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블라를 연주하며 알게 된 것들 22
모든 악기는 주인과의 인격적 교류를 통해 울림을 얻는 존재다. 타블라도 마찬가지다. 장인의 손에서 막 만들어진 타블라는 갓난아기와 같다. 이 아기는 염소 가죽의 냄새를 진하게 풍기며 거칠고 메마른 소리를 낸다. 아직 사람과의 교감이 시작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어린 타블라는 연주자의 지속적인 타격과 망치질, 계절과 날씨의 순환 속에서 건조되고 적셔지며 조금씩 자신의 울림을 만들어낸다. 타블라는 단순히 음악을 연주하는 도구가 아니라 관계를 통해 성장하는 존재이자 하나의 인격체다.
타블라의 중심에는 ‘시하이(Syahi)’라 불리는 검은 점이 있다. 마치 눈동자처럼 생겨서 악기가 나를 보는 듯한 신비한 느낌을 준다. 철가루와 밀가루, 녹말 등을 반죽해 가죽에 정성스레 덧붙힌 이 둥근 점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다. 이것은 타블라의 심장이다. 연주자의 손가락이 시하이를 스치고 두드릴 때, 단순한 진동이 아니라 배음의 세계가 열린다. 타블라는 염소 가죽으로 만든 북이지만 일반적인 북 소리만 내지 않고 심벌즈처럼 맑고 투명한 금속성의 음색도 낸다. 이 독특한 음향적 이중성이 바로 시하이 덕분이다. 철가루가 배합된 시하이는 금속처럼 공진하며, 타블라가 북과 금속 타악기 사이 어딘가에 존재하는 듯한 독특한 소리를 만들어낸다.
흥미로운 것은 이 시하이를 만드는 재료 속에 인간의 음식이 들어간다는 점이다. 밀가루와 녹말을 비롯해 쌀가루, 전분풀 등이 섞여 쓰인다. 장인들은 이것을 구워 먹기도 한다. 타블라가 인간의 숨결과 삶의 일부로부터 만들어졌다는 의미다. 악기와 인간의 경계는 흐릿해진다. 소리는 단순한 물리적 진동이 아니라 인간의 몸과 영혼이 섞인 살아 있는 울림처럼 들린다.
타블라의 각 부위는 손끝에 전혀 다른 물성을 전한다. 끼날(가장자리의 테두리)의 표면은 잘 닦인 농구 코트를 만지는 듯하다. 반면 중앙의 시하이는 쌀가루와 철가루, 천연 접착제를 여러 겹 발라 굳혀 만들어져 약간의 끈적임과 묵직한 저항을 느끼게 한다. 마치 고무 요가 매트를 누르는 듯한 감각이다. 이 물성의 대비가 타블라의 고유한 음색과, 긴 울림과 짧은 울림의 차이를 만들어낸다.
타블라의 크기를 십만배, 아니 백만배 정도 키운다면 타지마할이나 피라미드와 같은 조형미, 웅장미, 압도미가 돋보이는 완벽한 건축물이 될 것이다. 내가 타블라에 매료되었던 이유도 건축가셨던 아버지의 피 때문인 것 같다. 내 무의식이 타블라의 건축적 미학에 반응한 것이다. 하단이 넓고 상단이 점점 좁아지는 구조, 균일한 장력을 위해 정교하게 엮여 있는 염소 가죽끈, 그리고 그것을 지탱하고 있는 여덟 개의 가따(Ghatta, 스트랩을 당기고 있는 작은 원기둥 모양의 나무 조각들)를 보며 나는 균형과 비례의 감각을 느꼈다. 조율할 때는 이 가따의 위치를 조정한다. 가죽끈의 장력이 매우 세서 가따를 손으로 움직이려면 힘이 많이 든다. 그래서 망치로 쳐서 조정한다. 음정을 올릴 때는 가따의 윗부분을 쳐서 아래로 내리고, 반대로 음정을 낮출 때는 가따의 아랫부분을 쳐서 위로 올린다. 가따의 위치가 변하면 그것을 감싸고 있는 염소 가죽끈 전체의 장력이 함께 바뀐다. 가따가 아래로 내려가면 스트랩이 더 강하게 당겨지며 가죽 표면이 팽팽해지고, 그 결과 음정이 올라간다. 반대로 가따를 위로 올리면 장력이 느슨해지며 음정이 낮아진다. 망치를 들고 가따를 두드리는 그 순간, 나는 마치 건축 현장에서 재료의 긴장과 반응을 조율하는 장인처럼 느껴진다. 타블라의 형태와 연주자의 몸, 그리고 망치의 리듬까지 하나의 조형적 행위로 이어진다. 그 안에는 소리를 짓는 사람으로서의 건축적 감각이 숨 쉬고 있다.
