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코튼 Nov 15. 2018

대리니까 대리코트!

매일같은 쇼핑에도 명분이 필요하다




얼마 전 대리가 됐다. 나란 주임. 대리가 되려면 반 년은 더 묵어야 하는데. 반갑지만 다소 날벼락같은 승진이었다. 대리승진 소식이 있다는 블라인드발 괴소문은 다음날 출근하니 사실로 밝혀졌다. 분명 어제 퇴근할 때만 해도 둘도 없는 주임이었는데 뜬금없이 좀 있으면 너희들 대리시켜주겠노라 했다.


음. 좋은건가? 승진경험 전무. 머리에 피도 안마른 주임으로서 그닥 감이 오질 않았다. 그래서 대리가 되면 월급이 얼마나 오르나 체크했다. 오오. 그리 큰 금액은 아니지만 오르긴 한다. 시간외 수당도 기본급에서 뻥튀기되니 이것 참 좋은 일 아닌가! 옆자리 언니와 퇴근길에 백화점에 들러 바로 핸드메이드 코트를 물색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요즘 유행에 맞게 적당히 롱하면서도 움직임엔 지장이 없는, 색상은 튀지 않으면서도 독보적인 그런 역설적인 핸드메이드 코트. 모름지기 대리라면 결이 부드럽고 고급진 코트를 자연스레 입는 어른스러움이 있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런 코트는 쉽게 내 눈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네이비나 블랙은 재미없고 와인이나 레드, 브라운은 안 어울리고.. 서서히 지쳐갈 때쯤 옆자리 대리언니의 매서운 눈썰미로 코트 하나를 찾아냈다. 색상은오묘한 청록빛이 감돌았고 소매엔 버클 디테일이 있었으며, 무려 투버튼이었다. 코트에 원버튼은 외롭고 노버튼은 극혐이다. 역시 대리가 되면 주임이 어울릴만한 코트 고르는 안목이 생기는 건가!


투버튼에 대해 좀 더 얘기하자면, 코트는 옷 중에서도 외투에 속하기에 잠글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잠글 수 있는데 안 잠그는 것과 단추가 없어서 못 잠그는 외투는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나는 투버튼을 선호한다. 결론은 이 코트는 투버튼. 주머니 위치도 너무 높지도 낮지도 않아 대만족. 길이도 운명처럼 적당히 시크하게 길어서 종아리 절반정도를 덮는다.




그 때 바로 직감했다. 이것은 바로 대리코트. 나는 이걸 꼭 사야한다. 모름지기 대리라면 늘 입던 블랙, 네이비, 그레이 등 무난한 컬러를 벗어나 청록색에도 도전할 수 있어야한다. 그것이 부의 상징. 기본 컬러가 아닌 제2의 컬러에도 내 지갑은 문제없다는 암묵적 표현. 아아 꿈의 대리생활.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나는 바로 구매를 결정했다.


“언니 이거 새거 있어여?”


없으면 안 살려 했는데 새 상품도 있고 심지어 스팀으로 펴주기까지 한다고! 아니 이 사람들 내가 대리된 걸 아는 건가? 그렇지만 일단 가격이 중요하다. 가격이 얼마지? 39.9? 흠. 나는 올해의 애석한 통장 주인 TOP 10 중 한 명으로서 매장에서 입어보고 품번 검색으로 인터넷 최저가 구매를 즐기는 진상 손님이지만 이번 대리코트만큼은 그럴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인터넷에 전혀 나오지가 않았다. 딱 하나 나왔는데 이미 품절. 품절이란 단어는 인간을 몹시 조급하게 한다. 그치만 39.9는 40이고 그건 너무 쎈데. 조심스레 매장 언니와 딜을 시도해본다. 신상이라 할인은 더 안된다나. 월급을 내 키만큼 받는 까닭에 (참고로 나는 아주 평균적인 키의 여성이다.)없어보이게 깎고 또 깎아서 34까지 왔다.




“언니. 많이 빼주셨는데. 그건 아는데. 진짜 미안한데 이벤트 더 없어여?”


