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2019)의 이야기는 명에 의존하지 않고 굳건히 자립하는 조선을 꿈꾼 군주 '세종'(한석규)과 그의 시대에 여러 과학적 발명들을 남겼던 '장영실'(최민식)의 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사료를 기초로 하되 (당연히) 상상력을 더한 작품인데, 그건 말년을 비롯한 장영실의 삶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나아가 세종 시기를 다룬 여러 다른 드라마나 영화와 구분되는 <천문: 하늘에 묻는다>만의 방식과 관점을 만드는 것이 바로 상상력이기도 하겠다. 천문(天文)이 아니라 '천문(天問)'. 두 사람은 별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 스틸컷
영화의 주된 바탕은 세종이 탄 가마 '안여'의 바퀴가 부러졌던 사건이다. 비 내리는 들판에서 흙탕물을 망연하게 뒤집어쓴 세종과 가신들의 표정으로 문을 연 <천문: 하늘에 묻는다>는 안여 사건 며칠 전으로 돌아가 사건의 배경을 다뤄내는 동시에 세종 집권 초기, 장영실이 세종의 눈에 들어 여러 연구 개발과 발명을 맡을 수 있게 된 계기를 조명한다. 이렇게 크게는 세 개의 시간대를 오가며 단조로울 수 있는 사료의 나열 방식을 피하고, 동시에 앞서 언급한 '세종과 장영실의 관계'를 짚어내는 데 중요한 정보들을 서사 진행에 효과적인 순으로 재배치하는 노력이 <천문: 하늘에 묻는다>의 각본에 묻어난다. 그리고, 거기에 (이미 <뿌리깊은 나무>(2011)에서 '세종'을 연기한)한석규와, <쉬리>(1999)로 한석규와 함께 연기했던 최민식, 그리고 <8월의 크리스마스>(1998)로 한석규의 얼굴을 섬세하게 살린 허진호 감독이 만났다. (허진호 감독이 전작으로 <덕혜옹주>(2016)를 연출한 건 마치 <천문: 하늘에 묻는다>에 앞서 시대극의 감각을 연마하기 위한 중간 단계였던 것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 스틸컷
실록의 일부 내용을 기초로 하되 역사로 남지 않았거나 야사이거나 상상인 이야기를 시대극으로 다뤄낸 영화는 <광해, 왕이 된 남자>(2012)와 같이 기존에도 이미 있었다. 세종을 매체에서 다룬 사례 역시 많이 있었다. 게다가 올해 이미 배우 송강호가 세종 역을 맡은 <나랏말싸미>도 몇 달 전 개봉했었다. 그렇다면 <천문: 하늘에 묻는다>만의 특징은 어디에 있을까.
'하늘에 묻는다'라는 부제가 붙은 것처럼, 본 영화의 중심은 몇 가지 층위의 질문이다. 먼저, 서사의 열쇠다. 세종과 장영실은 서로가 서로에게 어떤 관계를 맺었을까. 왜 장영실의 말년은 구체적으로 기록되지 않았는가. 여기에 영화 초반부터 중요한 바탕이 되리라고 명시된 '안여 사건'의 전말을 중심으로 두 인물의 감정과 내면이 세밀하게 개입된다. 내 방식대로 정의하자면 장영실은 신분의 벽을 넘어 과학이라는 학문을 통해 더 넓은 세상을 꿈꾼 인물이고, 세종은 장영실에게서 잠재된 능력을 발견하고 그것을 발휘할 수 있게 이끌고 조력한 인물이다. 더 간단히 표현하면 세종과 장영실, 장영실과 세종은 서로의 (요즘 말로) '덕질'을 실현시켜준 인물이다. 예컨대 명에 의존하지 않는 독자적 절기 구분을 원했던 세종의 바람을 장영실은 독창적으로 개발해낸 도구와 기술들을 통해 조선만의 절기를 만들어 실현한다. 물론 이것의 기반이 천문(天文)인 것이고.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 스틸컷
