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은 파동 몸은 입자

타블라를 연주하며 알게 된 것들 8

by 손안의 우주


연주는 물리의 세계다. 손을 높이 들어 빠르게 떨어뜨리면 큰 소리가 나고 낮게 들어 천천히 떨어뜨리면 부드러운 소리가 난다. 느릴수록 손은 아래로 눌리는 힘이 강해지고 빠를수록 위로 튀려는 반작용이 커진다. 싱글 템포와 더블 템포의 차이는 타격의 높이, 속도, 힘의 크기에 정비례하거나 반비례한다. 결국 연주는 작용과 반작용이라는 물리법칙을 충실히 따른다.


연주 = 물리학

이러한 물리 법칙은 소리에도 작용한다. 우리가 듣는 모든 소리는 공기를 매질로 삼아 진동하는 파동이다. 따라서 공기의 밀도, 압력, 구성비율은 물론, 그 공간의 중력까지도 소리의 속도와 전달 방식, 심지어 음색에까지 영향을 준다. 예를 들어 화성처럼 대기가 희박한 행성에서는 동일한 타격을 가하더라도 지구와는 다른 소리가 난다. 또렷하지 않고 흐리멍텅하게 들린다. 밀도가 낮은 공기는 진동을 효율적으로 전달하지 못해 소리는 쉽게 퍼지거나 아예 사라지기 일쑤다. 또한 중력이 낮아질 경우 손의 낙하 속도 자체가 달라지므로 동일한 동작을 해도 타격의 에너지 자체가 다르다. 같은 연주를 해도 행성마다 다른 음악이 펼쳐지는 것이다. ​


소리는 행성마다 다르게 들린다


음이 울리기 위해서는 그 배경에 물리적 질서가 받쳐줘야 한다. 연주는 단순히 인간의 몸과 악기만의 협업이 아니라 우주적 조건 속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정교한 공명이다. 하지만 이러한 물리적 원리들이 실제 연주에서는 내가 쉽게 컨트롤 할 수 없다. 분명히 다 이해가 되는데 이상하게 손은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속도는 붙지 않으며 음량은 조절되지 않는다. 분명히 타격은 이루어졌는데 기대한 울림과는 전혀 다른 소리가 돌아온다. 소리가 너무 작게 느껴지거나 때론 지나치게 강하게 들린다. 물리 법칙에 따라 몸을 자유롭게 조정할 수 있다면 누구나 대가의 수준으로 연주할 수 있을테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소리를 내는 몸도, 그 소리를 감지하는 귀도, 그 모두가 어딘가에서 끊겨 있는 듯한 느낌이다. 설명할 수 없는 심연이 가로놓여 있다. 물리적 이해가 감각의 회로를 타고 몸에 닿기까지는 수년, 아니 수십 년이 걸린다.


그 이유는 바로 정신의 존재 때문이다. 정신은 보이지 않고 측정되지 않으며 의도대로 조작되지 않는다. 물질의 세계에서는 손을 뻗으면 무언가를 잡을 수 있지만 정신의 세계에서는 잡으려는 순간 사라진다. 생각하려고 하면 생각이 나지 않고 생각을 멈추려 하면 오히려 더 떠오른다. 그래서 악기를 연주하는 이들이 일상에서 자주 쓰는 말, ‘연습 부족’이라는 말은 몸의 근력이 아닌 정신을 다루는 근력이 충분히 형성되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정신은 파동이고 몸은 입자다. 하나는 확률과 불확정성의 세계에 속하고 다른 하나는 질량과 속도의 법칙을 따른다. (이건 양자역학이 아니라 ‘양자감상학’이라는 유사과학에 가까우니 물리학 교과서로 검증하려 들면 곤란하다.) 정신은 양자역학의 세계에 몸은 고전역학의 세계에 존재한다. 연습이란 이 서로 다른 두 세계를 한 궤도 안으로 조율하는 일이다. 그래서 연주자는 손을 훈련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마음을 다루는 법도 배워야 한다. 명상과 연습은 하나다.