아래쪽의 두꺼운 몸체가 땅을 단단히 붙잡고 위로 올라갈수록 응축되는 형태는 소리를 하늘로 밀어 올리는 힘을 품고 있다. 그 형태에는 기능적 합리성과 동시에 영적인 조형감이 깃들어 있다. 마치 고대 사원의 돔 구조처럼, 공간의 깊이와 재료들의 물성, 그리고 서로를 당기는 보이지 않는 힘까지 모든 비율이 소리를 위한 최적의 구조로 설계되어 있다. 그 조형적 정밀함을 보며 나는 경외감을 느꼈다. 그것은 단순한 악기의 형태가 아니라, 소리를 위한 건축적 설계, 즉 보이지 않는 구조의 지혜였다.
그 건물의 꼭대기인 가죽 표면은 하나의 지형이다. 중심부는 광장처럼 밀도가 높고 바깥으로 갈수록 공기가 흐르고 소리가 퍼진다. 내 손가락은 끼날과 시하이를 오가며 밀도와 여백, 중심과 주변을 느낀다. 그 안에서 나는 도시의 거주자처럼 눕고, 걷고, 달린다. 소리를 낼 때마다 내 손의 움직임은 공간의 밀도를 경험하고 구조의 질서를 체험한다. 타블라는 눈으로 보는 건축물이 아니라 손으로 사유하는 건축물이다.
리처드 세넷은 『장인』에서 “손은 생각한다”고 말했다. 타블라를 연주하는 손은 단순히 지시된 명령을 수행하는 도구가 아니다. 손은 재료의 저항을 느끼며 그와 대화한다. 타블라를 다루는 손 역시 재료와의 대화를 통해 지혜를 얻는다. 가죽의 질감, 시하이의 밀도, 끼나르의 탄성 등 각각의 요소는 저마다의 언어를 가지고 나에게 말을 건다. 손은 그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재료의 의지를 존중하며 그 안에서 최적의 울림을 발견한다. 결국 연주란 인간이 악기를 길들이는 동시에 악기가 인간의 감각을 길들이는 두 방향의 수련이다.
인도의 음악가들은 이러한 세계관이 낯설지 않다. 인간의 손과 악기가 서로를 인식하며 관계를 맺는다는 생각은 단순한 은유가 아니라, 예술과 신앙, 수행 전반에 스며든 인식의 방식이다. 고대 인도에서는 악기를 예술의 여신, 사라스와띠(Saraswati)의 현현이라 여겼다. 악기는 신이 자신을 표현하는 통로였고 연주자는 그 통로를 빌려 신이 말하게 하는 존재였다. 그래서 음악가들에게 연습과 연주는 종교의례와 같다. 연주를 마치면 이들은 늘 악기 위에 조심스럽게 덮개를 씌운다. 그리고 연주를 시작할 때, 마치 성전의 문을 열 듯 그 덮개를 걷어낸다. 그 순간은 단순히 소리를 내기 전의 준비가 아니라, 신과 마주하는 시간이다. (이러한 사상 때문에 아이들이 악기 위를 넘거나 악기를 발로 미는 행위는 불경한 것으로 간주되어 구루에게 큰 꾸지람을 듣는다.) 이들은 내가 악기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악기가 나를 선택했다고 믿는다. 타블라의 거장 자키르 후세인은 “내가 타블라를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타블라가 나를 연주한다.”고 말했다.
