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 노바디>(2009), 자코 반 도마엘
체스처럼 말을 움직이는 게임을 하면서 승패를 가를 수도 있는 최후의 선택을 앞둔 상황, 혹은 아무리 불리해도 말을 움직일 수밖에 없는 상황을 가리키는 용어로 'Zugzwang' 이라는 게 있다. (정확하지는 않으나 '츠쿠츠방' 정도로 발음한다. 편의상 이하 츠쿠츠방이라 표기함) 17세기 이후 독일에서 체스의 엔드게임 분석을 하면서 정립되기 시작한 개념('츠쿠츠방'이란 단어가 처음 사용된 것은 1850년대라고 한다.)인데, 독일어로 '강제로 이동하는 것'이란 의미를 지닌다. 특정한 대치 상황에서 승리 혹은 패배의 결과로 직결되는 경우의 수와 시나리오 등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나온 이 츠쿠츠방이란 말을, 영화 <미스터 노바디>(2009)에서 니모(자레드 레토)는 이런 말을 덧붙이며 언급한다. "선택을 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가능한 상태로 남게 돼."
여기서 가능성이 높고 낮은 것의 정도는 중요하지 않다. 갈림길에 놓였을 때 어느 쪽도 택하지 않는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즉, 그 어떤 것도 이뤄낼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생을 살면서 크고 작은 수많은 선택의 상황을 마주한다. 자의든 타의든, 의사를 결정하는 데에 얼마의 시간이 걸리든 마침내 우리는 특정한 선택지에 체크를 한다. 2009년작으로 국내에는 2013년 극장 개봉했던 자코 반 도마엘 감독의 <미스터 노바디>는 바로 이 '선택'에 관한 영화다. 좀 더 정확하게는, '지나간 선택(들)'에 대한 영화다.
배경으로 하나 전제해야 할 것은 영화의 설정인 '망각의 천사' 이야기다. 영화에 따르면 사람은 아기로 태어나기 전에 일종의 천국과 같은 공간에 머무는데, 여기서 (다소 잔인한 표현처럼 여겨지겠으나) 자신의 부모가 될 사람을 선택할 수 있다. 또한 앞으로 자신의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미리 볼 수 있다. 부모를 고르고 나면, 망각의 천사가 나타나 아기의 코 밑에 손을 가볍게 대어 징표를 새겨주는데, 그 손이 닿았던 자리가 바로 인중이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망각의 천사가 그만 주인공 니모를 지나쳐 그의 인중에 손을 대는 것을 깜빡했다. 그래서 <미스터 노바디>의 주인공 니모라는 캐릭터는 다가올 미래를 망각하지 않은 인물이다.
미래를 볼 수 있는 9살의 니모가 처음으로 마주하는 커다란 선택의 순간은, 이혼을 결심한 부모 중 누구를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따라갈 것이냐 하는 것이다. 엄마가 아빠를 떠나는 기차역(역의 이름은 'Chance'다!)에서 기차가 출발하기 전, 니모는 자신이 엄마를 따라갔을 때와 아빠의 곁에 남았을 때의 미래를 각각 떠올린다. 그 후 안나(다이앤 크루거)와 앨리스(사라 폴리), 진(린당 팜)이라는 세 명의 여자를 만나고 그들과 결혼을 하며 각각의 갈래에 따라 자신의 직업과 삶의 양상이 달라지는 과정이, 이 모든 선택의 결과를 지나 118세의 니모가 과거를 회상하는 대목과 맞물려 현란하되 잘 통제된 채 전개된다. 따라서 <미스터 노바디>의 이야기는 9세의 니모가 찾아오지 않은 모든 미래의 경우의 수를 미리 살아보는 이야기이기도 하며, 118세의 니모가 자신의 과거를 재구성하는 이야기일 수 있는 동시에, 이혼 후 쇠약해진 아빠를 돌보며 공상과학 소설을 쓰는 소년 니모가 만든 이야기 속의 이야기라 할 수도 있다. 요컨대 영화의 내용 역시 하나의 명쾌한 이야기로 두지 않고 관객에게 선택의 여지를 남긴다.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나오는, 갈라지는 기찻길처럼 선택의 결과에 따라 앞으로의 인생이 달리 전개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특히 영화의 도입은 수많은 니모의 삶들이 각기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들을 나열하듯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하고, 마무리는 모든 선택의 과정을 돌아본 니모가 '어떤 선택'을 하는 것으로 결론짓는다. 이런 식의 전개는 한 번 뿐인 인생을 사는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선택을 해야만 하고, 결국 돌아갈 곳은 없다는 결론으로 관객을 인도한다. 어떤 선택에든 끝은 찾아오며, 인생의 여정은 마무리된다는 것. 단지 마무리가 다 같은 마무리는 아니되 제각기 반드시 가치 있는 삶이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삶이란 그런 것이구나. 그래서 어른들은 돌아가시고 아이들은 자라는구나. 다시 돌아갈 수 없으니까 온 곳을 하염없이 쳐다보는 것이구나. 울어도 좋고, 서러워해도 좋지만, 다시 돌아가겠다고 말해서는 안되는 게 삶이로구나." (김연수, <청춘의 문장들>, 242쪽, 2004, 마음산책)
