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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SMO Jan 26. 2022

서양 문명의 기원을 만나다

『그리스인 이야기』•앙드레 보나르(책과함께, 2011)

앙드레 보나르(Andre Bonnard)

1888년 스위스 로잔에서 태어났다. 로잔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고 1936년 그르노블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15~28년 로잔 중학교와 고전 김나지움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이후 1957년까지 30년 동안 로잔 대학 그리스어·그리스 문학 교수를 지냈다. 『그리스인 이야기』(Civilisation Grecque, 전 3권)는 그가 평생을 일궈온 그리스 관련 연구 성과를 집대성한 작품이다. 1954년에 1권이 나왔으며, 1957년 2권이 출간된 후 대학에서 은퇴했다. 마지막 3권은 1959년 그가 작고하기 며칠 전에 출간되었다.


앙드레 보나르의 『그리스인 이야기』는 고대 그리스의 역사를 집약한 책이다. 필자에게 고대 그리스 역사의 시작은 바로 이 책이었다. 물론 그리스에 대한 최초의 관심은 카잔자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묘사된 크레타섬의 아름다운 모습과 지중해의 여유로운 풍광이었지만,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매력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준 것은 바로 이 책이다.


역사 서적을 저술하는 방법은 사건을 중심으로 서사를 풀어나가는 방식과 인물을 중심으로 서사를 풀어나가는 방식으로 구분할 수 있다. 여타의 다른 부류의 책도 마찬가지이지만 인물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면 감정이입도 쉽고, 글에서 친근한 느낌을 받는다는 장점이 있다.


이 책도 제목처럼 인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저자는 그리스 문명 그 자체가 아니라 사람, 즉 그리스 문명을 직접 이끌었던 고대 그리스인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문명을 일구기 위한 여정이 더욱 생동감 넘치게 그려진다. 역사적 인물에 대한 저자만의 날카로운 평가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신화의 베일에 가려진 고대 그리스 문명의 핵심을 되살려낸 고대 그리스 사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의 문학 교수라는 특별한 이력 때문에 그리스 비극에 대한 깊이 있는 해석이 가장 눈에 들어온다. 또한 '옛날에 플라톤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로 시작하는 이야기처럼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부담 없이 읽어나가다 보면 나도 모르게 그리스를 사랑하게 된다. 고대 그리스에 흥미를 불러일으키기에 완벽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총 3부작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시대별로 괄목할 만한 업적을 이룬 인물을 소개하는 방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저자는 고대 그리스 사의 시대를 다음과 같이 구분했다.


미케네 시대 : 1600-1200 B.C.

암흑시대 : 1200-800 B.C.

그리스의 부흥 : 800-600 B.C.

고전 시대 : 600-323 B.C.

헬레니즘 시대 : 323-31 B.C.



1권 호메로스에서 페리클레스까지


앙드레 보나르의 그리스 문명 강의 3부작 그 첫 번째, 그리스 문명의 태동기를 조명한다.


『일리아스』가 위대한 것은 그 때문이다. 이 위대한 시편은 아킬레우스와 헥토르라는 상반된 인간형을 통해서 인간의 고결함과 정의로움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자기 아들을 죽인 적장에게 아들의 시체를 돌려달라고 호소하는 프리아모스 그리고 자신의 애인을 죽인 인간의 아버지를 용서하는 아킬레우스, 『일리아스』는 인간의 인정과 관용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분명 아킬레우스는 매력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나도 모르게 헥토르를 응원하게 된다. 운명과 맞서는 헥토르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며 그의 감정에 몰입한다. 인간의 존엄성을 예술로 승화시켰을 때 느끼는 감동은 기원전부터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지중해의 변방이었던 마케도니아, 그리스인들은 그들을 '바르바로이'라며 경멸했지만 필립포스와 알렉산드로스의 군대에 패배하며 그리스는 그들의 식민지로 전락한다. 거대하고 위대한 제국 페르시아도 막았던 그리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라는 내부 갈등으로 스스로 무너졌다. 이후 또다시  로마의 식민지로 전락한 그리스. 트로이 전쟁의 패배에서 살아남은 로마의 선조가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식민지배로 그리스 연합군에게 복수한 것일까? 트로이의 복수는 아마 아킬레우스의 칼 끝이 헥토르를 겨누었을 때 이미 시작되었을지 모른다. 이렇게 보면 『일리아스』는 역사의 수레바퀴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런 감동적인 스토리와는 별개로, 현재는 이 서사시의 내용과는 다르게 그리스인들의 일방적인 '약탈'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과학의 발달과 트로이 왕국의 유물들이 실제로 발견되면서 역사적 사실들이 드러난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일리아스』는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경제적 풍요를 누리던 트로이 왕국을 인간들의 욕망으로 무너트린 익숙한 이야기가 된다.


