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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SMO Feb 11. 2022

문명의 진보가 빈곤과 동행하는 이유

『진보와 빈곤』•헨리 조지(비봉출판사, 2016)

현대 문명에서 물질적 진보는 끝없이 이루어지고 있다.


문명이 발달하면서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생산력이 증가하면 인류 전체의 부는 증가하게 된다. 이러한 부가 축적되면 여유로운 소비와 풍요로운 삶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이 상식적인 추론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여유와 풍요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 여전히 존재한다. 가난 때문에 인간의 존엄을 내팽개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절대적 빈곤층은 아직도 없어지지 않았다. 이 책이 출판된 1879년의 문제가 아니다 21세기에도 유효한 이야기이다. 주기적인 경제적 공황도 문제다. 최근의 발생한 것으로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가 있다. 이는 결과적으로 세계 금융위기까지 이어졌다. 저자인 헨리 조지는 문명의 진보에도 불구하고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대공황과 극심한 빈곤이 사라지지 않는 궁극적인 원인이 무엇인지 밝혀내려고 했다.


본격적으로 이 책의 논거를 따라가기에 앞서 학창 시절의 추억을 잠시만 떠올려 보자. 생산의 3요소를 혹시 기억하는가? 1) 토지: 땅을 포함한 자연이 제공하는 모든 기회와 힘. 2) 노동: 물자를 얻기 위하여 육체적·정신적 노력을 들이는 행위.  마지막 ‘자본’은 경제학의 대가들도 이를 명확하게 정의하지 못한다. 자본의 단위를 구분하는 것이 모호하기 때문이다. 헨리 조지는 소비자의 수중에 있는 부는 자본이 아니며, 부 중에서 생산을 지원 데 배정되는 부분만이 자본이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3) 자본: 교환 과정에 있는 부. 이를 수식으로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생산물 = 토지 + 노동 + 자본


인간이 무엇인가 만들기 위해 필요한 요소를 구분한 것이다. 각각의 요소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아야 지속적인 생산이 가능하다. 토지 가치의 대가는 '지대'로, 노동의 대가는 '임금'으로, 자본의 대가는 '이자'로 돌려받는다. 결국 위의 수식은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게 된다.


생산물 = 지대 + 임금 + 이자


헨리 조지는 빈곤의 이유를 밝히는 첫 단계로 그동안 상식처럼 여겨졌던 경제적 기본 명제의 수정을 제안한다. 19세기 경제학은 애덤 스미스를 시작으로 존 스튜어트 밀에서 완성된 고전 경제학파의 세상이었다. 경제학에서 『국부론』은 성경이자 코란이었다. 이후 출현한 경제학자들은 이 책의 주석을 다는 것이 연구의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임금 기금설'은 인간의 경제활동을 설명하기 위한 기본 명제이자 공리였다. 임금 기금설이란 사회에는 임금 지불에 충당해야 할 일정액의 임금 기금이 존재하며 이것을 노동자 수로 나눈 것이 평균임금이라고 주장하는 학설이다. 간단히 말해 임금은 자본에서 나온다는 말이다. 한정된 자본에 비해 노동자의 수는 끝없이 늘어나기 때문에 임금은 노동자의 생계유지를 위한 최소한으로 줄어드는 것이 자연법칙처럼 여겨졌다.


저자는 이를 전면적으로 부정한다. 임금 기금설은 신흥개발지에 똑같이 높은 임금과 이자율 그리고 이미 발전한 지역의 똑같이 낮은 임금과 이자율을 설명하지 못한다. 임금이 높거나 낮다면 한정된 자본에 종속된 이자는 반대로 낮거나 높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임금의 출처가 자본이 아니라는 증거가 된다. 헨리 조지는 임금은 자본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노동으로 창출된 생산물에서 나온다고 주장한다. 이는 자신을 위해 하는 생산이든 남을 위해 하는 생산이든 상관없이 모든 조건에 통하는 논리이다. 자본에서 임금이 지불된다는 논리의 맹점도 여기서 찾아낼 수 있다. 노동자의 생계도 자본으로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노동을 통한 생산물로 유지된다. 자본의 기여로 노동을 시작할 수 있다는 말에서 자본은 의식주를 가능하게 하는 부의 의미이지 자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자본의 역할을 무엇인가? 자본은 산업의 형태 내지 산업의 생산성을 제약할 수 있을 뿐이다. 이는 자본은 산업을 제약한다는 말과는 아주 다르다.


