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는 이유
저희들의 요구는,
1일 15시간의 작업시간을 1일 10~12시간으로 단축해 주십시오.
1개월 휴일 2일을 늘려서 일요일마다 휴일로 쉬기를 원합니다.
건강진단을 정확하게 하여 주십시오.
시다공의 수당(현재 70원 내지 100원)을 50% 이상 인상하십시오.
절대로 무리한 요구가 아님을 맹세합니다.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요구입니다.
『전태일 평전』·조영래(아름다운전태일, 2020)
● 가을의 정취를 뒤로 한 채 스산함마저 감돌던 1970년 11월, 청년 노동자 전태일은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 앞에서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요구'를 처절하게 외치며 불꽃과 한 몸이 되었다. 그가 가슴에 안고 있던 근로기준법은 서울 한복판이라는 무심함과 대비되는 청년 노동자의 열정적인 절규처럼 차갑고도 뜨거워 보였다. 하루 8시간 노동과 초과근무수당을 국가가 법으로 규정한 근로기준법이 이 땅에 최초로 제정된 해는 1953년이었다.
그로부터 17년이나 지났지만 1970년대 한국 사회는 사람보다 화폐의 가치가 우월한, 이성보다는 폭력이 우선인 야만의 시대였다. 당시 쿠데타로 권력을 이양받은 군부 정권은 경제 개발이라는 명목 아래 노동자들에게 노동의 정당한 대가마저 포기하도록 강요했고, 노동자가 인간답게 살 권리를 부인했다. 부당하게 축적된 부는 항상 기득권과 그들에게 기생했던 적폐 세력의 몫이었다. 한 청년의 불꽃같은 정신은 사회에서 노동자란 무엇인지, 나아가 '인간의 존엄성'이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세월은 다시 흘러 2000년 12월, 참여연대 소속 윤종훈 회계사는 혼자서 국세청 건물 앞에 "국세청은 무엇을 두려워하는가"라는 피켓을 들고 섰다. 법적으로 시위란 2인 이상이 함께 하는 것으로, 1인이 하는 행동은 시위에 해당하지 않으므로 금지되지도 않는다. 참여연대 쪽은 법의 허점을 파고들었다. 요즘은 익숙한 ‘1인 시위’라는 혁신적 전략이 등장한 순간이었다.(위키백과) 당연히 이 낯선 장면은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하지만 기후 문제, 소수자의 권리, 동물보호, 개인의 억울함 등과 같이 사회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지나친 1인 시위도 많이 있다. 지금도 광화문 광장을 지날 때면 이런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런 시위를 하고 있는 사람들을 지켜보면 안타까운 마음이야 있지만, 어떻게 보면 효과도 실효성도 없어 보인다. 무식한 필자가 보기에 '저런다고 문제가 해결될까?'가 솔직한 심정이다. 그들은 과연 어떤 마음으로 저렇게 혼자서 시위를 할 수 있었을지 궁금하다. 나아가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은데 꿋꿋이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있는 이유, 분명 이길 수 없는 싸움이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 이유, 세상 모두 알아주지 않지만 자신의 길을 묵묵히 가는 사람이 있는 이유, 새파란 꿈만 꾸기에도 모자랐던 청년 전태일이 스스로 목숨을 던져야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유시민 작가는 한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이 질문에 대해 이렇게 대답했다. "때로 사람들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움직인다. 세상을 이렇게 해서 못 바꾼다는 것을 알지만 나를 지키기 위해서 그런 일을 한다." 내 삶에 대해 스스로 비참함을 느끼며 살아간다는 것처럼 참혹한 일은 없다. 인간은 평생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살아간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인간의 존엄성은 숭고하기 전에 삶을 이어가기 위한 현실이 된다.
게다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행동에 나서면 우리는 그 일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큰 무리 없이 결과를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의 주장을 무조건 관철하기 위해 행동에 나섰다면 결과에 따라 자신의 신념까지 바꿔버리는 경우가 발생한다. 실패는 곧 자기 행동이 가치가 없었다는 결론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역사에서 '변절자'란 그런 사람을 말한다.