'천문'은 말 그대로 '하늘을 향해 질문하는' 일이다. 두 사람이 함께 야외에 누워 별을 관찰하며 이야기 나누는 장면. 실내에서도 한지에 구멍을 내어 별을 보는 듯한 경험을 선사하고 교감하는 장면. 이후에도 다른 인물로부터 비슷하게 재현되는 '별 보는 장면'은 지금은 당연하게 알거나 더 깊이 아는 것을 몰랐던 수백 년 전에도 누군가는 하늘을 매일 밤 올려다보며 꿈을 꿨으리라는 '사실'을 내비친다. 군주의 자리에서 누군가와 어딘가를 내려다보는 일들로만 일과를 보내야 했던 세종에게도 북두칠성을 비롯한 별자리들을 보는 일은 자신의 현재 자리에서 미래를 꿈꾸는 일이었다. 관노 신분으로 항상 고개를 숙이고 살아야 했던 장영실에게도 별을 관측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도 간섭과 통제를 받지 않고 자신의 꿈을 올려다보고 그 꿈을 향해 길을 연다는 뜻이기도 했다.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 스틸컷
매체에서 흔히 다뤄졌던 훈민정음의 창제나 반포는 <천문: 하늘에 묻는다>에서 집중적으로 다뤄지지는 않는다. 시기적으로 장영실을 다룬다는 것에서 기인한 선택이기도 하겠지만, 이는 영화의 이야기를 과학과 별을 바탕으로 하여 세종과 장영실의 관계에 집중시키기 위함이었겠다. 그리고 이 점은 <천문: 하늘에 묻는다>의 단단하고 세밀한 뿌리가 된다. 영화를 보고 나면 '두 사람이 저렇게 끈끈하고 친밀한 관계였구나'와 같은 생각을 쉽게 할 수 있는 건 그만큼 영화가 두 사람에게 대체로 고르게 비중을 할애하여 (무게중심은 '세종' 쪽에 더 있는 것 같지만) 각자의 이야기를 충실하게 다뤄냈다는 의미다. 단순한 시대극에 그치지 않고 거의 두 사람의 멜로드라마에 가깝게 여겨질 만큼, <천문: 하늘에 묻는다>는 각자의 꿈을 더 넓고 깊게 교류하고 발전시켜 '우리'의 꿈을 꾸었던 두 사람의 진진한 이야기를 납득 가능한 상상력과 해석을 담아 서술한다. 단순히 '신분 차이를 초월한' 정도로 간단히 표현할 수 있는 성질의 관계가 아니다. 함께 같은 별을 바라보고 같은 꿈을 꾼다는 건, 거의 사랑의 차원이다.
24시간 환하게 지낼 수 있는 오늘날에 비하면 훨씬 더 밤을 온전하게 밤으로 보낼 수 있었던 이 시기의 이야기를 스크린에서 만날 수 있었다는 게 그 자체로 반갑기도 했다. <천문: 하늘에 묻는다>의 중반 이후 전개는 장영실이 이뤄낸 과학적 발명 자체보다는 그를 둘러싼 조선 내부의 이해관계는 물론 명과의 관계를 아우른다. 스케일은 커지지만 중심은 잃지 않는다. (<뿌리깊은 나무>에서도 배우 이재용의 연기로 볼 수 있었던) '조말생'(허준호)의 등장 이후 살짝 흐름이 바뀌는 듯하다가도 이내 세종과 장영실의 얼굴로 돌아온다. 함께 누워 별을 올려다보고, 동무처럼 하나의 대상에 몰두하는 생생한 두 얼굴은 곧 <천문: 하늘에 묻는다>의 모든 것이다. 꿈을 꾼다는 건 앞으로의 시간을 조금 미리 사는 일인데, 묘하게도 '누구나 읽고 쓸 수 있는 세상'을 꿈꾸고 실현시킨 세종의 (영화상 시점보다) 미래의 업적이 그 존재 자체로 영화의 그림자 역할을 하기도 한다. 발 딛고 선 땅에 안주하지 않고 하늘을 바라봤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들의 삶이 지나고 나서도 계속해서 이야기로 남고 영향력으로 이어지며 오늘의 하늘과 시간이 되었다. 세종과 장영실은 각자의 방식으로 서로의 이름을 함께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