그리스의 민주주의는 모든 사람들의 민주주의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노예의 희생 위에 서 있다.


아테네 민주주의의 한계는 소수를 위한 민주주의였다는 점이다(지금도 마찬가지라고 생각 하지만). 아테네의 민주주의를 선망의 대상으로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사회를 떠받치던 수많은 노예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사회가 아테네의 민주주의였다. 정작 노예들은 아무런 권리도 갖지 못했다. 노예를 위한 민주주의는 없었다. 그리스 문명도 역시 모두를 위한 민주주의는 아니었다. 소수의 지배계층만을 위한 민주주의는 언어도단이었다.


그리스 특히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노예제도 위에 존재한 민주주의, 정확히는 계급주의를 밑바탕으로 한 귀족정이었다. 아테네의 인구 구성을 보자면 아테네 시민은 4만, 외국인 2만 그리고 아이와 여성을 포함하면 약 20만 정도이고 약 30만에 가까운 노예가 있었다. 인구의 대부분(3/5)이 노예였다. 철학의 시조 격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도 이러한 반문명적인 제도에 어느 정도 수긍한 사실들이 여러 문건에 남아있다. 인종차별과는 비교되지만 계급제 혹은 노예제는 인류 문명에서 아주 오랜 시간 같이하게 된다. 불편한 진실이지만 인류에게 가장 익숙한 사회는 노예제도를 기반으로 하는 사회이다.


2권 소포클레스에서 소크라테스까지


과학의 시대, 철학의 시대, 문학의 시대였던 그리스 문명의 전성기를 다룬다.


『오이디푸스 왕』은 모든 상황에서, 심지어 운명이 자신에게 공격을 가한 상황에서조차 인간은 자신의 위대함과 위엄을 유지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많은 사람이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을 인생 영화로 꼽는다. 하지만 필자에게 영화를 보는 태도에 극적인 변화를 일으킨 작품은 박찬욱의 『올드보이』다. 맨 처음 『올드보이』를 보고 나서 기억나는 건 주인공의 벨소리뿐이었고 한동안 어떤 영화도 볼 수 없었다. 혹시 주인공 이름이 기억나는가? "오늘만 대충 수습하며 살아서 오. 대. 수." 감독의 정확한 의도는 알 수 없지만, 오이디푸스 신화를 알고 나서 필자에게 '오대수(최민식)'는 '오이디푸스'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우진(유지태)은 운명의 신탁을 내렸던 아폴론으로 보였다. 『오이디푸스 왕』과 『올드보이』의 주요 장면들이 겹쳐 보였다. 두 작품 모두 주인공은 눈과 혀를 자신에게서 떼어 냄으로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려 했다. 찾아보니 예상대로 이런 관점에서 작품을 해석한 영화 평론가가 이미 여러 명 있었다.


소포클레스와 박찬욱은 어떤 대화를 나누었던 것일까? 자유로운 지성을 존중하는 사회분위기야 말로 문명 발달의 진정한 시금석이다. 오이디푸스의 결말은 다만 끔찍하기 때문에 기억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두 눈을 멀게 하는 행위가 신에 대한 의구심에 대한 그의 대답이다. 보지 못한다는 장애는 신을 만날 수 있는 또 다른 세계로 나아가는 첫걸음이다. 인간의 의지로 신의 부조리함을 넘어설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존엄함을 위해 목숨도 내놓을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을 극복하기 위해 애쓰는 인간의 의지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다. 3000년의 시간을 건너 『오이디푸스 왕』과 『올드보이』를 보는 관객들은 각각 어떤 감정을 느꼈을지 궁금하다. 아테네 비극의 우수성은 여기에 있다.


피고 소크라테스가 주도한 논쟁에 최종 목표는 아테나이의 구원이었던 것이다.


