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시마 테츠야 감독 신작 영화 '온다' 리뷰
호러 영화를 거칠게 둘로 구분하자면 '사연 많은 영화'와 '그런 거 없는 영화'일 것이다. 억울하게 죽은 이가 이승을 떠나지 못하고 자신을 죽게 한 장본인에게 나타난다든지 하는 게 전자이며 후자는 사연보다는 단지 '관객이 무서움을 느끼게 하기'에만 집중하는 종류다.
호러 장르의 역사를 논할 생각 따위는 없고 잘 알지도 못한다. 하지만 극장에서 본 호러 중 특히 기억에 남는 작품이 하나 있는데, 데이빗 로버트 미첼 감독의 <팔로우>(2014)다.
타인에게는 보이지 않고 오직 특정한 저주를 받은 인물 본인에게만 보이는 어떤 존재. 소리도 없이 그저 느릿느릿 걸어오지만 절대 멈추지 않고 죽지도 않는 '그것'을 자신으로부터 떼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성관계를 하는 것이다. 영화의 중심이 되는 배역들이 모두 10대라는 점에서 <팔로우>는 마치 '성'에 대한 미성년의 막연한 환상 내지는 두려움을 호러라는 장르를 통해 표현해낸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당연히, 주인공을 쫓아오는 '그것'이 어디에서 어떻게 생겨났고 왜 나타났는지 같은 것에 <팔로우>는 관심이 없다. <팔로우>에 대해 나는 '앞으로의 공포영화들이 배워야 할 장점들을 갖췄다'고 쓴 바 있다.
원제가 'It Follows'인 <팔로우>와 지금 소개할 <온다>(2018)는 영문 제목이 'It Comes'라는 것 말고도 닮은 구석이 있다. <온다>를 연출한 나카시마 테츠야는 광고 감독 출신답게 능숙해진 연출력과 감각적인 영상 속에서 사연 따위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듯 오직 하나의 목적에 충실하다. 엔터테인먼트. (그는 실제로 한 인터뷰 중 "정말 재미있는 라이브를 보았다"라고 관객이 느끼길 바란다는 이야기를 했다.)
한국 영화로 따지면 표면상 <곡성>이나 <사바하> 같은 소위 '오컬트'로 언급되는 영화들과 유사한 면이 있겠지만 <온다>는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영매와 무당이 등장하지만 결정적인 역할을 하거나 단서를 쥐고 있다기보다 관객에게 궁금증과 긴장감을 유발하는 역할을 한다. '그것'으로부터 가족을 지키려고 분투하는 듯 보이지만 결국 진짜 주인공은 되지 못하는 인물이 등장한다. 내면의 변화를 겪으며 성장하는 듯 보이지만 역시나 진짜 주인공은 되지 못하는 인물도 등장한다. 주인공이 누구라고? <온다>에는 서사 전체를 지탱하는 중심인물이 실질적으로는 없다시피 하다. 명시적으로 구분되지는 않지만 크게 세 부분 정도로 나눠볼 수 있는 영화에서 이야기를 이끄는 듯 보이는 화자는 세 번 바뀐다.
타이틀이 나오기 전 영화의 오프닝은 그릇에 물을 떠다 놓고 거울을 깨뜨리는 등의 의식을 한 채로 땀투성이가 되어 알 수 없는 '그것'이 물러가기를 바라는 인물이 무기력하게 (누군가의 '이제 그것을 맞이하십시오'라는 전화통화를 들으며) 집의 현관문을 열어두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 오프닝은 중반에 이르러 한 번 되풀이되며 그 대목은 화자가 처음 바뀌는 지점 직전이기도 하다. 하필 거기서 바뀌는 이유는? 그냥 연출자와 작가가 그렇게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오프닝의 '주인공 1'은 영화 전체로 보면 거기까지의 역할을 하고 '주인공 2'에게 차례를 넘겨준다. '주인공 2'의 바통은 또 '주인공 3'에게로 옮겨가고, 또 옮겨가고... 그렇다고 인물의 감정 묘사에 소홀한 편은 아니지만 그것 자체가 핵심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는 이야기.
최대한 영화 <온다>의 내용에 대한 상세 언급을 피한 채로 리뷰를 쓰다 보니 관람 전 관객이라면 감이 잘 잡히지 않을 수 있으리라는 점을 안다. 그러나 그건 막상 영화를 봐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그래서 '그것'은 누구 혹은 무엇이며, 왜 나타났는지와 같은 질문에 <온다>는 큰 중심을 두지 않는다. 영화의 원작인 사와무라 이치 소설 <보기왕이 온다>에 대해 미야베 미유키는 "솜씨가 얄미울 정도로 능숙하다"는 평을 하기도 했다.
