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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SMO Dec 22. 2021

임진왜란의 유산

난중일기•이순신, 징비록•류성룡 | 책리뷰

난중일기


험한 소굴에 진지를 구축한 적이라 경솔히 나아가 칠 수 없음은 물론, 더구나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라고 하지 않았는가.

이번에 『난중일기』를 읽으면서 가장 좋았던 것은 임진왜란을 보다 입체적으로 이해하게 된 것이다. 사실 충무공의 난중일기를 무턱대고 끝까지 읽는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일기라는 것이 원래 개인적인 일상의 기록이다 보니 글을 쓴 당사자가 아니면 글의 내용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또한 어려운 한자와 고어의 빈번한 사용은 이해의 난이도를 더욱 가중한다. 충무공의 소중한 기록들을 글자 그대로 읽기만 한다면 아무런 감흥도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잘 읽기 위해서 관련 자료를 찾아서 추측하고 비교하고 검토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자연스레 배우게 된 것이 많았다. 주변국들과의 관계, 조선 수군의 조직체계, 이순신 주변 인물과 성장 배경, 당시 조선왕조실록의 내용 등의 종합적인 정보를 이해하고 난중일기를 읽어야 그 가치를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명언을 몸소 겪게 해 준 난중일기는 그래서 충무공의 숨결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인간 이순신


이른 아침에 세수를 하고 조용히 앉아 아내의 병세에 대해 점을 쳤다. ‘중이 환속하는 것 같다如僧還俗’는 괘를 얻어서 다시 쳤더니 ‘의심이 기쁨을 얻은 것과 같다如疑得善’는 괘를 얻었다. 아주 좋다.
일찍 길을 떠나며, 어머님 영 앞에 하직을 고하고 울며 부르짖었다. 어찌하랴, 어찌하랴. 천지간에 나와 같은 사정이 또 어디 있으랴. 어서 죽는 것만 같지 못하구나.

성웅으로 추앙받는 충무공은 영웅 이전에 한 가정의 가장이자 어머니에게 효도하는 자식이었다. 또한 성공을 꿈꾸는 성실한 공무원이었으며 수군 내에서는 부하들을 관리해야 하는 상관이었고 전쟁을 치르는 장군이기도 했다.


영의정 유성룡의 편지도 가져왔다. 위에서 밤낮으로 염려하고 애쓰는 일을 들으니, 그 강직한 마음과 그리움이 끝이 없었다.

정이 많아 친구들과 어울리기 좋아하고 이웃들의 아픔을 나눌 줄 아는 훌륭한 어른이었다. 이처럼 난중일기 곳곳에는 인간적이고 따뜻한 충무공의 모습이 담겨있다. 우리와 매우 비슷한 부분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의 업적은 더욱 위대하고 존경의 대상이 된다고 생각한다.


애국충절의 표상


이날 아침에 탐후선이 들어왔는데 아내의 병세가 매우 위중하다고 했다. 벌써 생사가 바뀌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지만 나랏일이 이에 이르렀으니 어찌 다른 일에까지 생각이 미칠 수 있으랴. 세 아들, 딸 하나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마음이 아프고 괴롭다.

충무공의 글을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애국자가 되어있다. 아마도 순수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국가에 대한 사랑과 연민에 나도 모르게 감화된 것 같다. 개인적인 고통보다는 항상 대의와 정의의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충무공의 생애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죽음마저 숭고한 성웅


9일 비. 종일 빈 정자에 홀로 앉아 있으니, 온갖 생각이 가슴에 치밀어 심란했다. 무슨 말로 형언하랴. 가슴이 막막하고 취한 듯, 꿈속인 듯, 정신이 몽롱한 게 멍청이가 된 것도 같고 미친 것 같기도 했다.

노량해전은 기나긴 7년의 침략전쟁에 종지부를 찍은 중요한 해전이지만 충무공이 전사한 안타까운 해전이기도 하다. 성웅 이순신도 평범한 우리처럼 번민했었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약속하되 “병법에 이르기를 ‘죽으려고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必死則生 必生則死’ 하였고, 또 이르되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一夫當逕 足懼千夫’는 말이 있는데, 이는 모두 오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하지만 늘 스스로 성찰하고 기록하면서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기 때문에 후손들에게 존경받고 있다. 충무공의 이러한 숭고한 정신은 전쟁의 두려움마저 임진왜란의 승리로 승화시킬 수 있었다.