이것은 단순한 신화적 서사가 아니라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실제적인 믿음이다. 악기가 짐승과 나무의 죽음으로 이루어진 몸뚱이일지라도, 신의 임재와 선택받은 연주자의 손이 만나면 새로운 목소리를 지닌 존재로 부활하는 것이다. 타블라를 수련한다는 것은 단순히 기술을 배우는 일이 아니라 하나의 인격적 생명체와 긴 호흡으로 신뢰를 쌓아가는 여정과 같다. 세넷이 기술을 “지식이 아니라 관계의 형태”라고 정의하였듯이, 기술이란 재료를 지배하는 능력이 아니라 재료와 협력하는 태도다. 타블라의 소리가 살아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 울림은 단순히 소리가 아니라 손과 재료가 맺은 신뢰의 구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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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여행자들이 인도를 다녀오면 기념품으로 타블라를 산다. 그런데 그 악기들은 대체로 울림이 좋지 않다. 그 이유가 단지 품질 때문만은 아니다. 주인과의 인격적 교류가 없기 때문이다. 몇 번 두드리다 흥미를 잃고 창고에 방치한다. 생명과의 접촉이 끊어진 악기는 죽은 사람의 몸이 서서히 굳어가듯, 그 생기를 잃는다.
나는 그런 타블라들을 헐값에 사서 다시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을 많이 한다. 그 과정은 강한 인내를 요구한다. 아무리 조율하고 연주해도 처음 몇 달간은 울림이 없다. 깊은 상처를 입은 아이가 말문을 닫은 것 같다. 그러나 손끝으로 생명의 기운을 계속 전하면 이 친구도 서서히 마음을 연다. 움직이지 않던 가죽 위에 어느 날 갑자기 배음이 감돌고 울림이 살아난다.
타블라는 일반적인 서양악기들과는 다르게 튜닝을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지금 음정을 B에서 D로 올리고 싶다면, 며칠, 혹은 몇 주에 걸쳐 천천히 가죽을 당겨야 한다. 마치 도수치료사가 굳은 몸을 서서히 풀어내듯이 해야 한다. 타블라는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살아 있는 몸이며 감각과 반응을 지닌 존재인 것이다.
사실 이 깨달음은 수많은 실패 끝에 얻은 것이다. 어느 가을 밤, 야외 분수대 앞에서 공연이 있었다. 무대는 분수에서 꽤 떨어져 있었지만, 미세하게 흩날린 물방울이 가죽을 축이기엔 충분했다. 그날은 C# 조로 연주하기로 시타르 연주자와 약속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공연이 시작될 무렵, 습도가 급격히 올라가면서 타블라의 음정이 눈에 띄게 내려가기 시작했다. 10월 중순의 밤공기는 빠르게 식어갔고, 온도까지 떨어지자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가죽을 아무리 조여도 소리는 금세 다시 풀려버렸고 그때부터 불안과 짜증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정확한 음정, 정해진 조율, 완벽한 소리. 나는 그날도 여전히 내 직업적 의지를 관철하고 있었다. 타블라가 여기까지라고 말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음정을 끝까지 끌어올리려 했다. 결국 공연은 그렇게 우왕좌왕 끝났고 내 안의 음악은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나는 음악을 통제하려 하려고 했다. 연습과 무대는 동일해야 한다는 직업적 강박관념과 완벽주의가 오히려 음악을 망쳤다. 그때 조금 더 타블라에 대한 앎이 있었더라면 악기의 상태와 요구를 받아들이고 시타르와 함께 음을 낮춰 유연한 흐름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날은 타블라가 그 음으로 말하고 싶어 하지 않았고 나는 듣지 않았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나는 악기를 내 뜻대로 다룬다는 생각이 얼마나 오만한 태도였는지를 배웠다. 내가 아무리 애를 써서 조율하더라도 내가 원하는 음정에 도달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지금 이 악기가 내는 소리, 이 음정이 바로 지금 이 친구가 머물고 싶은 자리이다. 나는 궁극적으로 내가 음악을 쥐고 흔들 수 있다는 마음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걸 알게 됐다. 나는 소리를 통제하는 주체가 아니라 이 생명과 함께 머무는 청자로 남아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타블라는 그렇게 나를 낮췄다.