그 능숙함의 하나는 예컨대 이후 전개를 관객이 쉽사리 예측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상술한 '계속 바뀌는 화자'를 통해서도 그렇고 수시로 시간 흐름을 건너뛰는 구성 방식 역시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2년 후', '1년 후' 정도였던 건너뜀의 단위는 이후 '1일 후', '2시간 후' 등으로 점차 좁혀진다. 클라이맥스라 할 수 있는 후반부 '불제 의식'에 이르면 거의 무대는 실시간으로 바뀐다. 즉 영화 안과 밖의 시간 흐름이 비슷해진다.
다른 하나는 장르적으로 단순 호러가 아니라는 점에 있다. 미스터리 추리물의 성격과 함께 일면 일상적인 가족 드라마 성격까지 지닌 <온다>의 장르는 변화무쌍하다. 그렇다면 전체 흐름만큼이나 매 순간의 지향점이 중요할 텐데, <온다>는 서사적 깊이보다는 영상 매체만이 할 수 있는 연출과 구성 자체로 몰입감을 이끌어낸다. 마스크를 쓰고 관람했지만 마스크 없이도 숨이 막혔을 지경이라고 하면 추상적인 표현일까. 예상치 못했던 사건이 펼쳐질 때마다 거의 식은땀이 날 뻔했고 이내 예측하기를 포기하고 오로지 이 '엔터테인먼트'에 눈과 귀를 내맡겼다.
아니, 어떻게든 연결고리와 단서를 헤아려보려 했지만 그러기를 그친 순간은 Cigarettes After Sex의 'K.'가 삽입곡으로 흘러나오는 대목이었다. 처음에는 '아니 여기서 이런 노래가...?' 싶었지만 듣다 보니 생각이 바뀌었다. 이런 선곡 자체가 내러티브가 아니라 분위기로 영화를 이끌고자 하는 <온다>의 목표의식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하나의 장치가 아닐까 하고.
영화 이전에 광고로 먼저 영상 매체 경험을 쌓은 감독이 만든 작품을 볼 때 느끼기 쉬운 감상은 크게 두 가지겠다. 감각적이거나 과하거나. 적어도 내 기준에서 <온다>는 '과하게 영상미에만 신경 쓴' 종류의 영화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만약 내면 묘사가 특히 중요한 드라마를 연출하면서 인물의 감정과 표정 묘사보다 시각적 장치에 치중했다면야 그렇게 볼 수 있었겠지만 호러에 그치지 않고 장르를 초월한 엔터테인먼트로서의 콘텐츠라면 문자 매체가 아닌 영상 매체가 발휘할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하다. <온다>는 시각적 자극을 활용하길 게을리하지 않지만 남용하지도 않는다. '그것'의 실체를 결코 보여주지 않으면서 오히려 청각 장치와 인물들의 '리액션'에 중점을 두면서 오히려 영상미에 치중하기를 자제한 인상이다.
'준비됐습니까? 맞이합시다!'
여기까지 쓰고는 영화의 시놉시스를 다시 읽었다. 물론 영화에도 나오는 말이기는 하지만 '준비됐습니까? 맞이합시다!'라는 문장이 새삼 눈에 들어왔다. 최근 한두 해 사이 개봉한 대부분의 오컬트 영화들은 그것을 '쫓는' 일에 집중한다. 하지만 <온다>는 '그것'을 정말로 '맞이'하는 영화라 해볼까. 그것의 실체를 추리해나가면서 퇴치법을 찾는 척하면서 <온다>는 클라이맥스에 이르기까지 관객을 영화 안의 세계로 적극 끌어들인다.
그러니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흔히 서사를 분석할 때 '이 이야기의 종착지는 결국 어디인가' 같은 질문을 만들기 쉽지만 <온다>에 대해서라면 조금 다른 표현이 필요하다. 이야기는 그 자리에 계속 있고, 관객이 거기로 간다. 상영관 좌석에 앉은 이상 관객은 빠져나올 겨를 없이 거기 가야만 한다. 무엇이 올지 모르는 세계로. 그게 집중력을 흩트리는 요즘 시대의 콘텐츠 홍수 속에서 진짜 엔터테인먼트의 역할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온다>(来る, It Comes, 2018),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
2020년 3월 26일 (국내) 개봉, 134분, 15세 이상 관람가.
출연: 오카다 준이치, 쿠로키 하루, 고마츠 나나, 마츠 다카코, 츠마부키 사토시, 아오키 무네타카, 시바타 리에 등.
수입: (주)미디어캐슬
배급: (주)트리플픽쳐스
*영화 <온다> 예고편: (링크)
*시사회 관람 (2020.03.17, CGV용산아이파크몰)
*원데이 클래스 '출간작가의 브런치 활용법' 모집: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