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는 늘 그렇다. 시작은 잘 기억나지 않고 과정만이 떠오르는 일들. 어떤 책은 읽다 보면 어느새 글쓴이의 매 순간에 깃든 생각과 감정에 깊숙하게 공감하며 그게 그의 이야기인지 내 이야기인지 헷갈리는 마음으로 읽게 된다. 헷갈린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이 순간 글이라는 매개를 통해 한 사람의 이야기가 다른 누군가에게로 전해지는 그 생생함을 공감각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는 게 중요하다.
"대학을 졸업하던 작년 6월에 이런 저런 글을 모아 독립출판물 하나를 펴냈는데, 1년도 안 되어 부끄러워져서 증쇄도 그만두고 책 낸 티도 안 내며 살았다. 이번 책에 대한 항마력은 그래도 2년은 갔으면 좋겠다."
"나에게는 남들한테 차마 말하기 부끄럽고 유치한 생존형 독법이 있다. 삶에서 고비를 만날 때 곁을 지켜준 책들이 있었고, 그 책들을 나만의 방식으로 읽었을 때 나는 계속 살아갈 힘을 얻곤 했다."
"왜 우리에겐 3억이 없는 걸까. 부모님이 불성실하게 산 것도 아닌데. 이상했다. 슬프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하고 어딘가 짠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고. 목적어가 분명하지 않은 감정이 들끓었다. 어쩌면, 나 때문이었을까?"
"책 읽기도 결국 자기 좋자고 하는 일이다. 그러니 읽는 스스로의 이해(利害)에 맞게 구미에 맞게 조금은 비틀고 왜곡하고 그래도 괜찮다. 특히, 많이 아플 때는 더욱 그러면 좋다. 왜 책을 읽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을 때, 이러한 '자의적 해석'의 쾌감을 느껴본다면 어떨까."
"너무 행복한 여행이었다고 호들갑을 떨지는 않겠지만, 혼자 생각하다 괜히 피식피식 웃음이 날 것 같은 허술한 여행. 틈이 있는 곳에만 무언가가 흘러 들어올 수 있다. 틈 많은 여행을 하고, 틈 많은 삶을 살고 싶다."
일상의 경험 안팎에 있는 '쓸 만한 순간'이라는 건 정도와 범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누구에게나 있다. 모두의 삶은 이야기로 빛날 수 있지만, 그 빛을 찾거나 만드는 건 오로지 본인의 몫이다. 이야기와 글쓰기가 삶에 도움이 되고 좋은 영향을 준다는 것을 계속해서 말해주는 수많은 쓰는 사람들의 존재가 든든하게 여겨지거나 그로부터 친밀감을 느끼게 될 때가 있다.
잘 쓴다는 건 있는 그대로 쓰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작정 잘 포장만 하는 것도 아니다. 자기 이야기를 남길 때에는 언제나 그 사이 어딘가에서 적정선을 찾고 하고 싶은 이야기와 읽히고 싶은 이야기의 경계에서 단어와 문장과 글을 조율한다. 한 글자를 쓰는 모든 순간은 고난과 고뇌의 연속이다.
잘 쓴 이야기란 그 알맞은 조율 덕분에, 한 편의 글로 나오기까지 그 이면에 있는 수많은 고민과 노고 덕분에, 결과물이 아니라 과정으로 탄생한다. 내게 있어 좋은 글이란 다 쓰인 글이 아니라 계속 쓰이는 글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2019년 1월에 다리를 다쳐 가고 싶었던 콘서트에 가지 못한 이야기를 쓴다고 할 때 필요한 건 '오늘의 결론'이 아니라 그날의 일이 삶에서 어떤 의미로 기억될지 혹은 어떤 의미였으면 하는지에 대한 사고의 흔적들이다.
<권수정 산문집>에는 '산으로 간 문장들'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지만 그 산은 물론 익히 생각하는 그 산이 아니라 정말 대직자 없이 스스로의 머리와 손과 몸과 마음으로 직접 이루어낸 하나의 고지다. 스스로에게 어려운 일 혹은 과제라고 느껴지는 것 중 하나는 영화나 책, 드라마와 같은 '기댈 곳'이 없는 온전한 '내 이야기'를 잘 써 내려가는 일이다. 그런 면에서 내게는 쉽지 않은 것을 누군가 해내는, 그것도 잘 해내고 다듬어 정리한 또 하나의 롤모델 같은 이야기가 여기에도 있다. 이런 이야기를 쓰고 싶다. (그러니, 속편 써주실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