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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Sep 09. 2015

영화와 배우가 함께 늙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감회

<비포 선라이즈/선셋/미드나잇>(1995, 2004, 2013)

이 영화가 아니더라도, 영화의 거의 모든 이야기는 어쩌면 필연적으로 우연이라는 사건을 영화적 장치의 하나로 포장한다. 제시(에단 호크)와 셀린느(줄리 델피)가 타고 있던 그 기차에서 어느 부부가 언성을 높이지 않았다면? 둘의 옆자리에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음에도 진지하게 대화를 이어나갈 연결고리가 없었다면? 비엔나에서 즉흥적인 하루를 보낼 수 없을 정도로 긴박한 일정이 있었다면? 물론 삶은 수많은 질문과 만약의 대답이 만들어내는 우연의 화합물이니 말이다.

적어도 만남의 시작은 그랬다. 하지만 <비포 선라이즈>가 '영화 같은' 우연에 그치지 않고 '리얼리티'의 측면에서 빛날 수 있었던 것은 영화 속 대사가 아니라 현실 속 연인의 이야기를 바로 옆에서 지켜보는 것 같은 지극히 현실적인 대화 내용들 덕분인 동시에, 우리의 일상이 그렇듯 영화의 뚜렷한 클라이막스가 없기 때문이다.

두 남녀의 관계가 진전될 수 있었던 건 단 하루라는 제약이 있었기 때문이지만, 제시와 셀린느는 분명 그 하루가 또 다른 하루로도 계속 이어지기를 꿈꿨다. "머리를 어떻게 빗는지, 옷은 어떻게 입는지,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말하는지, 그걸 아는 게 진정한 사랑일거야." 같은 오래된 연인들만이 느낄 수 있는 그 감정을 말하는 대사에서 드러나듯 말이다. 모든 '지속되는' 관계에 회의적이던 두 사람은 가장 짧은 만남을 통해 오히려 관계의 지속성에 대한 생각을 바꿔나가는 것이다. 그러다가 비엔나의 거리에서, 영화는 해가 뜨기 직전처럼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서 끝난다. 두 사람이 언제 어디선가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는 걸 관객은 이미 알고 있다. 두 사람도 알고 있을 것이다. "신이 있다면 너와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이의 공간에 있을 거야."라는 셀린느의 말처럼 <비포 선라이즈>는 둘이 주고받는 말의 리듬과 간간히 엇갈리는 눈빛들, 그리고 함께 마시는 공기가 좋다. 그 공기가 스크린을 뚫고 나와 관객에게도 닿는다. (★ 9/10점.)


<비포 선라이즈(Before Sunrise, 1995), by 리처드 링클레이터

1996년 3월 30일 (국내) 개봉, 100분, 15세 관람가.


출연: 에단 호크, 줄리 델피 등.




이 영화에서 전작 <비포 선라이즈>(1995)와의 가장 큰 차이를 느끼게 하는 것은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가 직접 각본에 참여했다는 점이다. 젊은 날의 판타지 같았던 비엔나의 여름, 그로부터 9년 후. 두 사람이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에서 재회한 파리의 이야기는 흡사 줄리 델피가 연출한 <뉴욕에서 온 남자, 파리에서 온 여자>(2007), 그리고 에단 호크가 출연한 <보이후드>(2014)를 마치 비포 시리즈의 스핀오프처럼 느껴지게 할 만큼, 꿈에서부터 현실로 한층 깊숙하게 넘어온다.


현실감을 느끼게 하는 가장 큰 요소는 둘의 대화를 바로 곁에서 따라가면서 듣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카메라의 움직임이다. 롱테이크는 아니지만 몇 분 간의 원테이크가 여러 차례 이어지는데, 제시의 이마에 늘어난 주름과 셀린느의 달라진 머리모양에 아랑곳하지 않고, <비포 선셋>은 <비포 선라이즈>와 시간적으로 9년이 아니라 바로 몇 주 혹은 몇 달의 차이밖에 나지 않는 이야기처럼 생생하다.


리처드 링클레이터는 그의 여러 영화들을 통해 시간의 흘러감에 대해 끊임없이 (늙어가는 배우들과 함께) 탐구해왔지만, 비포 시리즈 중 특히 <비포 선셋>은 사랑의 흘러감에 대해 반추하게 한다. 셀린느의 말처럼 사랑은 또 다른 사랑으로 온전하게 잊혀지거나 극복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제시의 말처럼 나이를 먹어간다는 건 어떤 의미로 더 소중하다.

