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블라를 연주하며 알게 된 것들 23
최근 들어 우리나라에 유행하고 있는 명상은 자기 체험적 감상이나 힐링만을 내세우며 가장 중요한 ‘실전성’을 놓치고 있는 경향을 보인다. 명상의 진정한 가치는 삶의 구조를 바꾸는 데 있는데 많은 경우 변화의 힘이 아닌 스트레스 해소와 자기 위안의 의식으로 소비되고 있다. 그것은 명상의 목적을 특정한 감각을 가두고 소유하는 데 두었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다. 명상이 감각과 체험을 붙잡는 시도를 계속하는 한, 그것은 자기 만족에 머무를 뿐 변화의 힘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진정한 명상은 내 앞에 존재하는 다양한 감각과 감정의 흐름을 통과하면서 몸의 질서를 새로 쓴다. 그리고 그 몸이 다시 현실의 구조와 관계의 방식을 바꾼다. 내 본업을 보는 관점, 일을 하는 방식, 친구와 가족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는 것이다. 명상이 내 삶을 변화시키지 않는다면, 그것은 감상의 기록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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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의 실전성에 대한 좋은 은유는 영화 〈타짜〉에서 볼 수 있다. 화투의 대가인 평경장이 고니에게 자신의 일을 자부심에 가득찬 목소리로 이렇게 말한다. “내가 누구냐? 화투를 거의 아트의 경지로 끌어올려서, 내가 화투고 화투가 나인 몰아일체의 경지.” 나는 그 장면을 보면서 무릎을 탁 쳤다. 그 동안 이보다 더 명쾌한 명상에 대한 정의를 보지 못했던 것이다. 평경장의 대사에 나타난 주체와 대상의 경계가 사라진 몰아일체의 상태는 명상이 작동하는 방식과 정확히 맞아 떨어진다. 또한 예술의 극의 경지는 몰아일체의 경지라는 통찰도 준다. 명상의 실전적 힘은 어떤 일을 관조하는 것이 아닌 거꾸로 미친 듯이 빠져드는 것에서 온다. 몰입이 곧 명상이다. 평경장에게 화투에 몰입하는 그 순간에는 화투를 치는 주체인 자신과 대상인 화투의 경계는 없다. 경계가 없기 때문에 소유와 조작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 자리에는 흐름이 있다. 화투든, 타블라든 모든 대가들의 의식세계는 똑같다.
명상에 대한 글을 쓰다 보니 문득 작년 강릉에서의 한 공연이 떠오른다. 인도음악과 다도를 한 무대에 올리는 시청각 퍼포먼스였다. 강릉아트센터에 일본에서 30년간 다도를 수련한 윤삼웅 선생님과 시타르 연주자, 그리고 내가 초청되었다. 그날의 연주는 이상할 만큼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윤삼웅 선생님의 몸짓과 행위만은 지금도 선명하다. 그는 무대에 오르기 전, 차 도구 하나하나를 정갈히 닦고, 물을 붓고, 찻잎을 올리는 모든 동작을 마치 의식처럼 수행했다. 그 과정에는 일말의 꾸밈도, 서두름도 없었다. 다관을 들어 올리는 손끝의 각도, 물줄기의 높이, 찻잎이 우러나는 시간까지 모두 하나의 호흡 안에 있었다. 그렇게 우러난 차의 맛은 놀라울 정도로 깊고 맑았다. 그러나 그 맛이 특별했던 이유는 재료나 기법 때문이 아니라, 몰아일체의 경지에서 나온 행위의 결과물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분이 차를 끓이는 것이 아니라 차가 그분을 통해 스스로 끓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명상이라는 개념이 물질적인 형태로 구현된다면 바로 그 장면이었을 것이다. 다도를 통해 드러난 하나의 명상이, 내게 연주의 본질에 대한 깨달음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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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루버트 스파이라는 명상을 특별한 기술로 설명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우리가 명상이라고 부르는 대부분의 노력들이 이미 있는 것을 애써 만들려는 과잉된 행위라고 말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명상은 무언가를 더 잘 관찰하는 상태가 아니라 관찰하려는 내가 슬그머니 빠져버린 상태에 가깝다. 그에게서 명상은 관찰자가 대상을 바라보는 행위가 아니라 관찰자와 대상이 분리되어 있다는 전제 자체가 해체되는 사건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어떤 행위를 하고 있을 때 그 행위를 ‘하고 있는 나’를 따로 의식하는 순간, 이미 분리는 시작된다. 반대로 행위와 알아차림이 분리되지 않을 때, 즉 ‘행위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만이 남을 때’, 그 상태가 바로 명상이다.
이 관점에서 다시 평경장의 대사를 떠올리면 그 장면은 다른 깊이로 다가온다. “내가 화투고 화투가 나.” 이 말은 어떤 초월적 경지를 자랑하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너무 오래 화투와 함께 살아온 사람만이 무심히 내뱉을 수 있는 말이다. 화투를 잘 치려고 애쓰는 사람에게는 여전히 ‘나’와 ‘화투’가 나뉘어 있다. 하지만 평경장에게 화투는 더 이상 대상이 아니다. 신경 써서 다뤄야 할 물건도, 정복해야 할 기술도 아니다. 그냥 흐름이다. 루버트 스파이라 식으로 말하면, 그 순간 화투는 의식 밖에 있는 무언가가 아니라 의식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하나의 방식일 뿐이다.
