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과학자’라는 단어는 내게 가장 강렬한 이미지를 남겼다. 텔레비전 속 과학자들은 손끝에서 기적을 만들어내는 마법사 같았다. 그들은 로봇을 순식간에 만들어냈다. 불가능 같던 기계를 움직이고, 불우한 과거를 가진 주인공에게 멋진 무기와 충직한 동료를 만들어주는 만화 속 박사들은 모두 과학자였다. 그들의 흰 가운은 어린 나에게 영웅의 망토처럼 보였다. 어른들이 물었다. “커서 뭐가 되고 싶니?” 나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과학자요!” 그 대답에는 설렘과 확신이 담겨 있었다. 내게 과학자는 단순한 직업이 아니었다. 그들은 세상을 구하고, 상상 속 모든 가능성을 현실로 바꾸는 존재였다.
물론, 내가 꿈꾸던 과학자는 대부분 상상 속에서 태어난 인물이었다. 드라마와 만화, 영화 속에서 그들은 천재적이었고, 종종 엉뚱한 행동으로 주위를 놀라게 했다. 때로는 주인공의 곁에서, 때로는 홀로 악당의 음모를 막으며 세상을 구했다. 그들이 만들어낸 기계와 발명품은 도구 이상의 것이었다. 그것은 절망의 끝에서 희망의 불씨를 피우는 힘이었다. 어린 나에게 과학자가 된다는 건 곧 세상을 구하는 영웅이 되는 일이었다. 나는 그들의 세계를 동경하며 내 미래를 그렸다. 하지만 수학과 과학이 얼마나 어려운 길인지 알게 된 건 훨씬 나중이었다.
시간이 지나 어른이 된 지금, 과학자가 세상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그 본질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됐다. 그들은 상상 속 마법사가 아니라, 끊임없는 탐구와 노력으로 인류의 미래를 열어가는 현실의 개척자였다. 질병을 연구하고, 환경 위기를 해결하며, 우주의 신비를 탐구하는 그들의 손길은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바꾼다. 어린 시절 과학자들에게 품었던 동경은 지금도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반짝이고 있다. 현실에서 마주한 과학자들은 상상 속 박사들만큼이나 멋지고 위대하다. 과학자라는 단어는 내게 여전히 희망과 가능성의 상징이다.
어린 시절, 나는 과학자가 되어 세상을 구하겠다고 굳게 마음먹었다. 로봇을 만들고, 상상을 현실로 바꾸며, 모두를 놀라게 할 거라 믿었다. 하지만 화려한 발명과 세상을 뒤흔드는 기적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며 세상이 그렇게 단순하지도, 내가 그리 특별하지도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현실의 무게 속에서, 내 꿈은 천천히 다른 길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과학자의 꿈은 이뤄지지 않았지만, 공학은 내게 현실 속에서 가능성을 만들어가는 또 다른 길을 열어주었다. 과학이 원리를 탐구하는 학문이라면, 공학은 그 원리를 현실로 구현하는 학문이었다. 전자공학을 전공하며, 나는 이론을 탐구하기보다는 설계하고 결과를 만들어내는 데 집중해야 했다. 흰 가운을 입고 실험실에서 연구하는 과학자 대신, 나는 현실에서 기계를 설계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기술자가 되었다.
전자공학과 학위를 마친 뒤, 나는 LCD 모듈 개발 회사에 입사했다. 작은 디스플레이 하나가 스마트폰과 TV를 통해 사람들의 소통과 생활 방식을 어떻게 혁신하는지 직접 경험했다. 하지만 그곳은 치열한 현실과 끊임없는 도전의 연속이었다. 실수는 곧 비용으로 이어졌고, 모든 결정은 마감의 압박 속에서 이루어졌다. 5년 뒤, 나는 의료 영상 처리 개발로 분야를 옮겼다. 이번에는 내가 하는 일이 더 분명한 가치를 지닌다고 느꼈다. 내가 만든 기술이 누군가의 생명을 구하거나 삶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은 내 일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했다. 어린 시절 꿈꿨던 과학자는 아니었지만, 내가 걷는 길 역시 누군가의 삶에 기여하는 길임을 알게 됐다. 과학에서 공학으로, 환상에서 현실로. 꿈은 변했지만, 본질은 그대로였다. 나는 여전히 그 길 위에서 나만의 의미를 찾아가고 있다. 세상을 조금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한때 나는 독서가 학식 있는 사람들만의 일이라고 여겼다. 책은 세상을 바꿀 대단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읽는 것이라 생각했다. 내 평범한 일상과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런 내 생각을 흔드는 사건이 찾아왔다. 그것은 천문학자 칼 세이건이 쓴 한 권의 책이었다. 그 책은 내게 과학이란 이름의 우주를 열어주었다. 어린 시절 나는 과학자가 되는 꿈을 꿨다. 하지만 그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나는 평범한 삶 속에서 그 꿈의 잔상을 떠올리며 살아갔다. 그런 내가 과학자가 쓴 책을 읽으며 감명받고 있다는 현실은 조금 씁쓸하기도 했다. 이루지 못한 꿈을 간접적으로 붙잡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 책은 꿈에 대한 아쉬움을 넘어 더 큰 깨달음을 남겼다. 칼 세이건의 글은 마치 그의 눈으로 광활한 우주를 처음 마주하는 듯한 경이와 설렘을 느끼게 했다. 과학자의 손끝에서 탄생한 문장들은 별처럼 반짝이는 통찰과 호기심으로 가득했다. 나는 책장을 넘기며 과학이 단순한 학문이 아니라 인간의 질문과 상상의 총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책은 내 반복되는 일상을 깨뜨리고 새로운 시선을 열어주었다. 독서는 특별한 사람들만의 일이 아니었다. 칼 세이건의 책은 내가 가진 편견과 무지를 무너뜨렸고, 그 순간, 독서는 나에게 열린 세상의 문이 되었다.
