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 않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시간
1914년 8월,
그날은 이상할 만큼 하늘이 맑았다.
잘 익은 밀밭 위를 스치는 산들바람이 살랑이는 마을은 여느 때처럼 평온했지만, 어딘가 불길한 정적으로 공기가 무거웠다. 종탑의 종소리는 평소보다 두 박자는 더 느린 거 같았다. 거리마다 사람들은 가득했지만, 큰 소리하나 없이 고요한 가운데, 속삭이는 목소리만 울렸다. 그 소리는 마치 거세게 내지르고 싶은 비명을 억누르는 것처럼 짙었다.
“가지 마세요… 제발…”
나는 아버지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졌다.
다른 때였다면 그만 떼쓰라고 다그칠 어머니마저 모르는 채 등을 돌리고 있었다.
눈가에 주름이 짙어지도록 힘을 줘서 눈을 깜빡이던 아버지가 아무 말 없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한없이 부드러웠지만, 그 손에는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의 실이 감겨 있었다.
한참을 말없이 내 머리만 쓸어내리던 아버지가 주머니에서 반짝이는 동전 하나를 꺼내 들었다. 두 손가락 사이에서 반짝이는 빛 때문인지 눈이 시려서 나는 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에밀, 집에 돌아가는 길에 이걸로 네가 좋아하는 초콜릿을 사는 거야. 이제 뚝 그치고.”
“… 안 가면 안돼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초콜릿 따윈 없어도 괜찮았다. 아버지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는 아주 짧게 숨을 몰아내 쉰 뒤, 다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은 갈 수밖에 없어. 하지만 약속하자. 네가 엄마를 잘 지키고 있다면… 내가 돌아와서, 더 큰 초콜릿을 사주마. 이건 남자 대 남자로 약속하는 거다.”
내 울음은 멎지 않았지만, 떠나야 할 시간이었다.
이내 아버지가 마을을 떠나는 징집 마차에 오르자, 나는 동전을 꼭 쥔 채 마차가 마을길 너머로 사라지는 순간을 바라보았다. 차마 초콜릿은 사러 갈 수 없었다.
그날 이후, 나는 단 한 번도 그 돈으로 초콜릿을 산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유는 없었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대신 서랍 깊숙이 감춰두고, 가끔 꺼내 손바닥에 올려두고 말없이 들여다 봤다.
시간이 흘러, 계절은 바뀌고, 마을을 스치는 바람은 점점 차가워졌다.
어머니는 점점 말수가 줄어들었고, 밤이면 등불도 켜지 않은 채 누구를 기다리는 것처럼 현관 앞을 계속 맴돌았다. 종종 새벽녘, 흐느끼는 소리가 벽 너머로 들려오면, 서랍을 열어 내 동전을 꺼냈다. 그리고 조용히 손가락 사이로 굴렸다. 그러고 있으면 아버지의 손이 스치는 기분이 들곤 했다. 아버지의 체온이 아직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
'돌아오실 거야. 반드시.'
나는 믿었다.
그날은 오지 않았다.
대신 다른 날이 왔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 치던 어느 날이었다.
우리는 지난밤 몰아쳤던 폭풍에 거실 덧창이 완전히 떨어져 나간 걸 확인하며 하루를 시작했다. 그 덧창은 이 집에 이사 오던 날 아버지가 직접 달았던 것이다. 왠지 가슴이 선득해졌다.
서늘한 예감을 공유했지만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아무 말 없이 하루를 보내면 괜찮아질 것처럼 하루를 보냈다.
그렇게 해가 뉘어지는 오후를 맞았다.
바람은 잦아들었고, 새로운 밤을 보내기 위해서는 창문에 끼울 판자가 필요했다.
마침 뒤뜰에는 아버지가 준비해 둔 판자가 있었고, 내가 가져오겠다고 했다.
뒤뜰로 달려가며 갑자기 다 괜찮아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판자를 옮기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집중한 나머지, 헛기침 소리를 듣기 전까지 인기척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쩌면 거기서 운명이 틀어졌을지도 모른다.
고개를 돌리자 눈에 익은 제복을 입은 집배원이 있었다.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잠시 멈칫하다가, 마침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께… 말해주렴. 상병 부싹에 대한 소식이 있다고.”
그것은 수신인이 프랑스 육군 장군으로 되어있는 봉투였다.
어머니는 이미 현관에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봉투를 받아 드는 순간 이미 알고 있었다.
어머니의 손이 몇 번이고 봉투를 놓쳤고, 그 속의 종이가 마치 아버지인 것처럼 조심스레 꺼내졌다.
그러나 끝내 종이는 펼치지도 못한 채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다.
그 순간, 알았다.
말하지 않아도, 읽지 않아도, 알게 된다.
해는 완전히 사라지고 어둠이 찾아왔지만, 우리는 불도 켜지 않은 어두운 거실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밖에선 바람이 거세게 다시 불고, 나뭇가지가 창문을 긁었다. 그 소리는 이상하리만치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들렸다. 어머니가 조용히 말했다.
“에밀,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아. 이제 우리 둘이 살아가야 해. 이 집도, 이 삶도… 아버지가 지키고 싶었던 것들, 이제 우리가 지켜야 해.”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다만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달려갔다. 서랍을 열고, 조심스럽게 내 동전을 꺼냈다.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쥐어준 보물.
한참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바라보다, 다시 어머니에게로 갔다.
나는 어머니에게 아버지가 준 마지막 조각을 주고 싶었다.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으면… 내가 어머니를 지킬 거예요. 우린 약속했어요.”
동전을 내밀며, 아버지와 했던 약속을 마지막 순간을 말했다. 마침내 내 볼에도 물줄기가 흘렀다.
어머니는 동전을 받아 들고, 한참을 말없이 바라봤다. 그리고 바느질함을 열었다.
실 가닥을 꺼내어, 조심스레 매듭을 만들었고, 매듭줄이 단단히 묵이자 그것을 다시 동전에 엮어 내 손목에 걸었다.
그렇게 백 년,
지금 읽으신 내용은 주화와 함께 수집한 이야기입니다.
세부 내용은 재구성했으며, 주화가 통화되던 시간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