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장소, 환대』•김현경(문학과지성사, 2015)
이 책의 키워드는 사람, 장소, 그리고 환대이다.
이 세 개념은 맞물려서 서로를 지탱한다.
이 책과의 첫 만남은 필자가 좋아하는 북튜버(책을 소개하는 유튜브 제작자)의 추천 영상이었다. 『사람, 장소, 환대』라는 평범하지 않은 제목이 일단 눈에 들어왔다. '환대'라는 알 듯 말 듯 한 단어와 상대적으로 익숙한 사람과 장소라는 단어는 과연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인지 궁금했다.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짧은 책 제목을 선호하는 편이다. 게을러서 긴 제목의 책은 손이 가질 않는다. 저자인 김현경 교수는 인류학을 공부하고 프랑스 사회과학고등연구원(EHESS)에서 박사학위를 받는다. 한국으로 돌아와 2005년부터는 여러 대학에서 인류학을 가르쳤다.
"학술 논문에도 대중적인 에세이에도 속하지 않는 새로운 글쓰기 형식을 실험하고 있다."라며 글의 스펙트럼을 저자 스스로 정의한 것이 특이했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을 때 저자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편안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다. 사회과학이란 분야의 추상적인 특성(주제, 정의, 목적 등 사회과학이 다루는 요소의 관념적 특성)으로 여타의 책들보다 높은 난도를 갖는 책이다. 그렇지만 고민하고 정리하면서 읽어 나간다면 분명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저자가 책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 파악하기 위해 책 전체의 구조를 간결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책의 구조
1~3장: 사람, 장소, 환대의 개념을 정리한다.
4~5장: 형식적 평등과 실질적 불평등이 현대 사회의 갈등을 어떻게 유발하는지 설명한다.
6~7장: 절대적 환대의 필요성을 증명한다.
사람, 장소, 환대의 의미를 정의하고 세 키워드의 사회과학적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 책 전체의 흐름이다. 인간이란 자연적 사실의 문제이다. 그러나 어떤 개체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사회 안으로 들어가 성원권을 가져야 한다. 즉 사람임은 일종의 자격이며 타인의 인정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타인의 환대로 사회 안에서 장소를 갖게 되고 사람이 된다. 사람이 되면 환대의 권리(환대할 권리, 환대받을 권리)를 가진다.
구체적인 사례를 살펴보자. 불법체류자와 외국인 관광객을 비교해보면 위의 내용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어떤 불법체류자가 우리나라에 들어오려 한다면 공항의 입국 절차부터 문제가 된다. 합법적인 절차를 통해 들어오는 것이 불가능한 그는 아무에게도 환대받지 못한다. 그저 하나의 인간일 뿐 공동체가 인정하는 사람의 대우는 받지 못한다. 그러나 외국인 관광객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일정한 비용과 법적 절차를 통해 환대를 받으며, 사회 구성원들에게 인정받는 사람의 자격이 주어지고 의식주를 해결할 장소도 제공받는다. 이러한 사례는 설명을 위해 개인의 영역으로 제한한 것이지만 국가나 공동체로 범위를 넓혀도 비슷하게 상황이 전개될 것을 상상할 수 있다. 여기까지는 그럭저럭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철학적 질문으로 발전하면서 내용은 심화된다. 우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환대받는 것인가? 환대받기 때문에 사람인 것인가? 쉽지 않은 질문이다.
절대적 환대는 사회가 구성되기 위한 필수 불가결한 조건이다. 인간에게 사람의 자격을 주는 것은 절대적 환대이며, 이러한 환대의 본질은 타인(외부인)에게 장소/자리를 부여하는 행위이다. 사람의 지위가 박탈됨은(사회에서 배제되려면) 환대하는 이가 아무도 없다는 의미다. 단 한 명이라도 환대한다면 성원권은 유지될 수 있다. 사회란 그렇게 만들어진다는 것이 저자 논지의 핵심이다. 책의 마지막 두 챕터에서 저자는 환대에 집중한다. 특히 지속 가능한 사회를 위한 절대적 환대(신원을 묻지 않는 환대, 보답을 요구하지 않는 환대, 복수하지 않는 환대)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실제로 이 세 가지 환대를 우리는 모두 온전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저자가 설명한 절대적 환대 세 가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절대적 환대
신원을 묻지 않는 환대: 모든 인간은 출생과 더불어 사람이 되고, 공적 공간에서 의례적으로 평등하며, 개인 정체성 서사의 최종 편집권이 공동체가 아닌 당사자에게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보답을 요구하지 않는 환대: 우리가 벌거벗은 생명으로 이 세상에 왔고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우리를 맞이한 사람들로부터 받았다는 사실을 철저히 망각해야 한다는 의미다.
