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하는 인간

키워드와 프롬프트

by COSM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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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월, 서울 테헤란로의 한 마케팅 대행사 대회의실. 무거운 침묵만이 감돌고 있는 이곳의 공기는 서늘하다 못해 날카롭다. 상석에는 업계에서 '살아있는 전설'로 불리는 50대 임원, 김 전무가 앉아 있다. 그는 지난 30년간 수백 개의 브랜드를 성공시켰고, 그의 머릿속에는 마케팅학 원론부터 최신 트렌드까지 없는 게 없다고 소문이다. 그 옆에는 입사한 지 갓 3개월 된 신입 사원, 이 사원이 노트북 하나를 펼쳐두고 앉아 있다.


회의 주제는 'Z세대를 타깃으로 한 비건 화장품 론칭 전략'. 과거의 풍경은 뻔했다. 김 전무가 자신의 경험칙을 바탕으로 장광설을 늘어놓는다. "내가 90년대에 화장품 론칭할 때는 말이야..." 라떼는 말이야로 시작된 이야기는 업계의 비화와 본인의 무용담을 거쳐 "그러니까 핵심은 진정성이야"라는 모호한 결론으로 끝난다. 직원들은 그 추상적인 말을 받아 적느라 바쁘고, 그 지식이 곧 권력이었다.


하지만 오늘 풍경은 기이하다. 김 전무가 "요즘 애들이 좋아하는 힙한 친환경 키워드 좀 뽑아봐"라고 지시하자마자, 이 사원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춤을 춘다. 정확히 30초 뒤, 회의실 전면 스크린에는 전 세계 비건 화장품 시장의 3년 치 데이터 분석, 경쟁사 15곳의 약점과 리뷰 데이터 감정 분석, 그리고 이를 파고들 5가지 구체적인 킬러 콘텐츠 시안까지 일목요연하게 뜬다. 심지어 그 시안 밑에는 예상 도달률과 ROI(투자 대비 수익률) 시뮬레이션 결과까지 붙어 있다.


김 전무의 동공이 흔들린다. (나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후배가 GPT로 30분 만에 뽑아낸 기획안이 내가 일주일 붙잡고 있던 것보다 나았을 때의 그 허탈함이란.) 자신이 30년 동안 발로 뛰고 술잔을 기울이며 쌓아 올린 경험의 성벽이, 고작 입사 3개월 차 신입 사원의 프롬프트 몇 줄에 의해 단 30초 만에 함락되었기 때문이다. 김 전무가 알고 있는 지식은 이미 인공지능이 0.1초 만에 찾아낼 수 있는 '데이터'에 불과했다. 이 사원은 마케팅을 전공하지도 않았다. 그는 단지 인공지능에게 "어떻게 질문해야 원하는 답이 나오는지"를 알고 있었을 뿐이다.


이것은 공포 영화가 아니다. 지금 이 순간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다. 인공지능이 미국 변호사 시험을 상위 10% 성적으로 통과하고, 전문의보다 더 정확하게 폐암을 진단하는 시대다. 우리는 지금 인류 역사상 가장 급격하고 잔인한 '지식 권력의 이동'을 목격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불안해하며 묻는다. "AI가 다 해주면 인간은 이제 멍청해지는 건가요?", "이제 아이들에게 국영수를 가르칠 필요가 없나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암기해서 시험 보는 공부'는 끝났다. 그건 기계가 1억 배 더 잘한다. 하지만 '문제를 정의하고 질문하는 공부'는 이제 막 시작되었다. 20세기형 지식인이 '키워드'를 무기로 싸웠다면, 21세기형 지식인은 '프롬프트'를 무기로 싸운다. 이 도구의 변화는 단순한 기술의 진보가 아니다. 우리가 세상을 대하는 태도, 즉 '지성'의 정의가 송두리째 바뀌었다는 신호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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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지나온 '키워드의 시대'를 냉정하게 복기해 보자. 1990년대 후반, 검색 엔진의 등장은 혁명이었다. 도서관에서 먼지 쌓인 책을 뒤지던 인류는, 이제 검색창에 단어 몇 개만 넣으면 원하는 정보를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이때부터 지식인의 정의가 바뀌었다. 머릿속에 지식을 저장해 둔 사람이 아니라, '검색을 잘하는 사람'이 똑똑한 사람대접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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