는 걸 깨달은 덕분이다. 우연은 무수히 많고 많지만 정해진 운명이란 건 없는 것인지 모른다. 그러니 사랑은 기승전결이 아니다. 지나간 사랑조차도 시간 순이 아니다. <500일의 썸머>가 수많은 날들을 아무렇게나 오가듯, 기억의 조각들이 순서없이 모이고 쌓여 만들어지는 것이 사랑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나는 누군가의 썸머였고, 그리고 , 어텀일 것이다. (★ 10/10점.)


<500일의 썸머((500) Days of Summer, 2009)>, by 마크 웹

2010년 1월 21일 (국내) 개봉, 95분, 15세 관람가.


출연: 조셉 고든 레빗, 주이 디샤넬, 클로이 모레츠, 클락 그레그, 제프리 아렌드, 매튜 그레이 구블러 등.





*좋아요와 덧글, 공유는 글쓴이에게 많은 힘이 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리얼리스트이되, 불가능한 꿈을 믿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