이순신의 사람들


징비록


역사에 목적이 있다면 텁텁한 자부심보다는 담백한 성찰일 것이다. 징비록에서 ‘징비(懲毖)’는 ‘내가 그 잘못을 뉘우치려 경계하여 나무(懲)라고 훗날의 환난이 없도록 삼가고 조심(毖)한다(予畿懲而毖候患)’는 《시경》의 구절에서 딴 것이다.


懲 : 혼날 징, 징계할 징

1. 혼나다
2. 혼내다
3. 징계
4. 그치다
5. 혼이 나서 잘못을 뉘우치거나 고침
毖 : 삼갈 비

1. 삼가다
2. 고달프다
3. 샘이 좁은 틈새로 흘러내리는 모양
4. 잘못이 없도록 긴장함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 덮고 다시 펼치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서애 선생의 글에서 느껴지는 참담한 조선의 상황이 너무 안타까웠다. 게다가 현재 대한민국과의 소름 끼치는 유사함에 계속 책을 읽어나가기 힘들었다. 하지만 우리의 역사도 영광의 역사만 있는 것은 아님을 알기에 책을 다시 펼쳤다. 제목처럼 나무라고 조심하는 성찰의 자세로 역사를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


도요토미와 아베


읽기가 그리 편하지만은 않은 징비록을 굳이 찾아서 보게 된 이유가 있다. 얼마 전 일본 아베 정부와의 무역갈등 과정을 지켜보면서, 어떤 자세로 대응하는 것이 좋을지 해답을 찾자는 것이 목적이었다. 실제로 서애 선생의 징비록에는 유용한 답들이 있었고, 현시대에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정읍 현감 이순신(李舜臣)을 발탁,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삼았다.


역시는 역시였다. 외부세력 침략(정한론)으로 고대사에 대한 열등감 극복을 하려 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고대사에서나 있을법한 제정일치 국가를 꿈꾸는 아베와 닮아있다. 시대착오적인 두 지도자 모두 결국은 동아시아 전반에 참혹한 불행을 가져올 뿐이었다. 한편 임진왜란의 가장 피해가 컸던 조선에 진정한 적은 왜구가 아니었다. 200여 년간 유지된 평화가 가져온 안일함과 부패한 지배 세력이 조선의 최대 약점이었다.


내가 독립운동은 못했지만 불매운동은 한다!


임진왜란 초기의 추풍낙엽같이 무너지던 조선의 여건을 뒤집은 것은 항상 비주류로 취급받던 이순신과 의병들이었다. 이번에도 황당한 일본의 무역 제재에 정수로 응수한 것은 일반 시민들이었다. 역사에서 성찰을 배운 것은 우리 시민들이었고 쓸데없는 자부심으로 같은 실수를 반복한 것은 부패한 권력들이었다. 유성룡 선생이 후손들에게 징비록을 남긴 목적은 책의 제목처럼 명확하다. 똑같은 실수를 절대 하지 말라는 메시지일 것이다. 자신이 섬기는 왕이 침략국의 장수를 피해 도망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느꼈을 좌절감은 징비록이라는 위대한 유산으로 승화되었다.


2021년… 이제 대한민국은 일본뿐 아니라 주변 강대국들과의 복잡한 역학관계에 놓여있다. 일본의 경제 도발에서 비롯된 갈등과 유사한 일은 더욱 빈번할 것이라면 과연 우리는 어떤 자세와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 역사의 성찰을 통한 준비가 정답이라고 서애 선생의 징비록은 간결하지만 정확하게 대답하고 있다.


앞장섰던 수레가 뒤집혔으면 빨리 고쳐야 한다.

그런데도 고칠 생각은 않고, 왜 뒤집혔는지는 따져보지도 않고 뒤집힌 수레의 바퀴 자국을 따라가고 있다.

그러면서도 무사하기를 바라는 것은 요행만을 믿는 어리석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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