맬서스의 『인구론』은 앞에서 언급한 임금 기금설과 짝을 이루어 19세기 정치경제학의 기본 전제로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맬서스 이론의 핵심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인구에 비해 생존 물자는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기 때문에 인구수는 자연의 한계에 제한될 수밖에 없다는 이론이다. 다시 말해 인구증가는 임금을 줄여 빈곤을 심화시킨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는 중력의 법칙처럼 당위에 가까운 현상일 뿐이라는 설명이다. 고전경제학을 우울한 학문이라고 불렸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헨리 조지는 정반대의 명제가 진리라고 주장한다. 인간이 죄악과 궁핍의 나락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원인은 ‘인구증가가 생존 물자를 압박’ 하기 때문이 아니다. 인도, 중국, 아일랜드의 역사적 사실이 증명하듯이 지배층, 권력층 그리고 거기에 기생했던 세력의 착취, 수탈, 폭력, 비도덕성 때문에 빈곤과 죄악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맬서스의 이론은 역사적 사실을 역행한다. 맬서스가 자신의 이론을 설명하면서 비유적으로 동물과 자연의 관계를 연관 지었으나 이것도 매우 부적절하다. 인간은 개체수 증가가 자연의 힘에 한계에 부딪쳐도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는 동물과 달리 자신의 개체가 증가함에 따라 자연에 '인적 요소'를 추가하여 이를 극복하기 때문이다. 인구 증가는 생산성의 향상으로 이어진다.


이처럼 물질적 진보와 동행하는 빈곤의 이유를 임금 기금설과 맬서스 이론을 근거로는 설명하지 못한다. 자본을 투여하거나 노동자를 줄이거나 임금을 낮추는 등의 두 이론의 기본 명제를 연역하여 도출한 빈곤 퇴치 방안들은 제대로 된 해결법이 아니다. 그럼에도 두 이론이 지지를 받고 오랜 기간 사회 전반에 걸쳐 영향력을 미칠 수 있었던 이유는 기득권 계층의 권력 유지를 위한 이론적 근거로 유용했기 때문이다. 보수세력의 양심을 지키기 위한 명분을 정확히 만족시키는 이론이었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정교한 이론으로 자리 잡은 이유도 이론적 탁월함 때문이 아니라 보수세력이 지지와 인정의 대상으로 만들어 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고 본다.


그렇다면 빈곤이 사라지지 않는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불평등한 빈곤의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생산물이 만들어지는 과정뿐 아니라 부가 어떻게 분배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생산의 3요소인 토지, 노동, 자본은 생산물을 만들어낸다.  생산물은 다시 토지는 지대로 노동은 임금으로 자본은 이자로  대가를 돌려받는다. 대가로 돌아오는   가지 요소를 분배의 법칙으로 설명할  있다. 토지의 지대는 생산성이 가장 낮은 토지에서 얻을  있는 정도를 초과하는 생산물에 의해 결정된다(지대의 ). 이자율은 자본이 자유롭게 투입될  있는 토지에서 자본에 돌아가는 대가에 의해 결정된다(이자의 법칙). 임금과 이자 간의 관계는 자본이 재생산 형태로 사용될   자본이 가지는 평균적인 증가력에 의해 결정된다. 지대가 상승하면 이자는 임금과 더불어 하락한다. , 이자는 경작의 한계에 의해 결정된다. 임금은 생산의 한계,  지대를 지불 필요 없이 개방된 자연의 최고 생산점에서 노동이 얻을  있는 생산물에 의존한다(임금의 법칙). 임금 기금설과 맬서스 이론에 근거한 19세기 정치경제학과 헨리 조지가 설명한 분배의 법칙을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정치경제학

지대는 경작의 한계에 의존하며 한계가 등락하면 반대 방향으로 등락한다.

임금은 노동자의 수와 그 고용에 쓰일 자본의 양 간의 비율에 의존한다.

이자는 자본의 수요와 공급 간의 균형에 의존한다. 또는 이윤에서처럼 임금에 의존하여 임금이 등락하면 반대 방향으로 등락한다.


헨리 조지

지대는 경작의 한계에 의존하며 한계가 등락하면 반대 방향으로 등락한다.

