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인 것들과 영화 바깥인 것들

보고 읽고 쓴 며칠의 영화 기록들 01

by 김동진

2020.01.01.

"(...) <미안해요, 리키>는 금융위기 이후 급격히 늘어난 모바일 앱 기반 호출 서비스와 임시직 경제(gig economy)가 만든 노동 환경을 주시한다. 리키는 자유롭고 자율적인 자영업자로 일하게 될 거라는 배송 회사의 약속을 믿고 운송기사 일을 시작한다. 그러나 '0시간 계약노동'이 실제로 뜻하는 바는, 회사가 노동자에 대해 어떤 책임도 지지 않을 자유와 벌점의 위협에 쫓기는 노예적 규율이다. (...)"
(<씨네21>,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중에서, 2019.12.25.)

영화가 오직 사람을 존경하고 보듬고자 세상에 치열하게 질문할 떄, 그 시선은 낡지 않는다. '시네마'가 사람과 세상에 주는 영향력이란 그런 것이다.

몇 차례 예매와 취소를 거듭한, 켄 로치 감독의 영화 <미안해요, 리키>(2019). 'Sorry, We Missed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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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02.

내 온라인 서점 장바구니에 담긴 품목의 수는 줄어들 리가 없고, 넷플릭스에서 '찜'해놓은 영화들이 한가득 쌓여 있다. 물론 그것들은 정말로 보고 싶은 것들이거나 관심과 흥미의 대상들이다.

전에는, 허비하는 것만 같은 시간들이 아깝게 느껴져서 책도 영화도 다른 사람들의 글도 많이, 최대한 많이 접하고 싶어했다. 최근 들어서 물리적으로 콘텐츠를 감상하고 소화할 수 있는 시간이 급격히 줄어들면서 생각도 조금씩 달라지기도 한다. 100편의 새 영화들을 억지로 기계적으로 해치우는 것보다 (그것 나름의 가치가 있겠으나) 지금 내게 필요하고 또 내가 하고 싶은 건 한 편을 보더라도 허투루 보지 않고 깊고 넓게 보는 일이다. 몰입과 집중, 그리고 열린 마음이 필요하다.

물론, 한정된 시간을 효율 있게 사용하는 노력도 있어야 하지만 바쁜 가운데 마련하기 쉽지 않은 여유의 시간에 일의 우선순위와 취향의 우선순위가 모두 중요하겠다.

아. 그렇다고 해서 '적게 봐도 좋다'고 생각하는 건 또 아니다. 모순적이게도. 다만 영화를 많이 봐야 한다는 책무에서 약간은 무게를 덜 느끼고 있는 것 뿐이다.


2020.01.03.

<업>(2009)을 몇 번이나 다시 보면서도 늘 시선과 마음이 머무르는 건 영화 초반의 파노라마 시퀀스다. 주인공 '칼'의 유년에서 시작해 같은 꿈을 꾸는 '엘리'를 만나 결혼해 노년을 맞이하기까지의 과정이 몇 분 안에 펼쳐지는 이 일련의 장면은 말 한 마디, 자막 한 줄 없이도 관객 각자의 삶을 반추하게 만들 만큼의 힘이 있다. 이 힘은 결국 애니메이션(Animation)의 본연의 힘과 무관하지 않겠다. 단 몇 분 사이에 일생의 주요 순간들을 보편적 감정을 담아 압축적으로 전달하는 일. <업>에 등장하는 수많은 풍선들 하나하나에는 누군가의 부풀었던 꿈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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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04.

오늘 읽은, 어느 소설의 작가의 말.

"그동안 내가 바라보았던 무대 위의 사람들을 떠올려본다. 그 빛나는 재능과 남다른 매력을. 지나가버릴 것이 분명한 순간들을 함께하고 있다고 믿었던 애틋한 마음을. 내가 목격한 찬란함을 증언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절실함을. 그 마음을 간직하고 오래도록 바라보는 일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쓰고 싶다. 계속."
(조우리, 『라스트 러브』, 창비,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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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05.

<써서 보는 영화>의 2020년 1월반 첫 시간이 오늘이었다. 4주 중 첫 시간에는 늘, 글을 쓰는 일이 어떤 의미와 가치가 있는지에 대해 말한다. 오늘은 매 시간 하던 이야기의 하나였지만 어느 한 대목에 관해 말하고 나서 스스로 그 말을 곱씹었다.

"어떤 이야기를 보고 나면 문득 그 이야기를 만나기 전으로 내 삶이 되돌아갈 수 없게 되었구나 하고 느끼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마찬가지로 저는 영화 한 편에 대한 생각과 감정을 글로 기록하기 전과 후의 삶 역시 측정하거나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분명히 다른 삶일 것이라고 생각해요. 일상의 사소한 순간들 하나하나가 결국은 나를 어제와 다른 오늘로 이끌어주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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