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는 이유
● '무엇인가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다. 그게 불가능하다면 최소한 특별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다.' 중2병 같지만,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은 해 본 생각이다. 또 그런 사람이 되려고 다양한 시도와 노력도 해본다. 다른 사람이 듣지 않는 음악을 듣고, 남들이 모르는 영화를 좋아하는 척하고, 어려운 고전도 오기와 끈기로 끝까지 읽어 본다. 어쩌면 '있어 보이고 싶은 마음'은 우리가 성장하는 데 꼭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원자로 구성된 인간은 그 특성상 물질보다 공간이 훨씬 큰 부피를 차지하는 존재(원자의 구성 요소인 원자핵과 전자를 합해도 원자 전체의 부피의 약 1,000조 분의 1에 불과하다)이기 때문에 무엇인가 계속 채우지 않으면 삶이라는 무게를 버티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자기 지식의 깊이와 넓이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각박한 세상이다. 무엇이 부족한지 알고 싶지만, 그마저도 파악하기 힘들다. 하지만 고맙게도 책을 읽으면 자신의 지식을 확장할 수 있다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다. '있어 보이고 싶다'라는 말이 불편할 수 있지만, 요즘같이 불안한 상황에서 지식에 대한 갈증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독서는 안갯속처럼 무엇 하나 명징한 것이 없는 시대를 살아가는 데 있어서 마지막 희망과도 같다. 따라서 무언가 있어 보이고 싶다는 생각, 다시 말해 지적 허영심은 콘크리트 벽으로 가득한 사회를 반항하는 인간의 반작용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영화 평론가이기도 한 이동진 작가는 『이동진 독서법』(위즈덤하우스, 2017)에서 "영화든 책이든 즐기면서 그것으로 자신의 빈 부분을 메우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지적 허영심일 거예요"라고 말한다. 있어 보이고 싶은 지적 허영심을 '허세'라고 비난할 수도 있지만, 자신에게 부족한 점을 보완하는 촉매제로 볼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있어 보이고 싶은 마음은 독서를 하는 또 하나의 원동력이다. 잘난 척하는 재수 없는 사람(?)도 독서를 꾸준히 한 사람이 더 잘할 수 있다. 지적 허영심, 독서의 이유로 충분하다.
공감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아보려면 어쩔 수 없이 군대 이야기를 해야만 한다. 하지만 군대에서 축구하는 지겨운 이야기는 아니니 너무 걱정하진 마시길 바란다. 이것은 오히려 슬프고 처연한 이야기다. 갓 전역한 복학생을 일반 학생들과 구분하는 일은 너무나 쉽지만, 그것이 꼭 주변과 어울리지 않는 외향적 요소 때문만은 아니다. 그들에게만 보이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바로 여건만 허락한다면 기다렸다는 듯이 열정적으로 쏟아내는 군대 이야기. 군 생활에서 겪었던 경험과 충격에 대해 열변을 토한다. 같은 복학생을 만나기라도 하면 더욱 그 이야기에 몰두한다. 이 현상은 PTSD(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즉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와 유사하다.
"삶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라는 찰리 채플린의 말처럼 군대 생활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굉장히 짠한 서사가 숨어있다. 경험해 봤다면 모두 알겠지만, 대한민국 군대는 무척 가학적이고 폭력적인 곳이다. 군인은 힘든 일도 겪지만, 부당하고 하기 싫은 일도 해야만 한다. 처음 해보는 '악역'이란 것도 잘하는 척해야 한다. 억울하고 황당한 일이 수시로 일어나기 때문에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더욱 군대에 적응하기 힘들다. 진실은 믿음을 주제로 한 드라마에서 당연히 주인공으로 등장하지만, 생존 다큐멘터리에서는 단역에 불과하다. 기존의 가치관은 순식간에 무너지고 윤리와 도덕은 생존을 위해 후 순위로 밀린다.
정상적인 성격을 소유한 사람이 이런 일을 겪고 나면 당연히 큰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다. 전역하고 사회에 나오면 정서적 상처를 다스리기 위해 본능적으로 군대 이야기를 꺼내게 된다. 그 상처를 드러내고 대화하면서 아픔을 조금이나마 희석시키려는 가슴 아픈 방어기제다.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을 만나면 서로의 아픔을 즐거운 척 이야기하면서 위로하고 위로받는다. 자신의 어두운 과거를 열렬히 토해내면서 서로를 치유한다. 트라우마 같은 군대 생활을 누구에게라도 말하고 싶고, 상처를 공유하고 싶은 것이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비참한 추억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감의 위대함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저 비슷한 아픔을 나누는 것만으로 상처는 치유되고, 그때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는 확인만으로도 충격은 완화된다.
만약 독서에 별명을 지어준다면 '공감'이 가장 유력한 후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뇌는 간접 경험과 직접 경험의 차이를 정확하게 구분하지 못한다. 군대에서 겪었던 착잡한 추억을 나누며 서로에게 공감했던 것과 같이 나와 비슷한 상황에 놓인 책 속의 인물들을 보며 우리는 공감한다. 문학 작품 속 불행한 사건을 겪는 주인공의 감정적 동요를 보며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라는 생각에 안심이 된다. 가상의 인물이지만 괴로운 추억을 나누며 서로를 이해한다. 나와 같은 문제를 고민하는 인물을 책에서 만나기라도 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숙제를 못 해서 불안한 마음으로 등교했는데 나만 못한 게 아니라면 조금 안심이 된다. 그 숙제 못 한 친구 중에 내 단짝이 끼어 있으면 안심을 넘어 반갑기까지 하다.
지적 허영심과 독서를 통한 공감은 다시 '치유와 위로'로 이어진다.
망망대해 돛단배보다 고독한 나의 존재, 지식에 대한 갈망은 마지막 구원의 손길이자 위로의 손길이다. 그렇게 부족한 나를 채우는 독서는 성장의 동력이라는 덤도 같이 건넨다. 또한 서로의 서글픈 과거를 토닥이는 공감도 치유의 손길이 된다. 나와 비슷한 상처를 가진 사람과의 진솔한 대화가 아픔을 줄여주듯이 책 속에 등장하는 가상의 인물이지만 나보다 힘든 삶을 꿋꿋하게 이어가는 열정을 보면서 반성도 하지만 동시에 위로받기도 한다. 이처럼 독서는 언제나 우리에게 치유와 위로의 손길을 건넨다.
경쟁이 일상화된 시대를 살기 때문에 평생을 같이할 동료를 만나는 것이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렵다. 또 그런 동료를 만났더라도 무심한 세월은 아무도 막지 못한다. 무한한 시간은 항상 여유가 넘친다. 한계가 분명한 우리는 조바심에 이것저것 도전해 보지만 그마저 대부분 실패한다. 그럴 때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묵묵히 나를 기다려준 친구가 있다. 나는 한 번도 기다린 적 없는데 변함없는 모습으로 언제나 그 자리에 있던 책. 이렇게 미안할 지경인 책에 보답이라도 하고 싶다면 책장에서 그 책을 꺼내자. 사각사각 책장도 넘겨보자. 그 안에는 지적 허영심도 있고, 공감도 있고, 치유와 위로도 있다. 결국, 책을 읽을 이유가 모여 인생을 살아갈 힘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