비엔나에서 재회하지 못했지만, 6개월 후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뒤로 하고 다른 사랑들이 비엔나의 하룻밤을 대신해버렸지만 그때의 소중함을 잊지 않았으며 9년 후에라도 재회한 것에 감사했던 제시. 그리고 그런 그의 앞에서 그를 아프게 떠올리며 만들었던 노래를 선뜻 불러주는 셀린느의 용기. 음악과 함께 "자기 이러다 비행기 놓치겠어." - "알아."로 마무리되는 <비포 선셋>은 우연과 운명에 대한 낭만으로 가득했던 비엔나의 밤에, 세월과 현실이라는 한낮의 파리의 왈츠가 덧입혀 만들어진 깊이있는 속삭임이다. 그리고 이 한층 수다스러워진 연애담은 제시의 작품을 위한 뮤즈로 희생된 것만 같았던 셀린느가 뒤이어 제시를 자신의 이야기 속 주인공으로 만든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 9/10점.)


<비포 선셋(Before Sunset, 2004), by 리처드 링클레이터

2004년 10월 22일 (국내) 개봉, 79분, 15세 관람가.


출연: 에단 호크, 줄리 델피 등.




세 편의 비포 시리즈는 시리즈를 거듭하며 단순히 공간적, 시간적 배경만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2편과 마찬가지로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가 (리처드 링클레이터와 함께) 각본에도 참여한 <비포 미드나잇>은 시간을 다루는 방식도 다르다. 전작에서 해가 뜨기 전(선라이즈), 해가 지기 전(선셋)이라는 시간적 제약이 관객에게 일종의 서스펜스처럼 작용했다면(비행기를 타야 하는데 탈 것인가, 둘이 계속 만날 것인가, 등등) <비포 미드나잇>의 '미드나잇'은 시간적 제약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제시(에단 호크)와 셀린느(줄리 델피)는 이제 부부다. 내일의 해가 뜨는 것도, 지는 것도 함께 한다. 그 다음의 내일도 그렇다.

<비포 미드나잇>은 시리즈를 통틀어 가장 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두 사람만을 비추는 장면만큼이나 그렇지 않은 장면들도 많으며, 영화 속 대화는 단순히 대화에 그치지 않고 다음 장면 혹은 그 다음에 이어지는 장면들과 묘하게 연결되는 대목이 많다. 이를테면 "해가 뜨고 지듯이 모든 건 잠시 거쳐갈 뿐"이라는 할머니의 대사 다음에 고대 유적을 제시와 셀린느가 함께 걷는 장면. 노천에서 해(곧, 사랑)가 지는 것을 아쉬워 한 다음에 호텔에서 헨리(제시의 전처 사이에서 난 아들)와 시카고 이야기를 하다 말다툼을 하는 장면. 두 사람이 유적지를 걸으며 발정난 염소 이야기를 농담처럼 하는데 잠시 후에 정말로 염소를 비추는 장면 등이 그렇다.

셀린느의 카세트 테이프 모양의 아이폰 케이스, 갈색으로 변색된 사과, 고대 그리스 유적지, 지는 태양, 늘어가는 주름. 영화 속 수많은 장치들은 링클레이터의 다른 몇몇 영화들이 그렇듯 '시간의 흘러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시간은 흐른다. 그리고 우리는 언제나 흘러감에 아쉬워한다. 디지털 세상에 과거의 유물이 된 카세트 테이프처럼, <비포 미드나잇>의 40대가 된 두 사람을 보며 18년 전 처음 만난 두 사람의 풋풋한 모습을 떠올린다.

이제 제시와 셀린느 두 사람은 더이상 둘만의 낭만을 누릴 시간이 없다. 섹스를 하다가도 아들의 전화를 받아야 한다. 낭만 따위는 더 이상 없이, 신경써야 할 직업, 아이들, 전처, 가족들, 현실의 세상살이에 찌든 것처럼 보인다. 두 사람의 늘어난 주름과 군살만큼 말이다. 그럼에도 제시와 셀린느는 여전히, 사랑한다. 가끔은 부딪히기도 하고, 힘든 나날을 보내기도 할 것이지만, 둘은 계속 함께일 것이다. 두 사람이 함께 한 세월의 깊이만큼, 내일의 태양이 비추는 햇살은 더 따스하고, 더 풍부하고 깊은 빛깔일 것이다. 세 편의 영화가 함께 한 기간 동안 감독과 배우만 늙는 것이 아니다. 관객도 늙는다. 우리도 늙는다. 늙되, 낡지 않는다. '미드나잇' 다음은 다시, 더 깊어진 '선라이즈'다. (★ 9/10점.)


<비포 미드나잇(Before Midnight, 2013), by 리처드 링클레이터

2013년 5월 22일 (국내) 개봉, 108분, 청소년 관람불가.


출연: 에단 호크, 줄리 델피 등.


아마도 가장 아끼는 삼부작을 언급하라면 빠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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