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과 마찬가지이다.” 우리나라 대통령이자 노벨 평화상을 수여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자신의 선거유세에서 자주 사용했던 문장이다. '나 하나쯤은 괜찮겠지'라는 안일한 생각과 실천하지 않는 시민의 자세, 다시 말해 무관심이 민주주의 후퇴의 가장 큰 적이라는 의미로 사용했다고 생각한다. 시대와 공간을 넘어 미국의 작가이자 철학자였던 헨리 데이비드 소로도 비슷한 생각을 했었다. 그는 무관심이야말로 사회 병폐의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말한다.
그의 또 다른 명저 『월든』에서 알 수 있듯이 사회와 일정한 거리를 두며 자기 내면과의 대면이나 자연의 무위(無爲)함을 사랑했던 작가가 소로였다.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삶을 신조로 여겼던 철학자가 무관심을 사회문제의 근본 원인이라고 지적한 것이 어찌 보면 역설적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한 걸음 더 들어가 생각해보면 그만큼 무관심은 인간의 부조리를 가장 손쉽게 합리화할 수 있는 무기라는 의미도 된다. 만연된 무관심은 부패의 광범위함을 의미한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무관심이 어떠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 극명하게 볼 수 있는 역사적 사례로 독일 나치의 만행을 들 수 있다. 나치가 집권한 시기에 약 600만 명이 넘는 유대인을 학살했으며, 게르만족의 우수성을 증명한다며 독일 내 장애인을 전쟁 시작과 함께 '처리'했다. 달리는 가스실(기차에 가스실을 설치해 유대인 학살에 이용)을 개발한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사망한 후 아르헨티나로 도망간다. 하지만 모사드에 의해 이스라엘로 검거된 아이히만은 한결같이 자신의 무죄를 주장한다. 나치의 공무원으로 상부의 지시를 성실히 따랐을 뿐 절대로 유대인을 죽이려 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한나 아렌트는 이렇게 섬뜩한 재판을 지켜보며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란 책을 쓰게 된다. 나치 만행의 원인은 히틀러와 괴벨스가 악마였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편했던 사람들에게 '악의 평범함'을 주장한 한나 아렌트의 결론은 많은 논란을 일으킨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악마가 될 수 있다는 설명은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21세기인 지금은 이러한 생각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지만, 당시에는 독일과 유대인 양쪽 모두에게 거센 저항을 받았다.
스스로 생각하지 않으면 누구나 악인이 될 수 있다.
라고 한나 아렌트는 말한다. 악(惡)이란 어디서 오는가? 부패의 궁극적 원인은 무엇인가? 타인의 고통과 아픔을 공감하지 못하는 무능이 나치라는 비극을 낳았다. 하지만 이런 능력이 있음에도 이를 애써 외면하는 무관심은 악보다 더한 악함이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소로는 무관심을 그렇게까지 비판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성인의 최고의 덕성은 인식과 실천을 결부시킨다는 것이다. 우리가 책을 읽고 배우며 이론적 근거를 체화하는 목적은 결국 실천에 있다. 겉보기만으로는 실천하지 않는 양심과 부정한 행위를 상상하는 것을 구분할 수 없다. 손과 발 그리고 말과 글을 통해서 그 사람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 그런데 무관심은 이러한 고민조차 할 수 없게 만든다. 불의보다 간악한 것이 정의로운 척인 것처럼 무관심은 생각만 하는 서생보다 무책임하며, 비인간적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폐단은 무관심 때문이라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악플보다 나쁜 것이 무플"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극단적으로 비교해서 폭력보다 무서운 것이 무관심이다.
온 지구가 자본주의라는 결계로 묶여있으며 사회는 끊임없이 고도화되고 팽창한다. 인간소외와 부의 양극화는 일시적 문제가 아니라 지속적인 현상이 됐다. 이러한 환경은 인간을 자꾸만 무관심의 늪으로 잡아당긴다. 하지만 우리의 무관심을 지금처럼 방치한다면 늪은 순식간에 블랙홀이 되어 모든 것이 사건의 지평선 너머로 사라질지도 모른다. 무관심의 블랙홀은 가치, 윤리, 도덕, 종교와 같은 인류의 유구한 유산은 물론 희망까지도 집어삼킬 수 있다. 나치의 비극이 절대로 다시 일어나지 않으리란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공감의 시작은 관심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우리 주변을 둘러볼 필요가 있다. 나의 관심에서 시작된 작은 실천이 우리 모두를 무관심의 블랙홀에서 벗어나게 해 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