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 가능한 속도

목적지와 풍경

by COSM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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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석에 앉아 습관처럼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입력한다. '목적지까지 최단 경로를 안내합니다.' 기계적인 음성과 함께 화면에는 파란색 선이 그어지고, 남은 시간과 거리가 표시된다. 128km, 1시간 40분. 이제부터 나에게 주어진 미션은 단 하나다. 저 숫자를 '0'으로 만드는 것.


고속도로에 진입해 가속 페달을 밟는다. 앞차와의 거리를 계산하고, 칼같이 차선을 바꾸고, 과속 단속 카메라 앞에서만 브레이크를 밟는다. 내 신경은 온통 '도착 예정 시간'을 1분이라도 줄이는 데 집중되어 있다. 도로 위에서 마주치는 모든 차는 내 앞길을 막는 장애물이고, 신호등은 시스템 오류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내비게이션은 "안내를 종료합니다"라는 말과 함께 꺼진다.


그런데 이상하다. 1시간 40분 동안 나는 분명히 깨어 있었고 운전대를 잡고 있었는데, 기억에 남는 장면이 단 하나도 없다. 터널을 몇 개 지났는지, 길가에 어떤 꽃이 피어 있었는지, 오늘 하늘의 구름 모양이 어땠는지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나는 마치 순간 이동을 한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다. 분명 몸은 이동했지만, 내 영혼은 압축 파일처럼 전송되었을 뿐 풀리지 않은 기분이다.


우리는 삶을 이런 식으로 운전한다. 대학 입학이라는 목적지, 취업이라는 목적지, 승진, 결혼, 내 집 마련이라는 깃발을 꽂기 위해 달린다. 그 사이의 시간, 즉 공부하고 일하고 사랑하고 저축하는 그 숱한 과정들은 단지 목적지로 가기 위해 견뎌야 하는 '비용'이나 '대기 시간'으로 취급된다. 우리는 빨리 감기 버튼을 누르듯 과정을 삭제하고 결과에만 도달하려 한다. 과정이 길어지면 "지루하다"고 말하고, 정체가 생기면 "망했다"고 말한다. (그렇게 빨리 가서 뭘 하려고? 또 다음 목적지를 찍겠지. 쳇바퀴를 더 빨리 돌린다고 쳇바퀴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목적지와 풍경은 둘 다 '길 위'에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가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그 길은 지루한 '이동'이 되기도 하고, 찬란한 '여행'이 되기도 한다. 이것은 속도의 문제가 아니라 시선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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