조금 더 비중 있게 다뤄지는 인물이 있기는 하지만 안나를 만나는 니모와 앨리스를 만나는 니모, 진을 만나는 니모 사이에 과연, 어떤 우열의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다큐멘터리 진행자와 수영장 관리인을 비롯한 직업의 우열은 어떠하며, 34세까지 사는 인생과 118세까지 사는 인생의 그것은 또 어떤가. 선택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니모가 9개의 인생을 살았든 90개의 인생을 살았든, 그 안에서 제각기 다른 의미의 행복이 존재하며, 그것이 각자 고유한 가치를 지닌 삶을 살게 한다는 이야기다. 어떤 선택도 하지 못하고 머무른다면, 혹은 지나간 선택들을 돌이킬 때 후회만 가득하다면, "Nobody". 즉 내 존재의 의미를 찾을 수 없는 노바디가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니모는 갓난아기일 적부터 '존재의 의미'를 성찰하는 꽤 심오한 아이다.) 당신이 무슨 선택을 하든,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당신의 삶은 가치 있고 옳다. 우리는 결국 어떤 선택이든 해야만 하므로, 츠쿠츠방이라는 것은 현실의 삶에 적용해서는 안 될 말이다.
2박 3일 정도 이야기해도 부족할 것만 같은 '선택'이라는 주제를 놓고 <미스터 노바디>는 나비효과에서부터 시작해 상대성 이론, 엔트로피, 평행 우주론, 초끈이론 등 수많은 이론과 더불어 철학적 테마를 아우른다. 언뜻 쓸데없이 복잡하고 어려워보이지만, 굳이 내용의 퍼즐을 조각조각 끼우고 맞춰가며 볼 게 아니라 그저 매 순간의 장면이 전달하는 느낌에 내 삶을 접목시켜 본다면 좋을 것이다.
이 영화를 연출한 자코 반 도마엘 감독은 시나리오 작업에만 8년이 넘는 시간을 쏟았다. 실제로 영화를 보면 각본에 굉장한 공을 들였다는 것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만큼 인생의 선택이라는 주제는 그 자체로 다루기 쉽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그는 주제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으면서도 깊이 있는 이야기를 다루는 데 성공했고, 각본 뿐 아니라 촬영과 편집, 음악, 캐릭터, 연기, 연출 등 모든 면에 있어서 뛰어난 조화를 이뤄냈다. 게다가 영화의 음악은 자코 반 도마엘 감독의 형인 피에르 반 도마엘(1952-2008)의 마지막 작품이라 의미가 남다르다. (OST가 국내에 정식 발매되지 않은 것이 아쉽다.) 흔히 말하는 '인생영화'류의 표현을 그다지 달가워하는 편은 아니나, 소수의 영화만을 골라야 한다면 <미스터 노바디>는,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휴고>(2011)와 함께 반드시 언급할 영화 중의 한 편이다. 이 영화가 당신이 만들어나갈 길을 닦는데 일말의 보탬이 되길 응원한다. (★ 10/10점.)
<미스터 노바디(Mr. Nobody, 2009)>, by 자코 반 도마엘
2013년 10월 24일 (국내) 개봉, 139분, 15세 관람가.
출연: 자레드 레토, 다이앤 크루거, 사라 폴리, 린당 팜, 리스 이판, 토비 레그보, 주노 템플 등.
P.S. 가장 아끼는 한 장면
15세의 니모(토비 레그보)와 안나(주노 템플)는 서로가 떨어져 지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되자 슬퍼하며 사랑을 나눈다.
안나: "등대에서 날 기다려. 일요일마다 꼭. 우리가 다시 만날 때까지, 평생동안. 헤어지는 거 아냐."
니모: "10일은, 그러니까... 14,400분이야.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어."
안나: "있잖아, 숨을 천천히 쉬면 시간도 천천히 간대. 힌두교인들이 그랬어."
이 신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다름 아닌 "Mr. Nobody"라는 곡이다. 버즈아이 뷰 시점으로 니모와 안나를 내려다보는 이 지점에서는 그저, 몇 번을 봐도 어떤 생각도 들지 않고 영화에 빠져들고야 만다. 가끔은 모든 것을 다 떠나서 그저 지금 여기의 이 장면에 한없이 젖어들 때가 있다. <미스터 노바디>는 적어도 내게 그런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