임금은 경작의 한계에 의존하며 한계가 등락하면 같은 방향으로 등락한다.

이자는 (그 임금과의 비율은 자본이 가지는 순 증가력에 의해 정해진다) 경작의 한계에 의존하며 한계가 등락하면 같은 방향으로 등락한다.


생산은 노동·자본·토지가 결합되어 이루어지며 노동자·자본가·토지소유자자가 생산물을 나눠 갖는다. 생산이 증가되는데도 노동자와 자본가의 몫이 줄어든다면, '토지소유자'가 대부분의 이득을 차지한다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다. 물질적 진보가 이루어져도 임금과 이자가 증가하지 않는 곳은 많지만 물질적 진보에 예외 없이 동반하는 현상이자 특징은 지대의 증가, 즉 토지 가치의 상승이다. 이로써 앞에서 제기한 문제점, 왜 기술이 발달해 문명이 진보를 이루어도 빈곤과 동반할 수밖에 없느냐는 질문에 관한 대답을 이론적으로 할 수 있게 되었다. 바로 지대 때문이다. 위에서 제시한 수식을 조금만 변경하면 훨씬 이해하기 쉬워진다.


생산(물) - 지대 = 임금 + 이자


물질적 진보에는 1) 인구의 증가 2) 기술의 개선 3) 여타 부의 생산력을 증가시키는 효과를 가진 지식, 교육, 정부, 치안, 예전, 도덕 등의 개선으로 구성된다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세 가지 요소 모두 총생산에서 임금과 이자의 비율을 낮추고 지대의 비율과 절대적 양은 증가시킨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진보의 열매는 모두 토지 소유자에게 돌아간다. 추가로 이러한 진보로 지대가 지속적으로 상승할 것으로 기대하는 심리는 '토지투기'까지 이어진다. 21세기에 세계적인 현상인 젠트리피케이션 (gentrification, 낙후된 구도심 지역이 활성화되면서 중산층 이상의 계층이 유입돼 기존의 저소득층 원주민을 대체하는 현상)을 미리 예견한 놀라운 통찰력이다.


인간은 그 무엇도 순전히 창조해 낼 수 없는 존재이다. 단지 지구의 존재하는 물질에 노동을 투입하고 자본의 도움을 받아 '변형'시킬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변형의 원재료는 토지가 된다. 이렇게 토지는 인간과 때어놓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토지를 변형된 형태의 생산물처럼 '재산'으로 취급하는 것은 부당하다. 마치 인간의 기본권을 부정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토지와 생산물은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토지소유제를 인정하는 것은 결국 노동의 노예화를 인정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토지를 소유하면 그 토지를 이용하려는 모든 인간에 대한 배타적 권리도 소유하는 것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헨리 조지는 토지의 집중과 소유화 때문에 생긴 근본 문제. 즉 물질적 진보로 총생산이 증가해도 결국 이익은 지대로 돌아가는 현상을 해결하지 않으면 근본적인 해결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없기 때문에 진정한 해결책은 토지의 공동소유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강한 반발을 예상한 저자는 효과는 똑같지만 모두가 수용할 수 있는 분배의 방법을 제안한다. 헨리 조지의 최종 해결안. 여타의 조세는 모두 철폐하고 오직 지대만을 조세로 징수한다.


토지가치 이외의 대상에 부과하는 모든 조세를 철폐하자. (To abolish all taxation save that upon land values.)


하지만 조지스트(헨리 조지의 사상을 추종하고 연구하는 학파나 인물)도 헨리 조지의 주장을 현대사회에 그대로 적용하기 어렵다는 것을 인정한다. 즉, 토지단일세를 현대화할 필요가 있으며 토지세 최우선 징수, 불로소득 우선 과세 등을 해결책으로 제시하고 있다.


