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꼬리표와 이름

by COSM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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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골슈타트의 음습한 실험실, 썩은 시체들을 꿰맨 육신에 전류가 흐르고 노란 눈동자가 처음 뜬 순간을 상상해 본다. 창조주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이 만든 피조물을 보자마자 공포에 질려 도망쳤다. 갓 태어난 거대한 생명체는 차가운 바닥에 홀로 남겨졌다. 그에게는 따뜻한 담요도, 젖을 물려줄 어머니도, 그리고 자신을 불러줄 이름도 없었다.


메리 셸리의 소설 프랑켄슈타인에서 가장 가슴 아픈 장면은 살인이나 추격전이 아니다. 흉측한 외모 탓에 인간 세상에서 쫓겨난 괴물. 그가 숲 속 오두막의 작은 틈으로 가난한 가족을 훔쳐보는 대목이다. 그는 그들이 서로를 부르는 소리를 들으며 언어를 배운다. 불, 우유, 빵 같은 사물의 이름을 익히고, 나아가 아버지, 동생, 사랑 같은 관계의 언어를 깨우친다. 하지만 언어를 배우면 배울수록 그는 절망했다. 세상 모든 존재에는 저마다의 호칭이 있는데, 정작 자기 자신을 지칭할 단어는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이다.


소설이 끝날 때까지 아무도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창조주인 빅터조차 그를 악마, 흉물, 그것, 비참한 존재라고 불렀다. 심지어 오늘날의 독자들조차 그를 프랑켄슈타인이라고 착각해서 부른다. (나도 어릴 때 그랬다. 부끄럽지만.) 프랑켄슈타인은 그를 만든 과학자의 성이지 그의 이름이 아니다. 태어난 순간부터 죽어 사라지는 순간까지, 그는 철저하게 이름 없는 존재였다.


엔지니어의 관점에서 볼 때, 이 비극의 원인은 생명 창조라는 기술적 실험의 실패가 아니다. 그것은 데이터베이스의 등록 실패다. 시스템에 새로운 데이터를 입력했으면 고유한 식별자를 부여해야 하는데, 관리자는 그 과정을 생략하고 방치했다. 이름이 없다는 것은 세상이라는 거대한 네트워크에 접속할 권한이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괴물은 끊임없이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 대답해 줄 창조주가 도망쳐버린 세상에서, 이 질문은 끔찍한 파괴의 알고리즘으로 변질되고 만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단순한 공포 소설로 읽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관계 맺기에 실패한 한 엔지니어의 처절한 직무 유기 보고서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 또한 타인을 마주할 때 빅터와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봐야 한다. 상대를 고유한 존재로 인식하는 대신, 납작한 꼬리표를 붙여 손쉽게 처리하고 있지는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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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를 다루는 엔지니어링 세계에는 태그, 혹은 라벨이라는 개념이 있다. 수만 개의 데이터를 일일이 확인하기 귀찮을 때, 우리는 그것들을 묶어서 분류한다. 예를 들어 스팸 메일, 시스템 오류, 휴지통 같은 식이다. 이렇게 꼬리표를 붙이면 개별 데이터의 내용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된다. 스팸이라는 꼬리표가 붙은 메일은 읽히지도 않고 삭제된다. 꼬리표는 대상을 이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대상을 빠르고 효율적으로 처리하기 위해 존재한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이 자신의 피조물에게 저지른 폭력이 바로 이것이다. 그는 피조물의 내면을 들여다보려 하지 않았다. 그가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간절하게 대화를 원하는지 알려고 하지 않았다. 대신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을 택했다. 바로 괴물이라는 꼬리표를 붙이는 것이다. 상대를 괴물로 규정하는 순간, 복잡한 윤리적 고민은 사라진다. 괴물은 대화의 대상이 아니라 제거의 대상일 뿐이니까. 그는 꼬리표 뒤에 숨어 자신의 혐오를 정당화했고, 창조주로서의 책임을 회피했다.


현실의 우리도 별반 다르지 않다. 우리는 낯선 타인을 마주할 때 그 사람의 고유한 이야기를 듣기보다는, 익숙한 꼬리표를 찾아 붙이기에 급급하다. 설명충, 꼰대, 진지충 같은 단어들이 난무한다. MZ세대라는 단어 하나로 수천만 명의 청년을 퉁치고, 맘충이라는 끔찍한 단어로 누군가의 어머니를 모욕한다. (나도 MZ인지 아닌지 헷갈린다.) 직장에서는 김 대리, 박 과장이라는 직급으로 사람을 부르고, 식당에서는 저기요, 이모님이라는 기능적 호칭으로 사람을 부른다.


꼬리표는 효율적이다. 상대를 깊이 알 필요 없이 내 편과 네 편을 가를 수 있게 해 준다. 나와 다른 생각, 나와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을 이해하느라 에너지를 쓸 필요가 없다. 그저 저 사람은 원래 저래라고 분류해 버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이 효율성에는 치명적인 대가가 따른다. 꼬리표가 붙는 순간, 고유성이 지워진다. 그 사람도 누군가의 귀한 자식이고, 밤마다 미래를 고민하며, 주말에는 떡볶이를 좋아하는 입체적인 존재라는 사실이 사라진다.


