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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튼 Nov 09. 2020

생일날 차를 뽑았다

생일은 모든 것을 이뤄준다



생일날 차를 뽑았다. 최고의 성능과 비싼 가격, 화려한 디자인. 아무리 생각해도 이 차를 탈 일은 내 인생에 없을 줄 알았다. 그러나 생일은 모든 것을 이뤄준다. 내 돈 주고 사기 아까운 걸 받는 날이 바로 생일 아닌가. 얼른 생일선물을 고르라는 친구의 성화에 슬쩍 차 얘길 꺼냈다. 친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나를 쳐다봤다.

“진심이야?”
“ㅇㅇ”
“무르기 없기”
“당근”

조심스레 친구한테 드림카의 성능을 브리핑해본다. 100% 확률로 일반 바나나, 지뢰, 대마왕 방어. 물폭탄, 물파리 쾌속 탈출. 바나나 피격 시 100% 확률로 부스터 획득. 30%도 50%도 70%도 아닌 100%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100%는 확실하다는 뜻이니까. 드림카 이름은 냐옹이. 생긴 것도 냐옹이다. 미친 귀여움. 그렇다. 냐옹이는 모바일 게임 카트라이더에서 현질을 해야만 살 수 있는 고급 카트다.


앞구르기하고 뒷구르기하고 봐도 정직한 생김새. 냐옹이는 냐옹이.

카트를 특출 나게 잘했다면 냐옹이를 갖고 싶지 않았을 거다. 냐옹이 같은 거 안 타도 내 손가락이 냐옹이니까. 카트 실력이 꽝이어도 냐옹이 생각은 안 했을 거다. 냐옹이 살 바엔 게임을 관두면 되니까. 냐옹이가 땡긴 건 어중간한 내 실력 때문이었다. 초반 부스터 빨로 선두를 달리다가도 대마왕(*왼쪽, 오른쪽 조작을 반대로 바꾸는 아이템)만 나오면 구석에 처박혀서 꼴찌가 된다거나.. 허구한 날 지뢰를 밟고 저 멀리 날아가기를 여러 번. 그 와중에 상점에서 발견한 게 신의 계시와도 같은 냐옹이다. 대마왕을 막아준다니.. 그것도 100%라고요?

카트라이더는 열다섯 살 겨울 방학을 풍미했던 게임이었다. 열다섯 살의 나는 루루(*물폭탄에 갇히면 일정 확률로 물파리를 주는 카트)를 타고 다녔는데.. 어쩐지 서른한 살의 나는 냐옹이를 원하고 있다. 카트 실력을 높이기보다는 더 좋은 장비를 원하는 모습이 16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마치 운동하기 전에 운동복을 먼저 구매하는 마음으로 냐옹이를 사고 싶었다. 그치만 내 돈 주고 사긴 싫었다. 평소 소비성향을 생각하면 냐옹이를 내 돈 주고 사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만.. 한 가지가 맘에 걸렸다. 열다섯과 서른하나라는 나이 차이 때문이다.



서른한 살의 고민은, 예를 들면 이런 거다. 15년 지기 죽마고우가 K5(신형, 풀체인지)를 뽑을 때.. 고작 냐옹이를 뽑는 나. 또 다른 10년 지기 죽마고우가 혼수로 냉장고를 들일 때.. 고작 냐옹이를 들이는 나. 면허도, 차도, 집도, 혼수도, 결혼을 약속할 일도 없는 내 모습은 왠지 알고 싶지 않다. 내 인생이 영화라면 굳이 찾아보고 싶지 않은 장면이다. 냐옹이를 원하는 모습조차도 귀엽게 보일 수 있는 것이 열다섯이라면 서른하나는 냐옹이의 ㄴ도 꺼내서는 안 되는 나이다. 쇼핑으로 갱신한 한심함이 비가 되어 내린다면 강을 이룰 정도인 나여도,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다. 사야 할 것과 사서는 안 되는 것. 그 정도의 선을 아는 나이가 서른한 살인 것이다.  

이것이 내가 내 돈으로 냐옹이를 사기를 포기한 이유다. 서른한 살 직장인에게도 꽤 부담스러운 냐옹이의 가격보다 냐옹이를 사서 게임이나 하는 내 모습을 한심해서 견딜 수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군가 선물해준다면? 그건 얘기가 달라진다. 선물이라는 것은 본디 거절할 수 없는 것이기에 주는 대로 받을 수밖에 없다. 내키지 않아도 선물한 사람의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최선을 다해서 내가 잘 쓰고 있음을 증명해야 하는 것이 선물이다. 어쩌면 이건 냐옹이를 탈 수 있는 최고의 시나리오일지도 모른다.

