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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튼 Nov 05. 2018

치킨에도 진심은 통한다

신령님과 김치와 치킨 이야기


어느 날 자고 일어났는데 별안간 미래가 궁금했다. 역시 가장 궁금한 건 연애운. 두 번째는 직장운. 세 번째는 가족의 안녕 정도가 아닐까. 생각해보니 지난 여름 보험처럼 받아둔 신령님의 연락처가 있었다. 태백산 신령을 모신다는 그 분. 왠지 신뢰가 갔다. 대둔산도 아니고 한라산도 아니고 태백산. 태백산맥이라는 책도 있고 뭐 나쁜 사람은 아니겠지.


그렇게 나는 타로도, 사주도 본 적 없으면서 패기롭게 혼자 신점을 보기로 했다. 예약할 땐 몸이 성했는데, 그 사이에 병이 났다. 건강검진으로 휴가를 써둔 날이라 일정이 몹시 타이트했다. 9시 건강검진. 15시 퍼스널컬러 진단. 19시 신점. 건강과 얼굴빛, 미래를 진단받는 대단한 날. 진단의 3박자.


몸 상태를 핑계로 취소해볼까 생각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신령님과의 약속을 어긴다면 불벼락을 맞을 것 같았다. 며칠 째 소화가 안돼서 그 날도 한 끼밖에 못 먹었지만 어쨌든 말도 잘 하고 걸을 수도 있는 상태였다. 그렇게 신령님을 만났다. 나는 언제 운명의 짝꿍이 나타날 것인지 정말 궁금했다. 하지만 제일 먼저 들은 것은 전혀 뜻밖의 이야기였다.


신령님은 연애고 뭐고 무엇보다 내 건강이 제일 걱정이라 했다. 일단 타고나기를 상당히 허약한 체질이라고. 나이는 20대인데 체력은 60대나 다름없다나. 관리 안하면 다음 달에 입원을 한다 했다. 한 주 내내 앓았기 때문에 뜨끔했지만 점괘의 정확도를 위해 내색하진 않았다. 그러나 그 이후 모든 점괘는 기승전-건강-으로 수렴했다.


신령님 저는 언제 연애를 할 수 있나요?

: 연애도 좋은데, 남친 만나서 마음고생하면 건강 해쳐. 마음고생 안 시키는 맘 넓은 남자 만나.


신령님 그럼 글쓰기로 성공할 수 있나요?

: 본업으론 절대 안 돼. 새벽에 늦게 자, 아침밥 걸러,커피 마셔. 그거 완전 건강 해쳐. 절대 안 돼.


신령님 눈에는 내가 개복치로 보이는 듯 했다. 뭐 딱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러나 사실 이 시대의 직장인으로서 감기나 위장병 하나쯤은 다 달고 사는 거 아닌가. 그래서 신령님에겐 미안하지만 꽤나 보편적인 얘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 말을 듣기 전까지는.


“이제는 김치도 먹어야지.”


너무 놀라 그 땐 숨기지 못했다. 난 김치를 안 먹는다. 나는 올해 29살이고 김치를 안 먹은 지 29년 됐다. 나는야 소문난 야채포비아. 편식이라는 개념이 인간으로 태어난다면 그게 바로 나. 내가 먹는 모든 것은 정크이며 정크가 곧 나다. 나의 유일한 자랑은 청국장을 먹는 것. (아쉽게도 내가 청국장 먹는 건 맞추지 못하셨다.)


그 때부터 점괘는 기승전밥으로 이어졌다. 밥을 먹어라. 먹기 싫어도 반공기라도 먹어라. 왜냐하면 너의 식습관은 건강을 해치기 때문에. 내가 허약하다고 해서 부적을 사라는 등 금전적인 이익을 취하려 하는 게 아니어서 더 빠져들었다. 참나. 내가 밥 안 먹는 걸 엄마도 아니고 초면인 신령님까지 걱정하다니. 정말 심각하게 느껴졌다.




그 날 집에 돌아와 제일 먼저 밥을 먹었다. 엄마는 밤 10시 반에 밥을 달라는 나를 의아하게 쳐다봤지만, 이내 기뻐하며 된장찌개와 김, 오징어채를 정갈하게 차려주었다. 매일같이 들어가던 배달의 민족을 애써 외면하고 평소 주식인 치킨, 피자, 튀김, 면 요리를 일절 먹지 않으려 노력했다. 물론 술도 마찬가지.