빅터가 피조물을 악마라고 불렀을 때, 피조물은 정말로 악마가 되었다. 사람들에게 혐오의 눈빛을 받고 돌팔매질을 당하면서, 순수했던 그의 영혼은 증오로 물들었다. 나는 본래 선하게 태어났다, 그러나 불행이 나를 악마로 만들었다는 그의 절규는 꼬리표가 가진 자기실현적 예언의 힘을 보여준다. 우리가 타인을 괴물이라 부르고 배척한다면, 타인은 결국 우리에게 진짜 괴물이 되어 이빨을 드러낼 것이다. 분류는 관리자의 편의를 위한 것일 뿐, 결코 관계를 위한 도구가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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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이름은 데이터베이스의 고유 식별자와 같다. 수억 개의 데이터가 있어도 식별자는 오직 하나뿐이다.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유일한 주소, 그것이 바로 이름이다.


우리가 누군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 사람을 덩어리가 아닌 하나의 우주로 인식하겠다는 선언이다. 김춘수 시인의 시 꽃에 나오는 구절처럼,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된다. 엔지니어링 용어로 말하자면, 이것은 메모리의 특정 주소에 포인터를 연결하는 작업이다. (비전공자에겐 미안하지만, 이보다 정확한 비유를 못 찾겠다.) 이름을 부르는 순간, 나의 뇌 한구석에 그 사람만을 위한 전용 공간이 할당된다. 그때부터 그는 지나가는 행인 1이 아니라, 내 삶에 의미 있는 데이터를 주고받는 연결된 노드가 된다.


소설 속 괴물이 그토록 원했던 것은 아름다운 외모나 강력한 힘이 아니었다. 그는 단지 누군가 자신의 눈을 바라보고 말을 걸어주기를, 자신을 하나의 존재로 인정해 주기를 원했다. 만약 빅터가 도망치지 않고 그에게 아담 같은 이름을 지어주었다면 어땠을까. 밥은 먹었니, 오늘은 춥지 않니라고 물으며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다면, 이 소설은 호러가 아니라 아름다운 성장 드라마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름에는 힘이 있다. 병원에서 환자 302호라고 불릴 때 우리는 무력한 고기 덩어리가 되지만, 의사가 환자분의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라고 묻고 이름을 불러줄 때 우리는 존엄을 가진 인간으로 돌아온다. 학교에서 야, 너라고 불릴 때 아이들은 반항하지만, 선생님이 다정한 목소리로 이름을 불러줄 때 아이들은 마음을 연다. 이름은 존재의 집이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 집의 초인종을 누르고, 당신을 존중합니다라는 신호를 보내는 가장 정중한 노크다.


이순신 장군이 부하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기억했다는 일화나, 칭기즈칸이 병사들과 같은 털가죽 위에서 자며 이름을 불렀다는 이야기는 리더십의 본질을 보여준다. 위대한 리더는 사람을 기능으로 보지 않고 고유한 이름으로 기억한다. 시스템의 부속품이 아니라 대체 불가능한 존재로 대우할 때, 사람은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 그 믿음에 보답한다.


진정한 관계는 꼬리표를 떼는 것에서 시작한다. 선입견이라는 포장지를 뜯어내고, 그 안에 있는 진짜 알맹이를 마주해야 한다. 그것은 귀찮고 오래 걸리는 일이다. 꼬리표 하나면 1초 만에 판단할 수 있는 것을, 이름을 묻고 이야기를 듣는 데는 몇 시간, 며칠이 걸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비효율을 감수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인간에게 보일 수 있는 최고의 예의다. 빅터는 그 시간을 견디지 못해 괴물을 만들었고, 우리는 그 시간을 견뎌냄으로써 친구와 연인, 그리고 가족을 만든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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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터 프랑켄슈타인은 천재적인 과학자였지만, 실패한 인간이었다. 그는 죽은 자의 뼈와 살을 이어 붙여 생명을 만드는 기술은 있었지만, 그 생명을 감당하고 관계를 맺는 윤리는 없었다. 그는 기능은 창조했으나 존재는 창조하지 못했다.


이 비극적인 소설이 20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의 가슴을 울리는 이유는, 우리 안에도 빅터와 괴물이 동시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타인에게 끊임없이 꼬리표를 붙이며 빅터처럼 행동한다. 저 사람은 흙수저야, 저 사람은 좌파야 혹은 우파야, 저 사람은 아웃사이더야. 그렇게 타인을 난도질하고 분류하면서 우리는 안심한다. 내가 그들을 통제하고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괴물이다. 늦은 밤, 이불 속에 들어가면 누군가 나의 직업, 나의 학교, 나의 연봉 같은 꼬리표를 다 떼어내고, 있는 그대로의 내 이름을 불러주기를 간절히 원한다. 겉모습이 번듯하든 초라하든 상관없이, 내 안의 외로움과 슬픔까지 알아주는 단 한 사람을 기다린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빅터이면서, 동시에 누군가의 괴물인 셈이다.


나부터 돌아본다.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에게 고맙습니다 한마디 건넨 게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택배 기사의 이름을 물어본 적도 없다. 그들에게도 퇴근 후 불리는 소중한 이름이 있고, 그들만의 역사가 있다. 부끄럽다.


상대를 괴물로 만드는 건 그의 흉측한 상처나 서툰 말투가 아니다. 그를 괴물이라고 부르는 우리의 차가운 시선과 무심한 꼬리표다. 비극을 막는 유일한 방법은 간단하다. 지금 당장 마음속에 붙여둔 꼬리표를 떼어내고, 상대방에게 다가가 묻는 것이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그 짧은 질문 하나가 닫힌 회로를 연결하고, 끊어진 관계의 전원을 켠다. 잉골슈타트의 괴물이 그토록 듣고 싶어 했던 그 한마디가, 지금 당신 곁에 있는 누군가에게도 절실하게 필요할지 모른다. 서로의 이름을 불러줄 때, 우리는 비로소 데이터베이스의 차가운 숫자가 아니라 따뜻한 온기를 가진 사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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