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타블라 연주자다

타블라를 연주하며 알게 된 것들 6

by 손안의 우주

나는 모태신앙인이다. 교회에서 음악을 시작했고 지금도 빠지지 않고 예배에 참석한다. 흔히들 신앙은 성장하면서 의심의 대상이 되곤 하지만 나는 달랐다. 절대자의 존재와 개입, 계획과 사랑에 대한 믿음은 흔들려 본 적이 없다. 나는 어릴 적부터 보이지는 않지만 어떤 질서가 있다는 막연한 생각을 품고 있었다. 교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감각으로 느꼈다. 바흐의 푸가 같은 위대한 창작물까지 생각하지 않더라도 피아노 건반의 배열, 학교에서 배웠던 삼각 함수, 딸의 미소, 협업하는 무용수의 손짓 같은 것들을 보며 우연이라는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 무언가를 감지했다.

세상은 흩어진다. 과학은 그것을 엔트로피의 법칙이라 부른다. 모든 것은 무질서로 향한다. 그러나 인간은 그 흐름을 거스른다. 인간의 존재 자체가 엔트로피를 역행하는 사건이며 인간이 창조한 모든 것들이 그렇다. 우리는 언어를 만들고 문명을 세우며 곡을 쓴다. 나는 그중에서도 악기에 특별한 경외심을 느낀다. 악기는 단순한 소리의 도구가 아니다. 그 구조 자체가 하나의 계시다. 그 형식 안에 의미가 새겨져 있다.

타블라는 정수비와 배음, 수학적 체계에 기반한 리듬으로 이루어진 악기다. 그리고 그 조형적 특성 또한 단순한 형태를 넘어선 질서를 품고 있다. 두 개의 북, 다얀과 바얀은 서로 다른 재질과 음역을 갖지만, 하나의 균형을 이룬다. 중심에 새겨진, 마치 눈동자를 연상케 하는 시하이(syahi)는 울림을 조율하는 기능적 핵심이자 타격의 시각적 중심이 된다. 원형의 대칭성과 반복되는 겹 구조, 손의 움직임을 정확히 받아내는 표면의 탄성까지, 타블라는 ‘연주되는 대상’이 아니라, ‘연주하게 만드는 구조’다.

리듬 역시 마찬가지다. 타블라의 전통적 컴포지션들은 정확한 수학적 비례와 시간 분할에 따라 구성된다. 대표적인 예가 ‘띠하이(tihai)’다. 띠하이는 같은 문장을 세 번 반복하고, 세 번째 문장의 마지막 박이 정확히 원의 첫 박(Sam)에 맞아떨어지는 리듬 구조다. 정해진 시간 안에 수학적 퍼즐을 푸는 것, 그게 바로 띠하이다. 언제 시작해야 정확히 맞아떨어지는지를 감각적으로 계산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타블라의 리듬은 시간과 수학, 감각이 정밀하게 결합된 하나의 설계다. 이러한 구조들을 깊이 묵상하다 보면 내가 타블라를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타블라가 내 안의 질서를 끌어내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Tihai 예시.

나는 진화보다는 설계의 관점에서 세계를 바라본다. 생명은 처음부터 각각의 형태와 능력을 갖춘 채 창조되었으며 그 안에는 완성된 구조가 담겨 있다고 믿는다. 음악이 그 증거 중 하나다. 인간은 단순한 진동에 반응하지 않는다. 우리는 조화에 이끌리고 반복과 변주 속에서 의미를 느낀다.


이 감각은 학습된 것이 아니다. 아름다움을 느끼는 능력은 선험적으로 주어지며 인간 존재 그 자체에 새겨진 감응의 회로다. 아기는 언어나 이론을 알지 못해도 미소 짓는 얼굴에 끌리고 따뜻한 화음에 안도한다. 그 반응은 문화가 주입한 것이 아니라 태초에 부여된 직관이다. 우리는 아름다움을 ‘배우는’ 존재가 아니라 그것을 ‘기억해내는’ 존재다.

현대의 음악은 세계가 무의미하고 우리는 그냥 던져진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려 한다. 예측 불가능성, 해체, 충돌, 불협, 무의미함을 전제로 혼돈과 우연을 감각하는 것에 가치를 둔다. 중심은 제거되고 형식은 부정된다. 이 시대의 자화상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해체조차도 어떤 구조 위에서만 가능하다. 소음도 결국은 주파수이고 불협도 시간 위에 놓여야 존재한다. 아무리 무의미를 주장해도 그것이 구현되는 장(場)은 여전히 물리적 질서와 시간적 맥락을 전제로 한다. 그래서 나는 음악이 혼돈의 반영이 아니라 창조의 증거라고 믿는다. 나는 질서를 믿고 리듬을 믿는다. 리듬은 시간 속에 새겨진 설계의 흔적이며 맥박이다.

연주자는 언제나 경계 위에 선다. 음악가는 자기가 의식하든 못하든 유신론과 무신론 사이에 서 있다. 연주는 아무 의미 없는 파형으로 흩어질 수도 있고 설계된 질서에의 응답이 될 수도 있다. 어떤 이는 그 틈에서 의심하고 어떤 이는 그 틈에서 기도한다. 연주란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대한 존재론적 태도다.

사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생의 실존적 부조리, 삶이 나의 동의 없이 강제로 시작된 사건이라는 우울한 진실을 받아들일 것인지, 아니면 어떤 계획과 의미를 발견하는 여정 속에서 자기 존재를 세울 것인지는 각자의 선택이다.

나는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결국 어떤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우연과 무의미함, 비질서의 세계관 위에 삶을 세우는 것 역시 하나의 신념이다. 역설적으로 그것은 무신론이라는 이름의 종교이고, 혼돈과 부재의 감각 속에서도 일관된 질서를 추구하는 방식이다. 신은 없다고 믿는 그 믿음 역시, 본질적으로는 신이 있다고 믿는 태도와 닮아 있다. 인간은 결국, 어떤 세계관의 질서를 따르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다.

음악은 창조된 세계의 구조를 반영하는 가장 분명한 언어다. 이 언어는 우주의 물리법칙, 수학, 자연의 상수가 완벽하게 반영되어 있다. 인도의 고전음악은 이 본질을 명확히 전제한다. ‘소리(Nada)는 브라흐만이다’라는 말처럼, 소리는 곧 우주의 본질이고 연주는 그 본질을 드러내는 작업이다. 인간은 그 설계된 질서 위에서 그 질서를 되짚으며 소리의 흐름을 따라간다. 연주는 곧 창조의 질서에 귀 기울이는 일이다.

나는 타블라를 연주할 때 소리를 창조하지 않는다. 나는 이미 존재하는 구조를 감지하고 그 흐름에 응답한다. 그것은 엔트로피의 방향과는 반대다. 그 구조와 감동, 조화와 정밀함은 처음부터 설계되어 있었다. 나는 그 질서를 재현함으로써 창조주와 교감한다. 이 세계를 설계한 존재는 분명 음악가일 것이다.

글/정명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