금주와 금정크. 신점 디톡스 한 달 째. 갑작스런 파견 발령으로 회사에서 바쁘게 지내다보니 치킨 생각이 간절했다. 마음이 울적하고 답답할 땐 산으로 올라가 소릴 한 번 지르는 게 아니라 치킨을 시켜야 한다. 그 사이 소화능력도 꽤 많이 회복된 것 같다. 한 달만의 치킨이라니. 시키기도 전에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마치 전남친의 청첩장이라도 발견한 듯 심각하게 배달의 민족을 치킨 카테고리를 훑어내렸다.


처음엔 구운 치킨이 땡겼지만 튜닝의 끝은 순정이라고 했던가. 치킨은 역시 후라이드다. 그래. 치킨은 역시 후라이드야. 내가 생각하는 배달의 민족의 묘미는 바로 리뷰이벤트 참여로 받는 공짜 사이드메뉴다. 보통 치킨집에서는 콜라 업그레이드, 감자튀김, 닭똥집 후라이드, 치즈볼, 떡볶이 같은 것들로 소비자를 현혹한다. 그 중에서도 난 감자튀김을 너무 좋아하고 그래서 신령님께 혼났다. 그렇지만 한 달을 참았으니 신령님도 이해해주겠지.


나는 리뷰를 쓰면 오지치즈감자를 준다는 B치킨을 선택했다. 원래 허니감자를 주는 Y치킨을 애용했는데 한 번은 감자가 누락돼서 세상이 무너질 뻔 한 적이 있었다. 사장님이 전화로 너무 미안하다고 다음에 시키면 감자를 두 배로 준다고 했지만 다음에 시켰을 때 그 내용마저 누락되어 나는 한 번 더 슬펐다. 누락의 아이콘이 되버린 기분이었다. 서비스니까 뭐라고 할 순 없지만 이번엔 절대 누락되어선 안되기에.. 무려 한 달만의 치킨이기에..


B치킨은 사실 처음 먹어보는 곳이다. 내가 치킨을 시킬 때 고려하는 게 하나 더 있다면 바로 소스다. 나는 어딘가에 소문난 건 아니지만 남몰래 열렬히 소스를 사랑하는 소스 덕후다. 후라이드엔 소금도 좋지만 양념소스에 찍어먹어야 바삭함과 양념맛을 살릴 수 있다. 그런데 B치킨의 소스는 무려 3개. 양념소스. 갈릭소스. 칠리소스.


나는 B치킨 사장님도 소스 덕후가 분명하다고 생각하고 3가지 소스를 다 시켰다. 결과는 대성공. 특히 갈릭소스가 우리 아빠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아빠가 맛있다면 정말 맛있는 거다. 우리 아빠는 음식에 관해선 빈말을 하지 않는다. 소스가 내 맘을 흔들었다면 치킨 사이에 살며시 숨어 있는 떡은 얼굴도 본 적 없는 B치킨의 사장님을 사랑하게 만들었다. 아니 사장님 제가 떡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아시고..


이 와중에 신령님이 생각나 밥도 같이 먹었다. 치밥이라면 신령님도 무사통과야. 그런데 서비스라는 감자튀김은 산처럼 쌓여있었다. 마치 돈 낸 감자같은 그 풍요로운 광경에 나는 뼈를 깎아 리뷰를 쓰겠노라고 다짐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일어나자마자 감동을 담아 리뷰를 썼다.


돈 안 낸 감자가 돈 낸 감자 같다는 감자튀김 양 칭찬. 치킨의 가장 기본인 튀김옷의 바삭함과 치킨조각 크기의 적절성. 소스의 다양성과 맛 칭찬. 화룡점정으로 다음에도 시켜먹겠다는 재주문 의사 고백. 떡 얘길 못 쓴 것만 빼면 내가 봐도 기승전-치킨사랑-이 묻어나는 완벽한 리뷰였다. 저녁이 되어 다시 배달의 민족에 접속해보니 어느덧 사장님이 댓글을 달았다. 역시 잘되는 집은 소통을 잘하는 법이다. 하하.



사장님이 기뻐하는 모습에(?) 나도 기뻤다. (내가 직접 쓴) 브런치 작가소개에 따르면 나는 진심은 통한다고 믿는 사람. 역시 치킨에도 진심은 통한다. 최근 신령님의 조언에 따라 치킨은 한 달에 한 번만 먹기로 결심했다. 좋았어. 12월에도 나는 B치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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