공동체와 개인의 사회적 관계를 깊이 있게 고민한 소크라테스, 자신에게 숙명처럼 떨어진 사형선고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자신의 인생 전체를 돌이켜본다. 시대를 앞서간 현인은 역시 달랐다. 진정한 지혜는 자신이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데서 출발한다는 그의 지론대로 냉철한 이성으로 자신의 운명을 점검해나간다. 결론은 도망가지 않는 것이었다. 자신의 철학을 관철하는 것이 자신과 공동체 모두에게 이롭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악법도 법이다.’라는 천박한 명제로 소크라테스를 평가절하하던 시절이 있었다. 인류 문명의 운명을 바꾼 이 명장면은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계몽과 교육을 위해 처참하게 각색된 것이라고 추정된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엘리트 계층은 준법정신이 법치주의의 전부인 것처럼 교육하는 것이 편했다. 『크리톤』에 ‘법’ 이야기가 많이 나왔을 때 그들은 쾌재를 불렀을지도 모른다. 서양 철학 서적이 대부분 일본을 통해 도입됐다는 사실은 추정을 확신으로 바꾸는데 더 큰 도움을 준다.


소크라테스의 예언대로 아테네는 수많은 시련을 겪게 되고, 현재도 그의 ‘저주’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스파르타, 마케도니아, 로마, 오스만 제국 등 주변 강국의 끝없는 정복과 전쟁에 시달리고 식민지의 설움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아테네 시민들은 소크라테스의 진심을 결국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사형을 결정하는 순간에도 아테네의 교육자였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이 전적으로 소크라테스의 사상이라고 단언하긴 힘들다. 소크라테스는 어떠한 책도 남기지 않았고 그와 관련된 기록은 모두 플라톤이 저술한 것이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의식, 사상, 스승에 대한 존경 등 개인적인 감정이 전혀 개입되지 않았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아리스토파네스의 연극의 강렬함이 소크라테스의 사형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이다.


3권 에우리피데스에서 알렉산드로스까지


그리스 문명의 황혼기를 다룬다.


나의 분노는 나의 결심보다 강하다네.


그리스 3대 비극의 마지막 주자 에우리피데스, 『메데이아』는 그가 기원전 431년에 쓴 고대 그리스 비극이다. 주인공인 메데이아는 평생 남편 이아손을 위해 헌신했지만 결국 버림받는다. 무수한 번뇌를 거쳐 결국 그녀는 남편이 가장 사랑한 아이들을 죽임으로써 복수를 완성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복수의 시간, 그 앞에 애처롭게 용서를 구하는 자에게 다시 한번 복수의 정당성을 단 한 문장으로 쏟아낸다. 단 한 줄의 대사만으로도 매력적인 캐릭터임을 바로 알 수 있다.


전쟁은 편리한 일상을 파괴함으로써 폭력을 가르치고 군중 다수의 정념을 거친 현실과 결합시킨다.


헤로도토스와 함께 그리스 역사의 쌍벽을 이루는 투키디데스, 문명의 주인은 결국 인간이며 그것의 발전은 인간의 노력과 열정의 산물이다. 투키디데스의 도시국가 간의 전쟁, 기원전 4세기 이미 전쟁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위대한 역사가이다. 근래의 전쟁도 결국 비슷한 모습으로 전개되었고, 전개되고 있다.


마케도니아의 필립포스 왕은 이제 열네 살이 된 아들 알렉산드로스의 교육을 전담할 스승으로 아리스토텔레스를 점찍었다.


플라톤은 자신의 철학이 기독교와 그토록 어울릴지는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해 철저하게 이용당했다는 표현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중세 기독교는 그들의 교리의 원천을 플라톤의 관념론에서 구했다. 세상 모든 것을 집대성한 아리스토텔레스, 스승인 플라톤을 넘어 '생물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의 기반을 마련했다.


한편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드로스의 스승이 된다. 대부분 알렉산드로스의 정복 원정기를 기억하겠지만 마케도니아 역사의 하이라이트는 오히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죽음 이후라고 할 수 있다. 권력의 공백기, 즉 태양이 없는 태양계에서 남겨진 별들의 이야기는 더욱 솔직하고 한편으로는 처절하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제국 사이에 마케도니아 제국이 짧지만 강렬하게 존재한다. 이렇게 헬레니즘은 전파되었다. 인간이 자기가 사는 세상과 운명에 맞서기 시작했다.


『그리스인 이야기』•앙드레 보나르(책과함께, 2011)
지식/정보 : ★★★★★
감동/의미 : ★★★☆☆
재미/흥미 : ★★★☆☆


2021 코스모’s Best Book Award 선정 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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