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조각하기

타블라를 연주하며 알게 된 것들 4

by 손안의 우주

음악은 그저 시간 위를 흘러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음악은 악기를 연주하는 이들을 통해 시간에 결을 새기고 형상을 부여하며 다채로운 리듬을 만들어낸다. 물질화된 시간, 그것이 곧 음악이다.


현악기의 연주는 활의 지속적인 움직임이나 줄의 떨림을 통해 음과 음을 부드럽게 이어간다. 감정선을 따라 출렁이는 그 흐름은 시간을 하나의 유동체처럼 다루는 방식이다. 곡선미가 강조된 ‘액체적 시간’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반면, 드럼과 같은 타악기들은 명확한 경계와 구획을 형성하며 한순간을 또렷하게 잘라내고 그 안에 리듬을 새겨 넣는다. 각선미가 강조된 ‘고체적 시간’을 만든다.


그렇기에 음악의 흐름을 주도하는 두 가지 중심이 존재한다. 하나는 메트로놈이다. 기계적 규율로 시간을 쪼개는 메트로놈은 고체적 시간의 전형이다. 인간의 감정과는 무관하게 시간을 잘라 정확히 나누어낸다. 타악기 연주자들은 메트로놈과 닮아 있다. 다른 하나는 지휘다. 지휘자의 손끝은 곡선을 그리며 그 몸짓은 현악기의 활처럼 시간을 유연한 흐름으로 길어낸다. 그는 액체적 시간을 불러내는 존재다.


액체성과 고체성의 대비는 다양한 미술작품들에 잘 나타나 있다. 현악기의 흐름은 동양 수묵화에서 먹이 번져가며 이어지는 유려한 곡선, 혹은 모네의 수련 연작처럼 붓질이 겹겹이 이어지며 만들어내는 파동과 같다. 반대로 타악기의 타격은 칸딘스키의 추상화 속 기하학적 도형이나 몬드리안의 구획처럼 명확히 분할된 공간을 연상시킨다. 이렇듯 음악과 미술은 서로 다른 매체이지만 액체적 흐름과 고체적 분할이라는 공통된 감각을 공유한다.


수묵화(좌) 추상화(우)


인간을 악기를 연주할 때 시간의 물성을 체험할 수 있다. 나는 타블라를 연주하며 액체와 고체의 시간이 구분되지 않고 멋지게 어울어질 수도 있음을 깨달았다. 왼손이 연주하는 바얀은 음의 높낮이를 미세하게 조절하며 손바닥과 손가락의 미묘한 눌림과 풀림으로 음을 휘게 하고, 늘이고, 떨리게 만든다. 이는 물처럼 흐르며 시간을 유동적으로 밀어내는 액체적 손이다. 마치 수묵화에서 먹의 번짐이 종이 위를 흘러가며 예측 불가능한 파동을 만들어내듯 바얀의 울림은 유려하게 번져가며 리듬에 숨결을 불어넣는다. 때로는 붓질이 겹겹이 포개지며 물결을 이루는 풍경을 닮아 있기도 하다. 그 울림 속에서는 크고 작은 물방울들이 생겨나 흩어지는 듯한 감각이 일어난다.

반면 오른손의 다얀은 명확한 타격과 리듬의 윤곽을 만든다. 손가락 끝의 분명한 분할과 빠른 움직임은 시간을 또렷하게 나누고 조각내는 고체적 손이다. 이는 추상화 속에서 단호히 그어진 선과 원, 점들이 충돌하며 화면에 긴장을 만들어내고 직선과 직각으로 나누어진 공간이 색과 색 사이의 경계를 확립하듯, 다얀의 타격은 흐름을 잘라내고 순간의 구조를 또렷하게 각인한다.


두 손은 마치 한 화폭 위에서 수묵의 번짐과 기하학적 선들이 동시에 존재하는 양극처럼 서로 다른 질감과 질서를 한 자리에서 결합시킨다. 연주자의 몸에서 나오는 이 이중적 움직임, 흐름과 경계, 유연함과 구조는 시간 자체를 자유롭게 빚어내는 회화적 행위와도 같다. 타블라는 단지 박자를 나누는 도구가 아니라 유동성과 구조를 동시에 끌어안고 시간의 얼굴을 새롭게 빚어내는 악기인 것이다.


GPT 형님의 상상력.

타블라의 박자 체계는 오랜 세월 동안 전해 내려온 수학적 원리와 규칙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치밀한 구조는 단순히 시간을 분절하고 조각하는 틀일 뿐만 아니라 복잡한 흐름 속에서도 유연한 움직임을 가능하게 하는 기반이 된다. 정교한 질서 위에서 연주자는 속도와 강약, 뉘앙스를 자유롭게 흐르게 하며 즉흥적이면서도 일관된 변화를 만들어낸다. 마치 시간을 여러 각도로 잘라내기도 하고, 때로는 그 조각들을 부드럽게 이어붙여 유동적인 무늬를 만드는 조각가 같다. 이들의 수학적 지혜야말로 고체성과 액체성을 넘나드는 시간 조각의 기준이 된다.


인도인들의 유연한 시간관은 이러한 음악적 원리와 깊이 맞닿아 있다. 윤회라는 사상 속에서 시간은 직선적 규율이 아니라 순환과 변주의 장으로 이해되며 그 안에서 질서와 자유는 언제나 동시에 존재한다. 타블라의 주기적 박자 위에 유동적인 변주가 가능한 인도음악의 구조는 바로 이 순환적 시간관을 전제로 작동한다.


인도인들의 일상에서 이러한 시간관을 엿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인도에서 흔히 겪는 기차 연착은 한국인의 눈에는 커다란 불편이자 문제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인도인들은 그것을 초조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시간은 단순히 흘러 사라지는 직선이 아니라 언젠가 다시 맞닥뜨릴 순환이기에 기다림조차 하나의 과정으로 받아들인다. 이처럼 인도적 시간관은 지연과 우연마저도 자연스러운 흐름 속에 흡수해 버린다.


그들의 윤리관 역시 이러한 시간 이해와 맞닿아 있다. 직선적 시간 속에서는 목표 달성이 중요하다면, 순환적 시간 속에서는 지금 이 순간의 태도와 행위가 더 중요하다. 왜냐하면 지금의 선택과 행동은 반드시 다음 순환에서 다시 맞닥뜨리게 되기 때문이다. 순간은 흘러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전체 흐름 속에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인도인들의 윤리, 곧 다르마는 이렇게 순간을 신성하게 대하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일상을 살다 보면 시간은 단조롭고 규칙적으로만 흐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타블라를 수행하다 보면 그 견고한 시간관에 작은 균열이 생기고 있음을 느낀다. 연습은 순간과 순간 사이에 숨어 있던 결을 드러내며 삶의 리듬이 본래 얼마나 다채롭고 유동적인지를 일깨운다. 그것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시간이 펼쳐질 수 있다는 사실을 타블라는 가르쳐준다.


타블라를 연주한다는 것은 단지 음악을 하는 일이 아니라 유동적 시간관을 몸으로 표현하는 작업이다. 그것은 시간을 단순히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을 신성하게 빚어내는 윤리적 행위이기도 하다. 매 타격이 하나의 순간을 새기고 그 순간이 다시 흐름 속으로 녹아드는 과정에서 나는 삶의 근본적 질서를 배운다.


글/정명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