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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여행의 추억 (하)

by COSMO

셋.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새벽, 선착장은 해돋이를 보려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선착장 입구로 들어가는 마지막 좌회전 신호에서 딸깍딸깍 깜빡이 소리만 울리던 적막함은 순식간에 깨졌다. 주차장에서는 간간이 들려오는 엔진 소리와 발소리가 희미한 대화에 섞여 흘렀다. 한밤중의 고요함이 새벽의 활기로 빠르게 깨어나는 순간이었다. 새벽은 언제나 묘한 긴장감을 안고 찾아온다. 겨울이라면 그 감각은 한층 더 선명하다.


차를 세우고 주위를 둘러보니, 멀리서 손을 흔드는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원재였다. 단정히 눌러쓴 모자와 성급하게 움직이는 손짓까지, 여전히 변함없는 모습이었다. "빨리 와, 늦겠다." 그의 목소리는 차가운 새벽 공기를 타고 선명하게 들려왔다. 나는 가벼운 손짓으로 답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병태는 역시 보이지 않았다. 그는 늘 그랬다. 전날 밤늦게까지 깨어 있었거나, 이불속에서 알람 소리를 무시하며 더 자고 있을 것이다. 병태를 떠올리자 쓴웃음이 났다. 원재와 병태, 두 사람은 내게 언제나 같은 모습으로 다가온다. 한 사람은 늘 부지런히 앞서 움직이고, 다른 한 사람은 느긋하게 뒤늦게 나타난다. 그런 둘의 모습은 변함없이 나를 위로하면서도, 동시에 어딘가 불편하게 느껴진다. 어쩌면, 내가 변했기에 가능한 감정일지도 모른다.




나는 가끔 원재에게 "넌 정말 하나도 안 변한다"며 웃어넘기곤 한다. 병태에게는 "너도 마찬가지야. 왜 그렇게 안 변하니?"라고 장난스럽게 핀잔을 주기도 한다. 그런데도 사실, 그들이 변하지 않는 게 오히려 다행이라고 느낀다. 변함없는 그들의 모습 속에서 나는 나 자신의 변화와 성장의 흔적을 발견한다. 그들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나와 함께하지만, 나는 그들과 시간을 공유하며 조금씩 다른 사람이 되어 가고 있다.


우리는 선착장을 따라 걸었다. 겨울 새벽의 공기는 뺨을 스치며 날카롭게 파고들었고, 사람들은 모두 같은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늘 가장자리에는 희미한 주황빛이 서서히 번지고 있었다. 문득 뒤를 돌아봤다. 병태는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오늘도 끝내 나타나지 않을까, 아니면 마지막 순간에 웃으며 모습을 드러낼까? 잠시 생각에 잠겼지만, 곧 시선을 다시 하늘로 돌렸다.


그 순간 깨달았다. 변하지 않는 것과 변하는 것은 언제나 함께 존재한다는 것을. 변함없는 원재와 병태의 모습 속에서 나는 내 안의 변화와 성장을 발견한다. 우리는 같은 풍경을 바라보며 각자의 속도로 걸어가고 있다. 그 길은 때로 멀어지는 듯해도 결국 다시 교차한다. 그래서 나는 안다. 우리의 계절이 달라져도, 함께하는 시간은 늘 같은 하늘 아래에서 이어진다는 것을.


넷.

모두가 모이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병태는 어김없이 늦었고, 원재는 그런 병태를 기다리며 특유의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다 왔어." 병태의 뻔한 핑계가 휴대폰 너머로 들려왔다. 예상했던 답이었지만, 원재는 그저 한숨을 쉬며 전화를 끊었다. 마침내 병태가 도착했지만, 그는 천천히 몸을 풀며 이른 새벽의 추위를 탓하듯 불평을 늘어놓았다. 원재는 그런 병태를 바라보며 기가 차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렇게 우리는 마침내 선착장에 모였다.


겨울 새벽의 공기는 차갑고 날카로웠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어수선했던 분위기는 서서히 가라앉았다. 사람들의 발소리와 낮은 대화는 점점 잦아들었고, 대신 고요가 자리 잡았다. 바다 너머 떠오를 해를 기다리는 긴 정적 속에서, 우리는 각자의 마음으로 이 순간을 맞이하고 있었다.


