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불호 버리기

타블라를 연주하며 알게 된 것들 5

by 손안의 우주

타블라를 연주하다 보면 끝없이 다양한 감각들이 찾아온다. 어떤 날은 검지에 힘이 과하게 들어가고, 또 어떤 날은 약지가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녹음을 할 때는 발가락 끝이 괜히 신경 쓰이고, 무대 위에서는 갑자기 코끝이 가렵다. 악기와 직접적으로 연결된 감각도 있지만, 얼핏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감각들도 불쑥 고개를 든다.

문제는 감각이 쇼핑하듯 고르고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연주에 거슬리는 감각은 지워버리고 도움이 되는 감각만 붙잡을 수 있다면 누구나 대가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치우려 할수록 선명해지고 붙잡으려 할수록 멀어진다.

나 역시 이 문제로 오래 씨름했다. 완벽을 추구하는 내 성향은 감각의 돌발성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런데 인도 여행을 다녀온 뒤, 조금씩 답을 찾을 수 있었다.

타지마할을 보기 위해 델리에서 아그라행 기차표를 끊었던 날이었다. 이른 아침 승강장은 이미 북적였다. 잠든 걸인들, 짜이를 파는 상인, 아이를 업은 여인, 떠들썩한 남자 무리들 등 시장터 같은 풍경이었다. 기차만 타면 이 혼잡에서 벗어나리라 생각했지만 막상 출발하자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무임승차객들까지 몰려들어 객차는 승강장과 다를 바 없었다. 인도 철도청이 무임승차객으로 인해 골머리를 썩는다는 기사를 본적이 있는데 그 현장을 몸으로 체험하는 순간이었다. 처음에는 불쾌감이 치밀었지만, 곧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이라면 그냥 즐겨보기로 마음을 바꿨다. 그러자 사람들의 눈빛과 표정이 보이기 시작했다. 좁은 객실 안 서로의 몸이 닿고 밀려도, 모두가 놀라울 만큼 평온했다. 인도의 기차는 좌석이 정해져 있어도 값비싼 상위 등급을 제외하면 한 자리에 여러 명이 자연스럽게 앉는다. 내 기준에서는 좌석 주인이 불쾌해야 마땅했지만 그들은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른 아침 뉴델리 역

여행 내내 이런 일은 반복됐다. 릭샤 기사에게 사기를 당했고 원숭이는 느닷없이 달려들었고 기차는 열 시간이나 지연되었다. 바가지요금, 시간 약속이 무의미한 태도, 뒤바뀌는 말들 등 내 기준에서는 불쾌하고 불합리한 일들이 끝없이 벌어졌다.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거기에 화내고 불평하는 사람은 늘 나뿐이었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내 앞에 등장하는 모든 사건들에 옳고 그름은 없다는 것을. 그것들은 그냥 일어날 뿐이라는 것을. 나를 골탕먹이기 위해서도 아니고 나에게 시련을 주기 위해서도 아니다. 하지만 나는 모든 상황들에 가치를 부여하고 판단했다. 가치 판단에 매몰된 내 머릿속은 자연스럽게 ‘불편하다’, ‘복잡하다’, ‘시끄럽다’, ‘거슬린다’ 와 같은 호불호를 기반으로 작동하는 언어들로 가득찼다. 그리고 그 언어들은 악기를 다룰 때의 내 감각 세계에도 강하게 결부되어 있었다.

초현실적인 풍광

어떤 감각에 거슬린다라는 판단을 내리고 그것을 제거하려고 하면 그 감각은 더 강하게 나를 덮쳤다. 마치 어떤 상황에 싫다라고 판단을 내리는 순간 그러한 상황만 내 앞에 펼쳐지는 것처럼. 그러나 그대로 허용하면 마음이 이완되면서 ‘잘됨’과 ‘안됨’이 동시에 열려 있는 가능성의 장이 펼쳐졌다. 그때부터 나는 감각을 해석하는 언어를 바꾸기 시작했다. ‘감사’, ‘허용’, ‘재미’, ‘의미’ 같은 가능성의 언어들을 의도적으로 주입했다.

나는 이 실험을 삶으로 확장했다. 예전에는 마음에 안 드는 사람, 적은 개런티, 불합리한 상황 등의 이유로 거절했던 인간 관계, 연주 제의, 강의 제의들을 가능성의 언어들로 해석하고 기꺼이 허용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것들이 오히려 네트워크의 노드가 되어 새로운 관계와 기회로 이어졌다.

호불호를 앞세운다는 것은 나는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는 선언과 다르지 않다. 내 몸과 삶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들에 옳고 그름은 없다. 그것들은 그냥 벌어질 뿐이다. 다만 옳고 그르다는 나의 해석만이 있을 뿐이다. 그 해석을 내려놓고 수용자의 위치로 나를 위치시키는 순간, 세상은 다시 스승이 되고 삶의 모든 사건과 연주의 모든 감각이 가르침으로 다가온다. 무대 위에서 느껴지는 사소한 불편함조차, 연습실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낯선 감각조차, 그 자체로 나를 단련시키는 수업이 된다. 호불호를 버린다는 것은 불쾌함을 참고 억누르는 일이 아니라 그 불쾌함마저 가능성의 언어로 바꾸어 받아들이는 일이다. 그렇게 모든 경험을 배움의 자리로 허용할 때, 연주는 기술을 넘어 명상이 되고, 삶은 언제나 새로운 스승 앞에 선 제자의 자리로 확장된다.

글/정명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