헨리 조지의 사상은 세계적으로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고 정계, 학계 등에서 많은 이상주의자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우리가 알만한 조지스트로 톨스토이가 있다. 그는 인생 후반기를 조지스트로 살았다. 여러 작품에 토지와 지대 이야기가 출현하며 『부활』이 대표적이다. 헨리 조지의 연설문, 저작, 팸플릿 등을 직접 번역하여 러시아에 전파하기도 했다. 헨리 조지의 사상을 국가적으로 제도화된 나라로는 대만이 있다. 정치적 문제로 망명 중이던 쑨원(손문)은 헨리 조지의 사상을 듣고 조지스트가 되었다. 쑨원의 삼민주의 중 토지 평등 분배, 경제적 불균등 등의 개선을 의미한 민생주의는 헨리 조지의 핵심적인 토지정책과 괘를 같이 한다. 쑨원의 후계자 장제스도 이러한 토지정책 계승하고, 대만으로 도망가면서 대만 헌법에 헨리 조지 사상을 집어넣게 된다. 대만의 헌법 중에 토지에 대한 권리는 모든 국민이 평등하게 갖는다는  평균지권(平均地權)이 있다. 헨리 조지의 주장과 비슷하게 토지에서 생기는 이익을 국가가 환수해 국민이 공평하게 향유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우리나라도 정부가 부동산 투기를 막고 규제하려고 하면 주류 언론에서 헨리 조지를 소환하여 비난하기도 한다. 그를 극좌파의 수장쯤으로 오해하는 모양이다. 안타깝게도 헨리 조지는 독실한 기독교 신봉자이자 자유주의자이다. 그의 주장을 잘 들여다보면 자본주의를 자본주의답게 만들고, 시장경제를 시장 경제답게 만들자는 것뿐이다. 불로소득이 아무 제약 없이 횡행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자본주의 아니다. 시장경제가 제대로 작동하도록 불로소득을 가능한 한 차단하자는 주장이다. 실제로 2018년 기준 OECD 주요국의 보유세 실효세율을 비교해 보면 캐나다(0.87%), 영국(0.76%), 프랑스(0.55%)이며 12개국 평균도 0.37%이다. 한국은 이에 절반도 안 되는 0.16%이다.


지금까지 내가 밝히려고 노력한 진리는 쉽사리 수용되지 않을 것이다. 수용이 쉬운 진리였다면 벌써 수용되었을 것이다. 수용이 쉬운 진리였다면 은폐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진리에도 지지자는 반드시 있다. 이 진리를 위해 수고하고 고통받고 심지어는 죽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진리의 힘이다.


이 책에는 저자의 가치관, 인생관을 엿볼 수 있는 문장이 여기저기에 숨어있다. 그는 냉철한 이성과 과학을 중시했지만 따뜻한 인간애도 잊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존엄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인간을 사랑했다. 책의 후반부에서 헨리 조지는 인간 진보의 법칙은 바로 '평등 속의 어울림'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문명 진보의 법칙은 도덕 법칙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저자가 제시한 개혁은 사회와 문명의 진보에도 적용할 수 있는 진리이다. 이러한 원리는 개인의 삶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토지보유세의 원리는 결국 도덕 법칙에 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헨리 조지의 사상은 토지의 독자적인 특성을 인정하지 않고 노동과 자본만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공통성을 가진 주류와 좌파 양 진영이 20세기 경제학계의 주도권을 장악함으로써 학계에서조차 철저히 무시되어 왔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고전학파의 이론은 우울한 과학으로 불렸다. 고전학파의 논리를 따라가면 대중의 빈곤이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전반부는 고전학파의 주장을 철저하게 논박한다. 물론 헨리 조지의 해석에 대해 논리적 오류가 전혀 없는 완벽한 이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대중의 빈곤이 자연법칙과 같다는 고전파의 논리를 깨려는 그의 노력이 너무 좋았다. 복잡한 공식과 난해한 개념으로 경제학 서적을 읽으며 감동을 느끼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진보와 빈곤』을 읽으면 나도 모르게 가슴이 따뜻해진다.


책을 읽으며 내내 드는 생각은 '참 좋은 사람이 쓴 글이구나'였다. 토지와 지대라는 개념을 거울로 해서 내 모습을 비춰보는 시간이었다. 우리 마음속에는 물질적 욕망으로 가득 찬 투기꾼과 주변 사람들에게 힘이 될 수 있는 성자가 함께 공존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어떤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지 살펴보는 것은 자기 객관화의 좋은 시작점이다. 이 책은 어떤 욕망이 나를 지배하는지, 그런 욕망은 아름다운 것인지, 내 삶이 지나친 욕망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준다.


『진보와 빈곤』• 헨리 조지(비봉출판사, 2016)
지식/정보 : ★★★★☆
감동/의미 : ★★★★☆
재미/흥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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