해가 떠오르기 직전까지 사람들은 좀처럼 조용해지지 않았다. 누군가는 삼각대를 설치하고, 누군가는 스마트폰으로 각도를 조정하며 분주했다. 하지만 태양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약속이라도 한 듯 모든 소리가 멈췄다. 이른 새벽의 부산스러움은 순식간에 고요로 바뀌었다. 가끔 들리는 스마트폰 셔터음만이 그 정적을 가늘게 흔들었다. 마치 떠오르는 태양을 맞이한 것은 사람들이 아니라 정적 자체인 듯했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 퍼지는 태양빛이 천천히 바다와 주변을 물들였다. 나는 숨을 죽이고 서서히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았다. 점점 강렬해지는 빛을 보며, 자연의 경이로움 앞에서 내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그 순간, 내 마음은 경이로움과 평온함 사이 어딘가를 떠돌고 있었다. 웅장한 자연의 광경은 아무 말 없이 내게 스며들었고, 익숙한 사람들과 함께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 깊숙이 따스하게 퍼졌다. 병태와 원재가 옆에 있다는 것이 새삼 소중하게 느껴졌다. 사람도, 풍경도 변함없는 듯 보였지만, 그 안에서 나는 어느새 조금씩 변해 가고 있었다. 떠오르는 태양은 모든 것을 똑같이 비추고 있었지만, 그 빛 속에서 내 마음은 더 단단해지고 있었다. 우리가 함께 나누는 이 풍경이,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귀한지 실감하며 자연스레 감사의 마음이 차올랐다.


해는 서서히 하늘로 올라갔다. 황금빛으로 물든 바다는 고요 속에 잠겼고, 내 마음에도 잔잔한 깨달음이 스며들었다. 어쩌면, 현재라는 시간은 과거와 미래를 잇는 다리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다리를 건너는 힘은 결국 일상의 소중함에서 오는 게 아닐까. 그 순간의 평온과 다짐은 조용히 나를 앞으로 이끌고 있었다.


다섯.

해가 뜨면서 모든 것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어둑어둑한 새벽에는 타인을 목소리로만 구별했다. 누가 어디에 있는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모두 소리로만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태양이 떠오르자 목소리만으로 감지했던 존재들이 얼굴을 드러냈다. 희미했던 윤곽은 점점 뚜렷해졌고, 그들이 나와 같은 곳에서 같은 풍경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와닿았다. 어둠 속에서는 모두가 같아 보였지만, 빛 속에서는 각자의 얼굴이 분명히 드러났다. 그러나 그 얼굴들에 담긴 빛은 다르지 않았다. 서로의 해를 품은 얼굴을 마주 보며 나와 네가 다르지 않음을 조용히 깨달았다.


바로 옆에서 얼굴이 점점 드러나던 친구가 문득 물었다. "올해 꼭 하고 싶은 거 있어?" 뜻밖의 질문에 잠시 멈칫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특별히 목표를 세운 것도 없고, 계획한 것도 없었다. 적당한 말을 찾으려 머뭇거리다가, 결국 나도 예상치 못한 대답이 튀어나왔다.


"잠이나 푹 잤으면 좋겠어."


말을 뱉고 나니 나조차 놀랐다. 내 안에 그런 바람이 자리 잡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친구는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건 참 좋은 계획인데." 그 말은 농담처럼 들렸지만, 어딘가 진심이 묻어 있었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작게 웃었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마음속 깊은 곳에서 작은 해방감 같은 것이 피어올랐다. 어쩌면 내게 정말 필요한 건 거창한 계획이나 목표가 아니라, 진정으로 쉴 수 있는 시간과 그 안에서의 평온함일지도 모른다.




이때 병태가 입을 열었다. "사실 나도 그런 시간이 필요해. 요즘 너무 바쁘게 살고 있는 것 같아." 뜻밖에도 병태는 내 대답에 깊이 공감하고 있었다. 늘 늦는 병태는 게으르다는 말을 자주 들었지만, 어쩌면 그것은 그의 피로가 겉으로 드러난 모습이었을 것이다. 원재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생각해 보니, 우리 모두 그런 게 필요하지 않을까? 나도 쉬는 법을 좀 배워야겠어." 그 순간 우리는 공감의 선 위에 나란히 서 있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한 질문은 결국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답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수평선을 딛고 떠오른 태양은 어느덧 하늘 한가운데로 향하고 있었다. 오렌지빛으로 물든 하늘은 점점 더 밝아지며 찬란한 빛을 뿜어냈다. 우리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말없이 그 빛을 받아들였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 우리가 함께 바라보는 이 풍경이 그 자체로 충분히 중요한 답일지도 모른다. 무엇을 계획하든, 무엇을 이루든, 결국 이 순간을 느끼고, 그 안에서 함께하는 것이 가장 큰 의미일 테니까.


태양은 모든 것을 똑같이 비추고 있었다. 각자의 얼굴에 스며든 빛은 우리 모두가 같은 존재임을 조용히 일깨워 주었다. 그 빛 속에서 우리는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리고 함께하는 지금이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지는지 깨달았다. 태양은 하루를 열어 주었고, 그 빛은 앞으로의 길을 비추고 있었다. 어쩌면 삶도 이런 순간들의 연속일지 모른다. 서로의 빛을 나누며, 함께 걸어가는 평범하지만 소중한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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