열다섯 살의 나는 게임 조작에 능숙하고 돈이 없었다면, 서른한 살의 나는 돈은 꽤 있는데 게임의 세계에서 한참을 헤맨다. 생일선물로 냐옹이를 사주겠다는 친구와 냐옹이를 선물할 방법에 대해 연구했다. 아무래도 독학은 그른 것 같다. 네이버에 카트라이더 냐옹이로 검색했다. 아쉽게도 아이폰 유저에게 선물은 어려운 모양.. 안 되면 안 되는 줄 알았던 지난날과 다르게 서른한 살의 나는 안 되면 안 되는 줄을 모른다. 회사 다니면서 제일 먼저 마음에 새긴 말은 안 되는 게 어딨어. 그렇다. 안 되는 건 없다.


검색해야 겨우 따라가는 나이 서른 한 살..


친구는 그사이 고민하다 카카오페이로 삼만 삼천 원을 보내줄 테니 알아서 사라고 했다. 구색은 안 맞지만, 무릇 선물이란 받는 사람이 행복하면 그만이다. 나는 뛸 듯이 기뻐하며 실로 오랜만에 대리(?) 현질을 했다. 카트에선 캐시를 긁으면 건전지라는 걸 주는데 그걸로 차도 사고 닉네임도 바꿀 수 있다. 닉네임을 바꾸려면 현질을 해야 하는 게 이 시대의 혹독한 셈법이다. 카트를 이렇게 열렬하게 사랑하게 될 줄 모르고 아무렇게나 씨부린 아이디로 레벨 40이 넘을 줄 몰랐기에 나는 생일선물로 닉네임도 바꿀 수 있게 됐다며 친구한테 공손히 큰 절을 했다.


카트 사라고 33,000원 받는 나이 서른 한 살...

영문 자판을 아무렇게나 눌러 만든 탓에 나조차도 외우지 못했던 내 닉네임. 드디어 바꿀 수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시그니처가 담기지 않은 이름으로 카트를 모는 건 기만이다. 실낱같은 실력이라 해도 크나큰 모욕이다. 고심해서 바꾼 아이디는 '신월동과소비'. 친구들한테 말할 때마다 빵빵 터지는 걸 보니 잘 지은 것 같다. 사람들이 혹시 내 돈으로 냐옹이를 샀다고 오해할까봐 걱정은 좀 됐지만, 카트의 세계에서 사담은 중요한 영역이 아니기에 괜찮다.


한껏 신이난 신월동과소비(31,직장인..)



거금을 주고 구매한 냐옹이를 타고, 고심 끝에 바꾼 아이디로 방구석 폭주족이 되어 차를 몰던 어느 날. 냐옹이를 한껏 뽐내다가 막판 삑사리 때문에 역전패했다. 넋을 잃고 상대 팀 우승 시상식을 멍하게 지켜보는데 누군지도 모르는 한 팀원에게 쓴소리를 들었다.

“신월동 못하면 나대지 마”

마음이 복잡해졌다. 아니 카트의 세계는 사담이 중요치 않은 곳 아니었던가. 게다가 우리 동네.. 가뜩이나 존재감 없어서 마음 아픈데, 모자란 내 운전 실력 때문에 신월동을 욕 먹이다니.. 그러게 아이디는 왜 바꿔가지고... 아니 근데 인생이 다 그런 거지, 지는 날도 있고 이기는 날도 있지, 그게 그렇게 분해서 그 짧은 시간에 같은 팀을 욕해? 부아가 치밀어 나도 한소리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사이에 시상식은 이미 끝났고, 못하는데 나대기만 하는 팀원을 더 보고 싶지 않다는 듯 악플러(?)는 이미 방을 나갔다.

휴. 다행이다. 금방 나가서.

다음 판도 못했음 또 동네 욕먹일 뻔 했다.

때아닌 악플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곰곰이 생각해보니 냐옹이 탄 걸로 욕먹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현질러들에게 실력 얘긴 아킬레스건이다. 뭐 어쨌든 그 냐옹인 내가 산 게 아니니까 상관없다. 내 냐옹이는 극구 사양했는데 받은 '생일선물'이니까. 현질은 현질이지만 내 돈은 아니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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