연습과 명상은 하나

이 점에서 흔히 상상하는 SF적 시나리오, 뛰어난 피아니스트의 뇌파나 신경 신호를 다른 사람에게 이식하여 동일한 연주를 재현할 수 있다는 생각은 실현 가능성이 낮다. 왜냐하면 뇌의 신호는 단순히 손의 움직임을 명령하는 정보의 모음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정서적 맥락, 외부 자극, 기억, 기대, 긴장, 체온, 심박수, 환경적 노이즈 등과 결합된 하나의 유기체적 패턴이기 때문이다. 신호를 이식하는 것만으로는 그 파동의 전체적인 '맥락'까지 이식할 수 없다. 즉, 정신의 파동이 빠진 채로 연주의 입자만 복제하는 것은 불완전한 모사일 수밖에 없다.


실력이 향상되는 과정에는 여러 가지 노이즈가 끼어든다. 물리적 차원에서의 가장 명확한 노이즈는 부상이다. 통증은 감각의 네트워크를 붕괴시키는 주범이다. 따라서 연주자는 스포츠 선수처럼 일상의 부상에 유의해야하고 올바른 자세와 균형 잡힌 힘의 분배를 통해 연주의 물리적 기반을 다져야 한다. 이때 고전 물리의 원리를 떠올리는 것이 큰 도움이 된다. 높이, 축, 각도, 힘, 낙하 속도 등과 같은 요소들을 가능한 한 정량적으로 감각화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타블라에서 '렐라'(Rela)라고 불리는 빠른 속도의 연주가 있다. 이때 연주자는 마치 회전 중심에 선 것처럼 손끝에 원심력적 감각을 느낄 수 있다. 속도가 붙을수록 타격은 바깥으로 퍼지려 하고, 중심을 잃는 순간 연주는 흩어진다. 렐라는 곧 팽창과 수축의 균형이며 연주자는 고전역학의 감각으로 그 에너지를 다스려야한다.


고전 역학적 감각 불러일으키기

하지만 이 물리적 인식이 몸에 온전히 전달되기까지는 더 미묘하고 강력한 노이즈가 작용한다. 감정, 기분, 피로, 온도, 습도, 생리적 조건 같은 정신의 파동들이다. 이 보이지 않는 파동들은 입력된 물리적 정보를 교란하고 왜곡시킨다.


익숙한 연주조차 어느 날은 이유 없이 버겁다. 기초적인 타격조차 중심을 벗어나고 박자가 흔들린다. 곰곰이 떠올려보면 전날 잠을 설쳤고 리허설 중의 작은 실수 하나, 아침에 나눈 짧은 말다툼이 아직 마음에 남아 있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생각 하나, 감정 하나가 손끝의 궤적을 바꾸고 연주의 흐름 전체를 흔들어버린 것이다.


그때 나는 아무리 정확한 물리적 이미지와 계획을 세워도 그 감각이 몸에 전달되기 전에는 반드시 정신의 파동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파동은 내 안에서 먼저 '관찰'되지 않는 이상, 결코 다스려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결국 자극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그 자극을 붙잡지 않고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그때서야 비로소 정신의 흔들림이 잠잠해지고 내가 의도한 수치와 이미지들이 정확히 근육에 전달된다.


인도의 음악가들은 정신과 육체, 파동과 입자의 균형을 위한 장치들을 마련해놓았다. 타블라를 연습하기에 앞서 구음을 입으로 낭송하는 행위는 단순한 리듬 학습이 아니다. 마음을 한곳에 모으는 집중의 의식이다. 목소리를 따라 숨을 고르고 호흡과 발성에 의식을 실어 나름으로써 연주 이전에 마음의 바다를 잠재운다.

그래서 구루들은 손기술을 가르치기에 앞서 제자에게 먼저 구음을 읊게 한다. 제자들은 그 구음의 반복 속에서 혼잡한 생각이 점차 가라앉고 흔들리던 파동들이 정렬되는 내면의 경험을 하게 된다. 손은 움직이지 않지만 마음은 이미 연주의 흐름을 타기 시작한다. 그 마음의 조율 없이는 어떤 기술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결국 이 두 세계, 물리와 정신, 입자와 파동의 간섭과 조화가 예술의 본질이다. 고전역학의 법칙을 정밀하게 구현할 수 있다 해도 정신의 파동 없이는 그 연주가 살아 움직일 수 없다.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대가의 연주는 완전히 복제되지 않는다. AI나 로봇은 출렁이는 정신의 바다, 그 예측 불가능한 파동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몸은 정신의 간섭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바로 이 불완전함이 우리의 연주를 특별하고 아름답게 만든다.

글/정명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