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블라를 연주하며 알게 된 것들 3
새로운 악기를 배운다는 건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일과 같다. 언어를 바꿔 쓸 때는 단어만 달라지는 게 아니라 성격과 감정까지 달라진다. 영어를 쓰면 자기표현이 강해지고 스페인어를 쓰면 정서와 관계가 살아난다. 불어는 명사마다 여성형과 남성형을 구분하는 체계가 있어 사물 하나에도 성별적 색채와 분위기를 입힌다. 이 작은 차이는 문장을 우아하고 섬세하게 만드는 동시에, 세계를 바라보는 감각에 다채로운 뉘앙스를 더한다. 독일어는 반대로 문법 구조가 엄격하고 논리적 질서를 강조하기 때문에 사고와 표현을 단단히 조율한다. 악기도 마찬가지다.
같은 밴드 안에서도 악기에 따라 성향과 화법이 달라진다. 베이스를 치는 사람은 대체로 묵직하고 안정적이다. 음악의 바닥을 지탱해야 하기에 성격에도 차분함과 인내가 배어 있다. 기타를 치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자기표현이 강하다. 화려한 솔로와 전면에서의 퍼포먼스를 통해 자연스럽게 자기 주장을 드러낸다. 드럼을 치는 사람은 또 다르다. 순간순간 에너지를 폭발시키면서도 동시에 밴드 전체의 균형을 잡아야 하기에 다혈질적이면서도 동시에 조율자적 기질을 지닌다. 결국 어떤 악기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몸과 마음에 새겨지는 언어가 달라지고, 그 사람의 성향까지 변화한다.
나의 사례를 들어보자. 콩가라는 악기가 있다. 콩가는 쿠바와 라틴아메리카 음악에서 뿌리를 둔 타악기다. 허벅지 높이의 원통형 북을 세워놓고 맨손으로 치며 타격의 힘과 반응이 곧바로 소리로 변한다. 그래서 소리는 직설적이고 즉각적이다. 콩가의 리듬은 곧바로 몸을 춤추게 만든다. 타블라가 손가락의 미세한 운용을 통해 ‘말하듯‘ 리듬을 섬세히 세공한다면 콩가는 손바닥 전체의 에너지를 통해 ‘외치듯’ 소리를 터뜨린다.
나처럼 대중음악 씬에서 활동한 사람에게 콩가는 가장 익숙한 언어다. 그곳은 언제나 빠른 결과와 강렬한 에너지를 요구한다. 단 몇 분 안에 관객을 사로잡아야 하고, 리허설조차 늘 시간에 쫓긴다. 아이돌 음악과 대형 콘서트에서는 큰 음량, 직설적인 리듬, 무엇보다 즉각적인 임팩트가 필요하다. 이런 공간에서 콩가의 본능적이고 직접적인 성격은 완벽하게 맞아떨어진다. 그래서 내게 콩가는 단순한 악기가 아니라 내가 몸으로 살아온 음악 환경의 공기를 그대로 담은 언어였다.
내가 학교에서 콩가를 가르치는 것은 학생들에게 이 즉각적이고 직설적인 언어를 가르친다는 의미이다. 한 번은 집단 따돌림으로 말수가 적고 소심했던 학생이 있었다. 그 친구는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것을 어려워했다. 이러한 성향은 악기 학습에도 그대로 투영되었다. 악기를 배우기 시작한 첫 2-3주 동안에는 소리 내는것 자체를 두려워해 콩가를 타격조차 못했다. 나는 수업 내내 용기를 북돋우며 과감한 터치를 이끌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친구의 손끝에서 마침내 한 번의 강한 타격이 울렸다. 그 순간 막혀 있던 무언가가 깨지듯 그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시간이 흐르며 소리는 점점 힘을 얻었다. 목소리와 표정에도 자신감이 싹텄다. 그 친구는 콩가의 언어를 배우며 자기 안의 힘을 꺼내는 법을 익히고 있었다. 콩가는 숨기지 말고 드러내라는 언어였다.