돌이켜보면, 그 책이 내게 준 울림은 단순한 감동에 머물지 않았다. 그것은 내 안에 잠들어 있던 무언가를 깨웠고, 나를 움직이게 했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읽고, 나는 처음으로 내 생각을 글로 풀어보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를 느꼈다. 결국, 용기를 내어 브런치에 첫 글을 올렸다. 그 글은 ⟪코스모스⟫에 대한 짧은 서평이었다. 그저 책을 읽는 데 머물던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글쓰기는 평범한 독자로 시작한 내게 세상을 더 깊이 들여다보는 방법이자, 나만의 목소리를 찾는 과정이 되었다.
처음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그 일은 낯설고 두려웠다. 내 서툰 문장들이 누군가에게 어떻게 비칠지조차 알 수 없었다. 내 글을 누군가 읽어줄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독서가 책장을 넘기며 새로운 세상을 열어줬듯, 글쓰기는 내 손끝에서 또 다른 길을 만들어줬다. 한 편씩 글을 쓰다 보니 브런치 작가가 되었고, 글쓰기는 내 삶의 한가운데로 들어왔다. 글을 쓰는 기쁨은 어느새 내 삶에 깊이 뿌리내렸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나는 새로운 목표를 품게 됐다. 바로 ‘저자’가 되고 싶다는 꿈이었다. 그 꿈은 내 안에 잠들어 있던 열정을 깨웠고, 마침내 한 권의 책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해서 내 첫 책 ⟪비교리즘⟫이 세상에 나왔다. 독서는 내게 세상의 문을 열어줬고, 글쓰기는 그 세상에 내 목소리를 새기는 방법을 알려줬다. 이제 나는 읽고 쓰는 즐거움 속에서 또 다른 꿈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2021년 11월 26일 금요일 새벽, 나는 <또 다른 나를 찾아서>라는 제목으로 첫 글을 올렸다. 지금 보면 유치한 제목이지만, 그 순간 나는 진지했다. 그 글과 함께 나는 ‘브런치 작가’라는 이름을 얻게 됐다. 그날 밤, 쓸쓸한 비와 찬 바람이 겨울의 문턱을 알리고 있었다. 글을 올리던 내 손끝에는 설렘과 두려움이 교차하고 있었다.
그 무렵 나는 책 읽는 재미를 처음으로 깨닫고, 그 세계에 흠뻑 빠져 있던 초보 독서가였다. 책을 읽을수록 그 안에 담긴 세계가 얼마나 다채롭고 깊은지 새삼 깨닫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내가 읽은 책에 대해 느낀 감정과 생각을 글로 남기고 싶다는 마음이 차츰 커져갔다. 우연히 알게 된 ‘브런치’라는 플랫폼은 매력적이었지만, 글을 쓰기 위해 일정한 승인 절차를 거쳐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주저했다. 내 글이 과연 그 기준을 통과할 수 있을까? 글을 써본 적도 없던 내가 어딘가에 인정받는 일은 상상조차 어려웠다. 막연한 두려움과 스스로에 대한 의심이 나를 가로막았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두려움을 뒤로하고 나는 브런치 작가 신청을 했다. 왜 갑자기 그런 용기가 났는지 나 자신도 잘 모르겠다. 아마 글을 써보고 싶다는 마음이 내 안에서 더 이상 묻어둘 수 없을 만큼 커졌던 게 아닐까? 어쩌면 책을 읽으며 새롭게 열렸던 그 세계에 나도 목소리를 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스치듯 지나쳤던 브런치는 어느새 내 삶에 작지만 분명한 변화를 일으켰다. 책 속에서 찾은 또 다른 세상을 내 글로 표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브런치 작가는 그렇게 탄생했다. 그날 새벽, 처음으로 내가 쓴 글이 세상 밖으로 나아가는 순간을 마주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글쓰기는 내 안에 잠들어 있던 또 다른 세계를 조용히 깨워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