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글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기분 좋은 소식을 전하려 합니다. 기억하고 싶은 날의 '일기' 정도로 생각해 주세요. 막상 신청은 했지만, 긴 연휴 덕분에 <비교리즘>을 브런치 책방에 등록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끝날 것 같지 않았던 추석 연휴도 결국 끝나고 허탈한 심정으로 하루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오늘은 유달리 그리고 격하게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이었습니다. "띠링!" 뜻밖에 브런치 앱 알람이 울렸고, 메시지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생경한 내용이었습니다.
'작가님의 책이 브런치 책방에 등록되었습니다.' 그제야 휴가가 시작되기 전 등록 신청을 했었다는 아련한(?)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게다가 검토 기간도 2주 정도 걸린다고 했기에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더욱 기쁜 것도 사실입니다. 이미 여러 훌륭한 저서를 출간한 작가님들에겐 부끄럽지만, 저의 책이 이곳 브런치에 정식으로 소개된다고 생각하니 왠지 뿌듯하고 가슴이 벅차네요. 프로필 소개에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더욱 그렇습니다. 한마디로 제가 처음 출간한 책 <비교리즘>이 브런치 책방에 소개되어 기쁘다는 아주 유치한 이야기입니다.
마지막으로 여기까지 쓸데없는 넋두리를 읽어주신 모든 분에게 감사의 마음을 남깁니다. 어찌 되었든 브런치 스토리덕에 저같이 소심하고 게으른 사람도 책을 쓸 수 있었습니다. 글쓰기와 함께 하얗게 지새웠던 새벽이 얼마나 소중한 시간이었는지 이제야 깨닫습니다. 그때마다 조용히 나를 지켜준 플레이리스트(Muzic for Write)에도 고맙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네요. 저를 포함하여 글과 독서 그리고 책을 사랑하기에 이곳에 흔적을 남기고 있을 많은 작가님에게도 응원의 박수를 보냅니다. 감사합니다.
비교의 긍정과 부정, 그사이 존재하는 것에 관한 이야기. 어떤 대상이든 관계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데 비교만큼 유용한 개념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비교의 부정적 영향력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비교리즘』은 이런 비교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같이 고민해 보자는 취지에서 시작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비교는 우리의 자존감과 자신감에 커다란 상처를 남길 수 있습니다. 반면에 비교를 잘 활용하면 이해하기 힘들었던 개념, 정의, 주장 등이 훨씬 명료해집니다.
'이성(理性)'이란 단어를 이해할 때 지성, 로고스, 사고력과 같은 유의어와 감성, 비합리, 모순과 같은 반의어를 비교하면 그 뜻을 보다 정확하고 풍성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비교를 가치중립적으로 활용할 때 비교의 가치는 오히려 높아집니다. 그리고 비교는 '관계'를 파악하는 데 특히 유용합니다. 인물, 개념, 사물, 이론, 문제, 사상, 물질, 모양, 가치관... 그 대상이 무엇이 되었든 서로를 낯설게 비교하다 보면 의외로 흥미로운 관계가 드러날지 모릅니다. 비교가 상대적 박탈감의 주범이라는 평판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일방적인 결정입니다. 또한 비교는 수단으로써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적절히 활용한다면 유용한 도구임이 틀림없습니다.
오직, 인간이 비교의 의미를 남용하고 확증 편향적으로 이해해 왔기 때문에 문제가 됐을 뿐입니다. 이러한 흐름에서 비교는 과도하게 외면받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비교의 재발견, 꼭 필요한 일입니다. 나아가 비교의 가치는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마음에 달려있습니다. 당신이 증오한다고 해서 비교가 이 세상에서 사라질 일은 없습니다. 비교의 가치중립적인 성격을 제대로 이해하고 적합한 대상에 적용했을 때 비교는 자기 능력을 십분 발휘합니다. 즉, 비교는 사용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에 따라 흉기일 수도 있고 반석일 수도 있습니다.
Phase 1
‘비교’를 위한 전주곡: 프롤로그
사랑이 아름다운 이유: 사랑과 머리카락
당신은 운명을 믿습니까: 《오이디푸스 왕》과 〈올드보이〉
익숙한 맛의 정체: 김치찌개와 된장찌개
삶은 파이다: 파이, Pie, π
최초의 조선인, 마지막 고려인: 정도전과 정몽주
작지만 큰 차이: 판단과 이해
Phase 2
생방송 중입니다: 유재하와 커트 코베인
복수를 위한 안내서: 복수심과 중력
진짜 끝은 무엇일까: 시작, 끝, 과정, 결정
!=, 〉=, 〈=, ==: 인터미션
같지만 또 다른 모습으로: 비와 눈
관념을 실재로 만들다: 연필과 키보드
마음에 답이 있다: 취미와 과제
Phase 3
내가 되고 내가 만드는: 음식과 말
나는 꼰대일까 멘토일까: 훈수와 조언
너는 또 다른 나: 좀비와 나
성장의 연애, 연애의 성장: 연애와 성장
라디오는 살아남았다: 디지털과 아날로그
질문은 연대의 힘: 혐오와 연대
다시 엄친아: 에필로그
하지만 경쟁에 익숙해서 두부처럼 남을 도와주려는 사람을 ‘호구’로 취급하는 것이 현실이다. 필자는 그들을 경쟁에서 뒤처진 우울한 존재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선한 영향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게 응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비교의 목적은 선별이나 구분이 아니라 공감과 인정에 있기 때문이다.
▶︎ P. 46 〈익숙한 맛의 정체: 김치찌개와 된장찌개〉에서
판단은 ‘단절’과 가깝지만, 이해는 ‘연결’과 더 가깝다. 타인과의 대화도 스스로 하는 생각도 이해를 바탕으로 할 때 손쉽게 연결된다.
▶︎ P. 73 〈작지만 큰 차이: 판단과 이해〉에서
별의 사멸 과정에서 중력이 힘을 얻기 시작하면 멈출 수 있는 것은 파괴밖에 없다(너무 걱정하진 말자. 종말을 맞이한 별의 흔적은 다시 태어날 별의 재료가 된다). 불행보다 끔찍한 순간은 불행으로 가는 과정을 멈출 수 없을 때다. 타인의 불행을 유일한 목표로 하는 복수처럼 말이다.
▶︎ P. 95~96 〈복수를 위한 안내서: 복수심과 중력〉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