어플만 설치하면 되는 롯데백화점 구매금액별 사은행사가 있다고 한다. 아니 이 언니가?? 그걸 왜 이제 말해?? 제일 중요한데. 서둘러 어플을 설치한다. 20/40/60만원 이상 사면 상품권을 환급해주는 백화점이라면 잊을만하면 하는 좋은 이벤트. 대리코트는 34니까 20만원 이상 1만원 상품권을 받을 수 있다고.


그러면서 먼저 결제하면 스팀으로 다려놓을테니까 9층 사은행사장에 먼저 갔다오라고 한다. 어느새 홀린 듯 결제하고 있다. 34에서 상품권 1빼면 33. 대리코트지만 구매시점엔 아직 주임이니까 쿨하게 3개월 할부. 월 11만원에 꿈의 대리생활이 펼쳐지는 것이다. 이거 완전 거저네. 생각하며 9층 사은행사장으로 향하는데 문득 내 앞에 나타난 최애 옷가게 나무그림(namugrim).




편집숍 나무그림의 옷은 대개 비싸지만 비싼 것들은 유니크하고 재고가 빨리 빠지기 때문에 신속한 결정이 필요하다. 아니 사은행사장에 가려고 했는데 어쩐지 나무그림에 들어와 있다. 그 와중에 내 머릿 속을 스쳐가는 구매사은 이벤트. 34만원 샀는데. 6만원만 더 사면 2만원 받는데???


정신없이 사은행사의 제물을 찾던 도중 심각하게 유니크하고 색상이 내 스타일인 니트를 발견한다. 파란 실과 보라 실이 알맞게 엮인듯한 흔치 않은 파란색. 특히 사자 패턴이 눈에 띄었는데 갈기가 입체적으로 표현되어 있었다. 심지어 사자 꼬리도 니트실로 꼬아 구현해놓음. 나무그림 언니와 귀여워서 치를 떨었다.


아! 이것은 바로 주임니트? 조금 유아틱하지만 너무 귀염뽀짝. 한동안 정든 주임이란 직명을 보내주기엔 너무나도 좋은 니트.


“언니 이거 새거 있어여?”


오늘의 두번째 새거 타령. 애석하게도 새 것은 없다. 아니 근데 이게 마지막 물량이라고?? 언니 그럼 이거 좀 킵해주세여^^ 주임니트의 가격은 4.9. 6만원에서 딱 만원 모자란다. 내 흔들리는 동공을 봤는지 나무그림 언니가 또 다시 접근한다. 고객님 금액 맞추시려면 저렴한 기본니트는 어떠세요?? 정말이지 나무그림 언니는 구구절절 옳은 말만 하시는군요?!


그렇게 검은색 기본니트와 귀염뽀짝 주임니트를 구매하여 40만원을 채운 나는 9층 사은행사장에 예상보다 늦게 도착했지만 상품권 2만원을 환급받았다. 그리고 다시 대리코트를 찾으러 간다. 금방 오겠다 해놓고 돌아오지 않는 주인을 기다리며 대리코트가 어느새 포장되어 있다. 코트와 니트를 들고 식품관에 들린다. 상품권 2만원 받았으니 빵도 한 점 사야지.




그 날, 당연히 상품권을 쓰진 않았다. 통장잔고에 대한 상상력이 풍부한 나. 돌아오는 길엔 마치 면세점에 출몰한 요우커라도 된 듯 혼자만 주렁주렁이었지만 마음만은 풍족했다. 주임으로서 고생했다는 의미의 주임니트와 앞으로 열심히 하자는 의미의 대리코트와 함께였으니. 오늘도 참 군더더기 없이 살았구나 나!


회사의 허리를 책임지는 어엿한 대리가 된 지금, 부지런히 대리코트를 입고 있다. 약 7회 정도 착용했으며 한파가 닥치기 전에 패션 테러가 되더라도 매일같이 중복 착용할 예정이다. 할부는 11/25부터 시작되고, 1/25에 끝이 난다.


대리니까 대리코트!


승진이란 건 생각보다 신나는 일이었다. 비단 코트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다. 대리패딩, 대리조끼, 대리신발 등 다양한 아이템에 적용할 수 있다. 매일같은 쇼핑에 명분이 필요할 때, 승진을 이용해보자!


작가의 이전글 브런치 작가된 지 2분만에 좌절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