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블라를 연주하며 알게 된 것들 30
나는 손가락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을 때마다 구루지에게 왜 안 되는지에 대한 분석적 질문을 던지곤 했다. 왜 힘이 들어가는지, 어떤 손가락의 각도가 문제인지 정밀하게 파고들고 싶었다. 그러나 구루지는 늘 한마디만 반복하셨다. “리야즈. 리야즈”. 연습하라는 말뿐이었다. 솔직히 당시의 나는 그러한 진단 없는 반복이 비과학적으로 느껴졌다. 무엇이 문제인지 정확히 알고 반복하면 더 효율적이지 않을까.
시간이 지나면서 그 '비과학'의 '과학'을 알게 되었다. 내가 던진 질문은 특정 감각을 딱 꼬집어 ‘문제’로 규정하고 그것을 제거하려는 목적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 판단이 먼저 굳어 있으면 마음의 통일성이 깨져 더 마비된 감각이 산출된다. 반면 구루지의 답은 판단 이전의 자리로 돌아가라는 요청이었다. 이해하고 고치려 들지 말고 그 감각을 그대로 통과하며, 반복 속에서 몸이 스스로 길을 찾도록 허용하라는 뜻이었다.
악기 수련의 과정은 강의 발원 과정과 같다. 입문자는 강의 상류다. 아주 작은 계곡에서 시작한 물은 돌에 부딪히고 방향을 틀며, 수많은 충돌을 겪으며 점차 수원을 넓혀간다. 상류의 물살이 불안정하다고 해서 그것을 ‘문제’라 부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수련자의 경직과 감각의 어긋남은 제거해야 할 오류가 아니라, 음악이라는 큰 물줄기에 없어서는 안될 필수적 요소다. 모든 행위의 순간은 순간으로 충족된다. 그렇기에 어떤 원인을 찾아내 제거하려는 인과론적 방법에 집착하기보다, 힘을 빼고 마음을 비우는 반복 속에 자신을 내 맡기는 것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 외부에서 내부가 아닌, 내부에서 외부로. 물은 가만히 둬도 자연스럽게 아래로 흐른다. 몸의 자율성과 시간을 신뢰하는 하는 것 리야즈의 철학, 즉 연습의 철학이다.
내가 좋다와 나쁘다로 감각을 나누지 않아도 몸은 이미 알고 있다. 연주하는 근육은 자율신경계가 관장하는 호흡처럼, 내가 간섭하지 않을 때 오히려 더 정확하게 제자리를 찾아간다. 몸의 자율성을 신뢰하고 당신의 감각을 있는 그대로 허용하기를 권한다. 되던 연주가 잘 되지 않고, 특정 감각에 집착하는 마음이 들 때는 그 감각에 ‘허용’, ‘재미’, ‘의미’와 같은 가능성의 언어들을 주입하여 마음의 관성을 0으로 만들어야한다. 그것은 억지 긍정이 아니라, 좋고 나쁨을 나누기 이전의 자리로 되돌아가려는 시도다.
이 실험을 삶의 모든 순간으로도 확장해 보라. 나는 마음에 안 드는 사람, 적은 개런티, 불합리한 상황 등의 이유로 거절했던 인간 관계, 연주 제의, 강의 제의들을 가능성의 언어들로 해석하고 기꺼이 허용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것들이 오히려 네트워크의 노드가 되어 새로운 관계와 기회로 이어졌다. 처음에는 ‘손해’처럼 보였던 선택이 또 다른 배움의 문이 되고, ‘좋은 조건’처럼 보였던 제안이 오히려 나를 안주하게 만들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좋음과 나쁨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삶의 흐름 속에서 끊임없이 자리를 바꾸는 관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