타블라 수업에서는 정반대의 일이 일어난다. 타블라는 단순히 손으로 치는 것이 아니다. 먼저 구음을 읊고 그것을 악기로 어떻게 번역하는지 배운다. “다게띠뜨, 다게나다, 띠르끼뜨…” 같은 구음은 머리를 정돈시키는 언어다. 학생들은 낯선 음절을 반복하며 집중을 배운다. 수업은 나의 구음을 따라 외우고, 악기로 번역하고, 교정받는 과정으로 진행된다. 그 과정은 요가에서 들숨과 날숨을 관찰하는 호흡 훈련처럼 조급함을 가라앉힌다. 특히 ADHD 기질이 있는 아이들은 이 과정을 통해 처음으로 멈춤과 기다림을 배웠다. 조금만 서두르면 박자가 금세 흐트러지기에, 차분히 호흡을 고르며 리듬 위에 머물러야 했다. 특정한 음색을 얻기 위해 수십 번 실패하다가 마침내 맑은 울림을 냈을 때, 그 경험은 곧 인내라는 감정을 새로운 언어처럼 각인시켰다. 타블라는 아이들에게 말한다. 머물러라. 기다려라.
이러한 변화들은 악기가 집중력을 향상시키고 마음에 안정을 준다는 소위 음악 치료적 차원에서 나타난 현상이 아니다. 언어철학적 차원의 변화다. 콩가와 타블라의 차이는 스페인어와 힌디어의 차이와 닮아 있다. 스페인어는 문법이 비교적 단순하고 어순이 직선적이다. 감정과 리듬이 곧장 밖으로 터져 나온다. 말만 들어도 억양 속에 춤과 노래가 배어 있는 언어다. 콩가가 바로 그렇다. 손바닥이 닿는 즉시 소리가 분출된다. 그 소리는 직설적이며 에너지가 넘쳐 몸을 움직이게 한다. 반면 힌디어는 산스크리트어의 뿌리를 지닌 언어답게 훨씬 정교한 문법 체계를 갖는다. 어순은 자유로워 보이지만, 실제로는 조사(postposition), 성(gender), 수(number), 시제와 상(aspect) 변화가 겹겹이 맞물려야 의미가 완성된다. 단어 하나가 변할 때마다 문장 전체의 균형이 달라진다. 타블라도 마찬가지다. 단순히 두드리는게 아니라 구음과 손가락의 치밀한 배열을 통해 리듬이 생성된다. 작은 어긋남에도 전체 구조가 무너지고 반복과 세밀한 조율 속에서만 맑고 깊은 울림이 나온다.
악기를 배운다는 것은 단순한 기술 습득을 넘어선다. 그것은 새로운 언어 체계를 받아들이는 일이며 그 언어는 우리의 감각과 사고, 나아가 삶의 태도를 다시 쓴다. 비트겐슈타인의 “나의 언어의 한계가 곧 나의 세계의 한계”라는 이 유명한 문구가 악기를 통해서도 실현되는 것이다. 스페인어가 직설적 감정의 세계를, 힌디어가 층층의 전통과 구조적 정밀함을 보여주듯, 콩가와 타블라는 내 안에서 서로 다른 세계를 열어주었다.
두 언어는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 콩가의 폭발적 직설성과 타블라의 구조적 사색이 겹쳐질 때, 새로운 균형이 나타난다. 표현과 절제, 속도와 느림, 분출과 인내가 서로를 보완한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콩가 연주자도, 타블라 연주자도 아니다. 두 악기는 내 안에서 두 개의 소리가 아니라, 하나의 목소리로 합쳐진다. 그렇게 나는 두 언어를 가진 바이링구얼이 되고 그 속에서 새로운 나를 발견한다.
나는 급하고 직설적인 성격을 타고났다. 호불호가 분명해 늘 마음속에 비판과 화가 앞섰다. 그러나 두 악기를 오가며 연주하다 보니 조금씩 달라졌다. 어떤 순간에는 콩가의 언어로 즉각 반응하고, 또 다른 순간에는 타블라의 언어로 머물며 기다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연주 기법의 확장이 아니라, 정서와 사고의 문법 자체가 유연해진 경험이었다.
나는 사람들에게 악기를 다양하게 배우라고 권한다. 단순히 장기를 늘리기 위해서가 아니다. 악기를 바꿔 잡는 순간 또 하나의 언어가 몸에 새겨지고 그 과정에서 감정과 사고의 방식 자체가 달라진다. 여러 악기를 익힌다는 건 곧 여러 개의 삶의 문법을 익히는 것이며, 그때 우리는 상황마다 다른 문체와 어휘를 꺼낼 수 있는 자유를 갖게 된다. 오늘도 내 안에 또 하나의 언어를 심는다. 이 마법의 언어들이 나를 또 새롭게 빚어내기를.
글/정명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