강릉에서 만난 윤삼웅 선생님의 모습도 그와 다르지 않다. 다도의 동작이 아름다웠던 이유는 완벽한 테크닉 때문이 아니라 그 동작을 통제하려는 주체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분의 동작에는 잘 보이려는 마음이 없었다. 설명하려는 의지도 없었고, 보여주려는 욕심도 없었다. 그저 해야 할 일이 차분하게 이어지고 있을 뿐이었다. 다관을 드는 손과 물줄기, 찻잎이 우러나는 시간 사이에 끼어들어 있는 ‘나’라는 목소리가 없었다. 루버트 스파이라는 이런 상태를 두고, 의식이 자신을 방해하지 않을 때 드러나는 자연스러운 질서라고 말한다. 그래서 내가 느꼈던 그 감각, 차를 끓이는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차가 스스로 완성되고 있다는 느낌은 신비적 착각이 아니었다. 오히려 아주 정확한 인식이었다.
명상은 흔히 거리를 두는 일로 오해된다. 한 발 물러나 바라보고, 감정을 떼어내고, 생각을 관찰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명상은 그 반대 방향으로 작동한다. 거리를 두는 기술이 아니라, 거리 자체가 사라지는 사건이다. 너무 깊이 들어가서 더 이상 빠져들 주체가 남아 있지 않은 상태. 그래서 명상의 실전적 힘은 고요함에서보다 완전한 몰입에서 나온다. 관조는 준비 단계일 뿐이다.
화투를 치는 평경장도, 차를 끓이던 다도 선생님도, 타블라를 치는 나도 명상의 흐름 안에 들어갈 때가 있다. 그때 순간적으로 나는 연주를 ‘한다’고 느끼지 않는다. 연주가 일어난다고 느낀다. 명상은 따로 앉아서 하는 일이 아니다. 가장 잘될 때의 연주, 가장 깊이 스며든 노동, 가장 조용한 손놀림 속에서 이미 작동하고 있다. 예술과 삶과 명상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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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명상에 대한 깨달음 이후로 대가들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다. 예전에는 그들의 움직임이 기술로 보였다면, 이제는 행위와 하나가 되는 ‘순간’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리오넬 메시는 드리블을 하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다. 공과 몸이 분리되지 않은 채, 생각과 판단을 하기 이전에 이미 공이 메시를 통해 스스로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는 타블라 거장들의 손이 경탄을 금치 못할 정도로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것을 보며, 그들의 시간이 나보다 느리게 흐르는 것을 아닐까라는 상상을 한 적이 있다. 마치 인간의 세 배 이상 빠른 동체시력과 반응속도를 가진 고양이가 인간보다 느리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처럼 말이다. 이제는 안다. 실제로 그들은 다른 시간을 사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뇌과학적으로 극도의 몰입 상태, 즉 명상에 이르면 뇌는 생각을 담당하는 전전두엽의 활동을 줄이고 감각과 운동을 직접 연결하는 회로를 우선적으로 활성화한다. 이 순간 뇌는 판단과 분석, 움직임 사이에 어떠한 간극도 두지 않는다. 뇌는 한 단위의 시간에 더 많은 정보를 처리하게 되고, 그 결과 주관적인 시간은 실제보다 더 느리게 확장된다. 당사자가 느끼는 시간은 느려졌지만, 뇌는 오히려 더 빠르게 작동하고 있는 셈이다. 타블라의 거장들은 그 확장된 시간 속에서 연주한다. 그래서 관객의 눈으로는 ‘번개처럼 빠른 손놀림’으로 보이지만, 그들에게는 훨씬 여유 있는 움직임이 되는 것이다.
음악과 스포츠의 거장들 뿐 아니라 많은 기업가들이 명상을 강조하는 이유 역시 마음을 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확장된 시간을 갖기 위해서다. 위기 상황이나 복잡한 선택지 앞에서 남들보다 더 느리게 흐르는 시간을 경험한다면, 그 안에서 더 많은 정보를 처리하고 더 넓은 시야로 판단할 수 있다. 명상은 느린 호흡의 기술이 아니라 시간의 밀도를 바꾸는 실전의 기술이다. 시간이 확장되면 감각은 깨어나고, 감각이 깨어나면 행동이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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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입에 이르면 기술은 사라지고, 남는 것은 흐름뿐이다. 행위와 자아의 소멸은 우리 일상의 모든 순간에 동일하게 나타날 수 있다. 설거지나 청소, 빨래를 개는 일조차도 명상이 되는 것이다. 어떤 일이든, 진정으로 충실할 때 행위와 자아의 경계가 흐려진다. 손의 움직임, 물소리, 천의 질감이 하나의 호흡으로 이어질 때 우리는 어느새 빨래가 나고 내가 빨래인 상태에 든다. 명상을 특별한 의식으로 보는 순간 이미 현실과 분리된다. 명상은 특별한 상태가 아니라, 현실을 다른 방식으로 통과하는 태도이자 실전의 기술이다.
글/정명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