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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SMO Dec 15. 2021

텔레고네이아의 완성

키르케•매들린 밀러 | 책리뷰

사회가 여자에게 허용해 준 힘보다 더 큰 힘을 가진 여성에게 주어진 단어가 마녀인데, 키르케가 바로 그것이었으며 소설 『키르케』를 통해 남성 영웅들이 당연하게 가지고 있는 능력을 여성에게도 부여하고 싶었다.


이 책의 저자 매들린 밀러가 한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는 남성 중심의 서사다. 거기서 등장하는 여신의 모습은 질투하는 헤라, 아름다운 아프로디테 정도로 소개된다. 저자는 고전학을 전공했고, 이를 바탕으로 신화를 비틀어 새로운 이야기를 써 내려간다. 오디세우스 이야기에 등장하는 마녀 키르케를 중심으로 쓴 새로운 서사이다. 실체 없이 줄거리만 전해지던 텔레고네이아를 완성했다고 할 수 있겠다.


텔레고네이아

(고대 그리스어: Τηλεγόνεια, 라틴어: Telegonia 텔레고니아)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 작품으로, 서사시권의 마지막 작품이다. 오디세우스와 키르케 사이에 태어난 아들 텔레고노스가 주인공이다. 그 줄거리는 알려져 있지만 원문은 소실되어 오늘날 전하지 않는다.


최초의 마녀라는 키르케는 '오디세우스를 사랑한 마녀'라는 수식어만으로 표현하기에는 더 많은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기본 상식으로 알고 있을 독자들에게 이 책은 익숙한 고전을 낯설게 읽는 남다른 경험을 제공하는 범상치 않은 책이다.


『오디세이아』에서 오디세우스의 귀환을 늦추는 ‘마녀’로 등장하는 키르케의 진실을 현실성 있게 재구성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고대 그리스 이전에 존재했던 신화의 세계를 현대적인 언어로 재구성했기 때문에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었다. 또한 겉모습만 페미니스트인 혐오주의자들에게 진정한 페미니즘은 무엇인지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사연 없는 무덤은 없다’라고 했다. 키르케가 자신의 보금자리인 무인도를 방문한 사내들을 돼지로 만들었던 이유는 단지 그녀가 성격이 괴팍한 ‘마녀’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녀의 탄생과 성장배경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폭력은 키르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기제로 ‘마녀’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게 된다. 키르케는 님프와 티탄 신족 중 태양의 신인 헬리오스 사이에 태어난 딸로 자신의 힘을 자각하기 전 까지는 존재감 없는 딸이었다. 인간의 목소리를 지닌 티탄 신의 딸로 태어나 별다른 능력이 없어 자존감이 낮았던 키르케. 하지만 인간 글라우코스를 사랑한 나머지 그를 신으로 변신시키게 되면서 자신도 몰랐던 약초를 다루는 능력을 깨우치게 된다.


신이 된 후 변심한 글라우코스를 질투해서 그가 결혼하려고 한 님프인 스킬라를 괴물로 변신시키게 되고 키르케의 능력이 위협이 된다는 이유로 이오이오에라는 섬에 홀로 유배된다. 제우스와 헬리오스는 그들의 존재를 두 신족 간의 전쟁의 씨앗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 키르케를 희생시킨 것이다. 섬에서 고독하게 세월을 보내다 오디세우스 일행이 찾아오고 그가 머무는 동안 사랑을 나누지만 결국 오디세우스는 고향 이타케로 떠난다. 그가 떠나고 나서야 그의 아들을 잉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아들을 낳아 키운다. 키르케의 아들이 오디세우스를 죽이게 될까 봐 두려웠던 아테나는 그녀의 아들을 헤치려 하지만 키르케의 마법으로 이룰 수가 없었고, 다 자란 키르케의 아들이 오디세우스를 찾아가게 되어 예언대로 오디세우스는 죽게 된다.


아버지를 죽였다는 자책감에 페넬로페와 그의 아들을 섬으로 데려온 키르케의 아들. 오디세우스의 복수를 위해 왔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키르케의 아들마저 아테나의 뜻에 따라 떠나고 키르케는 이렇게 살 수 없다고 결단하고 이오이오에섬을 떠난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결국 키르케가 자신이 홀로 있을 수 있어서 좋아했던 이오이오에를 떠나는 부분 이후다.



하늘에서 별자리가 어둑어둑해지고 자리를 바꾼다. 바닷속으로 추락하기 직전의 마지막 햇살처럼 신의 광휘가 내 안에서 빛을 발한다. 예전에는 신이 죽음의 반대말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 무엇보다 죽은 존재라고 생각한다. 바뀌지도 않고, 손에 쥘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키르케는 여신인 동시에 최초의 마녀다. ‘마녀’로써 행한 악행의 업보는 고스란히 키르케 그녀의 몫으로 남는다. 하지만 기존 문학에서 마녀에 대해 그려온 부정적인 인식과 다르게 그녀는 유일하게 극 중 본인이 만들어낸 문제를 스스로 마무리지으려 한다. 결국 자신의 업보를 스스로 해결하는 모습은 한편으로 끔찍하지만 그래서 더욱 감동적이다.


저자는 그 모습을 통해서 마녀라는 불가사의한 힘을 지닌 새로운 존재들이 기득권이었던 신들과 무엇이 다른가 말하고자 한건 아닐까? 누군가에게 평생의 염원일 수 있는 ‘영원’은 추악한 욕망의 결정체이기도 하다. 신도 인간도 아닌 어설픈 정체성을 포기하고 ‘자신이 바라는 나’가 되려는 그녀의 선택은 응원해주고 싶을 정도로 아름답다.


고대 그리스 문화에 관심이 많으며, 문명이 번성하기 전 인류의 이야기인 ‘신화’에 흥미를 느낀다면 매우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또한 신과 인간의 갈등을 그리는 판타지물, 기이하고 흥미로운 크리처 물을 재미있게 읽었던 독자라면 마지막 페이지까지 단숨에 읽게 될 정도로 이야기의 전개가 빠르고 흥미롭다.


키르케•매들린 밀러 | 이봄
지식/정보 : ★★☆☆☆
감동/의미 : ★★☆☆☆
재미/흥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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