자본주의는 인구 증가를 기회로 교육마저 컨베이어 벨트 위로 올려놓았다. 사회는 '표준화는 효과적'이라는 미명 하에 그들의 요구에 철저히 수긍하는 인간만을 선별한다. 수업은 일종의 세뇌 작업으로 정해진 목적지로 빠르게 달려가는 것이 최선이라는 생각을 끊임없이 주입한다. 수업을 벗어나도 그다지 달라지는 것은 없다. 미디어는 수익을 창출하는 도구라는 본모습을 감추기 위해 인간의 욕망을 교묘하게 자극한다. 능력주의를 맹신하는 사회 분위기 덕분에 정의와 정의로운 척은 더욱 구분하기 힘들어졌다. 진짜 읽을만한 기사가 무엇인지 알 수 없고, 알 수 없는 '대중'에 속하기 위해 진짜 '나'를 돌아볼 시간은 없다.
이렇게 기댈 곳 없는 나의 내면(정신)은 방황할 수밖에 없고 나의 마음을 지켜줄 사람은 결국 나밖에 없다. 그렇다면 나를 지키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운동, 명상, 공부, 여행 등이 떠오르지만 필자는 압도적 가성비의 독서를 추천한다.
<피아니스트>(로만 폴란스키, 2001)로 제75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은 지적인 이미지의 배우 에이드리언 브로디. 그가 주연한 영화 <디태치먼트>(토니 케이, 2011)를 보면 독서에 대한 흥미롭고 매력적인 정의가 등장한다. '어디서나 존재하는(Ubiquitous) 동화(Assimilate)'는 독서의 본질을 날카롭게 가로지른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무뎌진 사유에 대항하기 위해, 자신의 의식과 신념을 함양하기 위해, 교육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책을 읽어야 한다.
독서는 '나'의 정신을 지키는 일이자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일이다.
다양한 의견을 끊임없이 받아들이는 것, 건강한 수용이 바로 독서다. 저자의 논거를 따라가며 제시한 사례는 설득력이 있는지 고찰하고, 만약 오류가 있다면 어떻게 바꿔야 할지 대안을 고민한다. 정말 저자의 의견을 이해했다면 나만의 실천 방안도 모색한다. 이와 같은 일련의 과정은 모두 나의 내면과 정신을 지키고 주체적인 존재로 바로 서는 방법이기도 하다.
관습에 저항할 마지막 보루도 독서다. 관습이란 어떤 사회에서 오랫동안 지켜 내려와 그 사회 성원들이 널리 인정하는 질서나 풍습을 말한다. '생각 없이 살면 사는 대로 생각한다'라는 말처럼 관습에 익숙해지면 편할 순 있어도 그런 인생은 발전도 없고 '나'도 없다. 하지만 독서를 통해 사유를 확장해 나간다면 관습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힘과 여유가 생긴다. 관습을 핑계로 내팽개쳤던 이성, 자아, 정의를 우리 주변으로 불러들일 수 있다.
세상은 우리의 정신을 집요하게 간섭하고 끊임없이 통제하려고 한다. 아름다움의 기준조차 주체적으로 정의하지 못하며 자신의 꿈 또한 타인에게 의지한다. 음식과 여행이 돈벌이 수단이라는 말보다 힐링이라는 세련된 언어와 더 어울리는 이유를 나만의 고유한 고찰의 결과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디스토피아 세계를 그린 영화, 게임, 문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신의 정신을 상실한 개인을 떠올려 보자. 그들의 미래는 모든 것을 부정해야 하기 때문에 비참하다. 자신의 사랑을 부정하고, 존경을 부정하고, 가치를 부정하며 결국엔 자신의 존재마저 부정한다. 반대로 자신의 정신을 지킨다는 것은 곧 나의 존재를 스스로 인정한다는 말과 같다. 자기 내면을 지키는 일, 나를 스스로 인정하는 일,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일, 모두 독서를 통해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