복수하지 않는 환대: 적대적인 상대방에 대해서도 환대를 지속하는 것이다. 어떤 행동을 하든 처벌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어떤 경우에도 그의 사람 자격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환대(hospitalité)의 어원 ‘오트(hôte)’는 주인과 손님을 동시에 의미한다. 베푸는 이와 받는 이를 아우르는 의미를 함께 담고 있다. 누구도 주인일 수만은 없고, 누구도 손님일 수만은 없다. 내가 사회로부터 받아들여졌듯이 우리에게 이질적인 존재 역시 수용과 포용의 기회가 필요하다. 우리를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우리가 매일매일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는 대접이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하지만 마지막 '복수를 하지 않는 환대'는 필자에게 의문점이 남았다. 나에게 해를 가한 타인까지 무조건 환대한다는 저자의 주장을 쉽게 인정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저자는 개인 차원이 아닌 국가 단위라면 문제가 조금 달라진다고 말한다. 죄인을 감옥에 수감하는 이유는 사회가 범죄를 저지른 개인에게 복수하기 위함이 아니다. 헌법에서 복수가 아닌 죄에 대한 처벌이자 교화를 목적으로 한다고 명시적으로 언급한다. 이는 결국 그 사회의 성숙도와 연결된다고 생각한다. 경제적 재분배마저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때 가능하다.
한 사람이 자기 집 문을 두드리는 모든 사람을 들어오게 하여 먹여주고 재워주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하지만 한 사회가 그 사회에 '도착한' 모든 낯선 존재들을 - 새로 태어난 아기들과 국경을 넘어온 이주자들을 - 조건 없이 환대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우리는 모두 낯선 존재로 이 세상에 도착하여, 환대를 통해 사회 안에 들어오지 않았던가?
이 책은 그냥 읽기만 하기에는 과분한 책이다. 공부가 필요하다. 자연스럽게 책 속의 문장들을 자꾸 곱씹게 되고, 그러다 문득 깨닫게 된다. ‘사람’에 대한 저자의 관심과 사랑이 매우 깊다는 것을. 설득력 있는 논거와 주요한 개념 정의에 대한 꼼꼼함에 우선 감탄하게 되고, 학자로서의 치열함과 열정이 절로 느껴진다. 책을 써 내려가면서 했을 저자의 고민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지적이고 우아한 문장이 그야말로 가득하다. 앞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사회과학이 다루는 문제를 학술 논문과 대중적 문체의 중간에서 작업했다는 점은 커다란 성과라고 생각한다. 확장성과 전문성을 두루 갖춘 책을 저술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넘침과 모자람의 경계를 절묘하게 지켰다.
사람, 장소, 환대를 연구의 대상으로 삼은 것 자체가 신선했다. 정확히 저자의 의도를 파악했는지 모르겠지만 '사람이란 서로가 인정해주는 것, 장소란 누구에게나 내줘야 하는 것, 환대란 절대적이어야 하는 것. 이러한 것들이 온전하게 이루어지는 곳이 건강한 사회다'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또 한 가지 칭찬하고 싶은 것은 주석의 풍부함이다. 주석을 잘 안 읽는 타입인데, 이 책에서는 주석을 읽으면서도 깨닫는 바가 많았다. 한마디로 명료하고 정밀한 책. 제대로 된 공부란 이런 것이며 깊이 사고함의 재미를 알려주는 책이다.
여성의 자리(환대의 문제)를 논하는 부분은 앞에서 보여주었던 저자만의 치밀한 논리 전개 보다는 독자의 감정에 호소하는 문장이 많아 아쉬웠다. 하지만 사람과 인간의 차이, 사회의 정의, 구조와 질서의 의미, 모욕과 굴욕의 차이 등 평소에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주제들을 사유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책이었다. 독서의 목적을 '사고의 지평을 확장하기 위하여'에 두고 있는 독자라면 만족할만한 책이다.
『사람, 장소, 환대』•김현경(문학과지성사, 2015)
지식/정보 : ★★★★☆
감동/의미 : ★★☆☆☆
재미/흥미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