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육신을 입는 순간

타블라를 연주하며 알게 된 것들 9

by 손안의 우주


인도에서 타블라를 배우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은 구루지가 평소보다 훨씬 더 복잡한 곡을 주셨다.


다게띠뜨 다게나다 띠르끼뜨다게 딘나게나...”


구루지가 구음을 읊자마자 나는 잊어버릴까 봐 다급히 노트를 꺼내 들었다. 그 순간, 구루지의 말씀이 나를 멈춰 세웠다.


“적지 마라. 이건 글이 아니다.”


펜은 없어도 짜이는 있어야.

나는 잠시 당황했지만 그날 이후 구루지의 말이 몸에 새겨질 때까지 그 소리를 외우고 또 외웠다. (사실 숙소에 돌아가서는 조심스럽게 적어두긴 했다.) 그리고 서서히 깨달았다. 이 소리들은 단지 기억해야 할 정보가 아니었다. 그것은 입과 손, 귀와 가슴 전체로 받아들여야 할 살아 있는 리듬의 생명체였다. 나는 단지 그것을 외우는 자가 아니라 그 생명을 불러들이는 통로가 되어야 했다.


서양 음악은 오선보를 통해 수세기에 걸쳐 음악을 기록하고 전수해왔다. 음의 높이와 길이, 셈여림과 빠르기까지 정밀하게 기호화하여 작곡가의 의도를 가능한 한 정확히 재현하려 했다. 서양 음악에서 소리는 문자로 환원된다. 그 체계 덕분에 멀리 떨어진 시간과 공간에서도 음악은 동일한 형태로 복제될 수 있었다.


기보를 통한 전수


하지만 인도 음악은 다르다. 인도 전통 음악은 수세기 동안 오직 구전(口傳)의 방식으로 이어져왔다. 음악은 스승의 입에서 제자의 귀로 전해지고 몸으로 흡수되며다시 소리로 되살아난다.


전통적인 인도 음악 교육 시스템인 구루쿨(Gurukul)에서는 제자가 스승의 집에 머물며 일상의 리듬 속에서 수련한다. 스승의 숨결과 억양, 손의 각도와 몸의 움직임까지 삶 전체를 통해 체화하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기술 습득이 아니라 하나의 감각적 세계를 전수받는 일이었고 음악이 문자가 아니라 몸의 진동으로 배우는 구조임을 보여준다.


구전을 통한 전수

그래서 과거에는 외국인에게 타블라를 가르치지 않던 유파도 있었다. 타블라는 악기가 아니라 언어라는 인식 때문이었다. 타블라의 리듬은 단순한 연주 기술이 아니라 언어-삶-수행의 문맥 안에서만 즉, 다르마(Dharma)의 질서 안에서만 비로소 살아날 수 있다고 여겨졌다.


이들에게 다르마란 단지 도덕이나 종교적 규율이 아니다. 그것은 우주의 본래 질서이며 각 존재가 그 질서 안에서 맡은 자리다. 음악 또한 그 일부이며 타블라의 리듬은 그 다르마의 파동을 인간의 손으로 구현해내는 도구였다. 그러므로 이 악기의 소리는 단지 손가락의 움직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다르마에 따른 삶의 태도, 수행의 자세, 존재 전체의 정렬에서 비롯되는 울림이었다.


이러한 관점은 서아시아와 유럽 종교 전통, 예컨대 이슬람이나 기독교와는 큰 차이를 보인다. 이슬람과 기독교에서 신의 뜻은 주로 계시와 율법의 형태로 주어지며 인간은 그 명령에 순종함으로써 신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는다. 중심은 의지와 믿음에 있다.


하지만 인도에서의 다르마는 단지 신의 뜻을 따르는 순종적 자세가 아니라, 우주의 구조 안에서 각 존재가 조화를 이루는 존재론적 배치에 가깝다. 다시 말해 그것은 해야 할 일이기 이전에 자신의 본래 자리를 인식하고 살아내는 태도다. 타블라의 리듬은 그 자리감의 구현이며 연주는 우주적 조화 속에서 자신이 맡은 고유한 진동을 울리는 행위다.


킹받게 그려주는 GPT 형님..

타블라의 리듬을 구성하는 dha, dhin, na, ti, te와 같은 구음(Bol)들은 단순한 기호가 아니다. 이 구음들의 뿌리는 제사의 언어인 산스크리트어에 닿아 있다. 고대 인도에서 산스크리트어는 소통의 수단이 아니라 소리 그 자체에 힘이 깃든 언어였다. 사제들은 이 언어를 발화하며 자연과 신과 인간 사이의 질서를 매개했다. 그 주문은 ‘현실을 바꾸는 말’이었다.


기우제에는 하늘의 물줄기를 여는 진동이 담겨 있었고 장례 의식에는 죽은 자의 혼을 다른 세상으로 인도하는 리듬이 울려 퍼졌다. 결혼식에서는 두 존재의 삶을 하나로 묶는 파동이, 파종의 제사에는 땅을 깨우고 생명을 부르는 낭송이 있었다. 어떤 소리는 악을 물리치고, 어떤 진동은 태어날 생명을 축복했다. 이 모든 제의적 행위는 정확한 발성, 억양, 리듬, 호흡, 몸짓의 정렬을 요구했다.


그 힘은 단어 하나, 악센트 하나, 숨의 길이 하나가 우주의 질서를 뒤흔들 수 있다는 믿음에서 나왔다. 발화는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다르마를 깨우는 주파수였다. 사제들은 그 발화를 목숨처럼 지켰고 예술가들은 그 주문에 몸을 입혔다. 그렇게 태어난 것이 바로 악기다. 그리고 그 육화된 주문의 리듬을, 오늘의 내 손이 연주하고 있다.


말이 육신을 입는 순간

타블라를 연주한다는 것은 단순히 손가락으로 북을 두드리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언어가 신체로, 다시 소리로 전이되는 하나의 순환을 살아내는 일이다. 구음을 입으로 내뱉고 그 구음이 손으로 흘러간다. 손끝이 가죽에 닿아 소리로 드러나는 순간, 나는 단지 말하고,움직이고, 울리는 존재를 넘어서, 무언가가 나를 통해 현현하고 있다고 느낀다.


이러한 구전의 방식은 ‘시(詩)’를 닮았다. 시는 눈으로만 읽을 때보다, 입을 통해 낭독되고 귀로 들릴 때 비로소 살아난다. 어떤 단어가 공기 중에 놓일 때 생기는 타격감과 리듬, 발생과 사라짐, 여운과 울림. 나는 타블라를 연주할 때 손끝에서 바로 그 감각들을 느낀다. 말들은 음표처럼 위치를 나타내는 부호도 아니며, 정보 전달을 위한 도구도 아니다. 그 소리 자체가 음악이며, 입에서 태어난 리듬의 시다. 그 순간, 말은 더 이상 정보가 아니다. 말은 존재를 불러오는 힘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John 1 : 1)


성서의 이 문장이 내 앞의 작은 북 위에서 진동하고 있었다. 말이 육신을 입는 이 순간을, 나는 매일 타블라 위에서 체험한다.

글/정명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