물론 서양음악에서는 허용되지 않는 관점이다. 고전음악부터 현대 대중음악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음정을 정확히 고정하고 변수를 제거해 어떤 경우에도 의도한 소리가 발생되도록 한다. 악기는 그 의지를 실현하는 도구이며 연주자는 기술을 통해 예측 가능성과 정밀도를 추구한다. 그러나 인도음악은 다르다. 그날의 기온과 습도, 손의 감각과 악기의 기분에 따라 소리는 유동한다. 오늘의 음은 어제의 음과 다르고, 내일의 음은 또 다를 것이다. 이 유동성 안에서 연주자는 자신의 뜻을 꺾고 악기의 상태를 받아들이는 법을 배운다. 통제가 아니라 관계, 관철이 아니라 공존, 그것이 타블라의 울림이 머무는 자리다.
이러한 태도는 음악 안에서만 요구되는 미덕이 아니다. 그것은 인도 사회 전체의 리듬과 닮아 있다. 인도의 시스템은 외부인의 눈으로 보면 느릿느릿하고 비효율적으로 보인다. 관공서의 처리 속도, 거리의 교통 체계, 약속 시간의 개념마저 모든 것이 지연되어 있는 듯하다. 인도에서 학위를 마친 내 지인들이 하나 같이 토로하는 고충이 서류 발급이다. 졸업 증명서 하나를 발급받는데 두세달이 걸리고 그마저도 담당자를 닥달해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더 놀라운 점은, 이러한 상황에 문제의식을 느끼는 사람이 오히려 외국인인 자신뿐이었다는 사실이다. 클릭 한번에 서류 발급이 즉시 완료되는 신속 문화에 익숙한 우리로서는 쉽게 납득하기 힘들다.
그런데 인도인들의 느림 안에는 우리가 쉽게 보지 못하는 다른 시간 감각이 숨어 있다. 예측 불가능성과 혼돈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 그것이 인도 사람들의 내면 깊숙이 자리한 질서다. 인도음악은 바로 그 삶의 리듬에 조응하며 발전해왔다.
정해진 시간 안에 정해진 결과를 만들어내야 하는 우리의 산업 사회의 구조 속에서 유동성과 즉흥성은 오류로 간주된다. 악기의 감정, 연주자의 내면, 오늘의 기운 같은 것들은 고려되지 않는다. 오직 표준화된 소리, 예측 가능한 퍼포먼스만이 프로페셔널로 여겨진다. 악기의 기분 따위는 사치로 여겨지고 연주자는 철저히 성과의 논리에 복무한다.
한국에서 타블라를 연주한다는 건 단순히 이국적인 악기를 다룬다는 뜻이 아니다. 타블라 연주는 단순한 음악 행위가 아니라 사회적 선언이다. 그것은 하나의 세계관에 몸을 담그는 일이고 서구적 음악 산업이 전제하는 효율성과 통제의 구조에 대해 조용히 질문을 던지는 행위다. 무대와 사회, 음악과 사람을 연결하는 혁명적 태도다.
오늘날의 음악 시스템은 악기를 도구로, 연주자를 기능인으로, 음악을 상품으로 본다. 그러나 타블라는 그 모든 구조에 이의를 제기한다. 나는 이 악기 앞에 설 때마다 단지 연주자가 아니라, 새로운 질서를 제안하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
나에게 타블라는 더 이상 북이 아니다. 타블라는 스승이다. 타블라는 관계의 방식이며, 세계를 대하는 태도이고, 음악으로 수행되는 작고 조용한 혁명이다.
글/정명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