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MAY 2025
20대엔 회사를 다녔다. 컴퓨터로 그림을 그리는 일을 했다.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다. 미술학원도 다니고 대입을 준비했다. 좋은 대학은 못 갔지만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직업을 가졌다. 그러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회사를 그만뒀고 육아를 하면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다른 직업을 찾았다.
그렇게 그림책 작가가 된 지 오랜 시간이 흘렀다. 외주를 받아 일러스트 작업을 한 건 더 오래됐다. 수입은 낮았지만 아이를 키우며 하기 좋은 직업이었다. 첫 책을 운 좋게 우수출판 사업 지원에 선정돼 지원금을 받아 출판했고 두 번째 책은 이탈리아 볼로냐 어린이책페어에서 올해의 일러스트레이터로 선정됐다. 뉴질랜드에 있을 때 출판한 세 번째 책은 아무런 타이틀을 갖지 못했지만, 새로운 시도를 한 책으로, 개인적인 의미가 있는 책이다. 그리고 2년이 지났다.
뉴질랜드에서의 삶은 대체로 평화롭다. 아이들은 엄마의 도움이 많이 필요하지 않은 나이가 됐다. 아이들이 학교에 간 뒤부터는 온전히 내 자유시간이다. 8시 30분부터 오후 5시까지 대략 8시간 정도를 혼자 보낸다. 8시간은 꽤 긴 시간이다. 매일 8시간을 선물 받은 지 벌써 2년 반이 지났는데 나는 아직도 8시간을 아무 의미 없이 흘려보내고 있다. 하루를 되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이 학교에 간 뒤 30분 동안은 집안 정리를 한다. 아이들이 먹은 그릇, 도시락 싸느라 어질러진 주방 정리, 세수, 간단히 청소기 돌리기 등이다. 늦은 아침을 혼자 먹기도 한다. 그런 다음 커피를 한잔 내리고 노트북 앞에 앉는다. 내가 하루 중 제일 좋아하는 시간이다. 아침에 마시는 커피 한잔이 하루를 시작하는 알림 같은 역할을 한다. 이 시간엔 글을 쓰거나 영화 한 편을 본다. 아직은 글 쓰는 게 어렵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의 주름을 잡아당겨 그 속에 감춰있는 것을 발견하기 위해 애쓴다. 글을 쓰지 않고 영화를 보는 날엔, 거의 망한 날이다. 이 날은 종일 영화를 보거나 유튜브를 보게 된다. 이래서 시작이 중요하다. 영화를 한편 보고 나면 벌써 점심때가 된다. 11시가 되면 이른 점심을 먹거나 점심을 먹기 전 짧은 영상을 또 본다. 관성처럼 그렇게 된다. 시간을 무의미하게 흘려보내기 좋은 행동이다. 딱히 즐겁지도 않다. 요즘 자주 이야기되는 도파민 중독일지도 모르고 회피일지도 모른다.
그림을 그려야 한다. 이 많은 시간 동안 내 책 작업을 한다면 더없이 좋을 것이다. 출판사는 벌써부터 작업 얘기를 몇 번이나 했다. 나는 불안형 완벽주의자다. 뭐든 시작이 어렵다. 일단 시작해야 끝이 난다는 사실도 알고 완벽하지 않은 시작이 오히려 넓고 다양한 결론을 낼 수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지만 아직도 시작을 못하고 있다. 2년 전 마지막 책을 출판했을 때도 그랬다. 내 마음에 드는 작업이 될 때까지 작업을 끝내지 못했다. 출판사에서는 이제 됐다고 했지만 나는 끝을 낼 수 없었다. 남들은 알지 못하는 아주 작은 티끌을 고쳐보려고 애쓴다. 가끔은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림책은 단순한 일러스트 작업이 아니다. 글과 그림이 함께 어우러져 만들어진 새로운 세상이고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책이다. 그림책이 아이들만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직도 많은 게 아쉽지만 그래도 요즘은 전에 비해 많이 개선되었다. 많은 한국 그림책 작가들이 세계무대에서 인정받고 있다. 그래서 나도 그 물결에 힘을 보태고 싶은데 생각과 행동은 왜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일까.
나는 매일 상상한다. 네 번째 책 작업을 시작하는 나의 모습을 말이다. 작은 노트에 1페이지부터 20여 페이지의 흐름을 먼저 만든다. 글과 그림의 어우러짐을 고려하며 이 작업은 완성될 때까지 수십 번 수정될 것이다. 일단 그 첫걸음인 1페이지부터 20페이지까지의 흐름을 만드는 작업을 1년이 넘도록 못하고 있다. 바보 같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바보 같다는 생각을 한다.
오늘의 데일리 드로잉 주제는 ‘긴 초들’이다. 김연덕 시인의 시집에 있는 제목이다. 친한 그림책 작가가 제시한 주제인데, 이분의 주제는 늘 어렵다. 나처럼 단순한 사람이 이런 주제를 받으면 몇 시간 동안 생각해야 한다. 위에 말한 불안형 완벽주의자의 모습이 또 나온다. 뭘 그려야 할지 감이 안 온다. 잘하고 싶다. 사실 데일리 드로잉은 잘하지 않아도 될 텐데. 뭐든 잘하고 싶어서 문제다. 그렇게 오후는 데일리 드로잉에 대해 생각한다. 낙서도 하다가, 시를 읽고 관련된 주제를 검색하고 뒹굴거리다가 영상 한 개를 또 보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아이들이 하교할 시간이다. 그럼 이제 하루는 거의 끝이 난다. 저녁을 준비하고 먹고 치우고 종일 생각한 데일리 드로잉을 시작한다. 대게 평균 2시간 정도 걸리는데 어느 날은 3시간 이상이 걸리기도 한다. 데일리 드로잉이라고 하기엔 시간을 너무 많이 쓰는 것 같은 생각이 들긴 하는데, 아직 뾰족한 방법을 찾지 못했다.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계획이 조금 더 필요한 것 같다.
이제 9시가 넘어간다. 남은일은 잘 준비다. 잘 준비는 매우 순조롭다. 양치를 하고 침대에 들어가면 된다. 잠이 안 오는 일은 없다. 나는 침대에 누우면 대게 10분 안에 잠이 든다. 어느 날은 눕자마자 골아떨어지는 날도 있다. 나이가 들어보니 잠을 잘 자는 일은 정말 감사한 일이다.
대게 이런 루틴으로 하루가 가는데, 오늘은 약속이 있어서 오전에 집을 떠나 식사와 커피 한잔을 하고 집에 오니 오후 3시다. 벌써 하루 가 다 간 느낌이다. 아이들 하교 후엔 둘째의 지리 여행을 위해 간식을 사고, 거실 전구도 사고, 로션도 샀다. 상점 3군데를 돌고 집에 와 저녁 식사를 하니 벌써 저녁 8시다. 아직 데일리 드로잉과 글쓰기, 그리고 내일 있는 영어 수업 숙제가 남았다. 월요일부터 바쁜 날이다. 그래도 종일 무의미한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이렇게 바쁜 하루가 더 좋다. 시간에 쫓겨 오늘은 평소보다 조금 더 늦게 잠들겠지만, 잘 잘 수 있을 것 같다. 내일은 원래 바쁜 날이다. 수업이 2개나 있다. 이번 주는, 생각 없이 바쁘게 지나가겠다. 그 틈사이 언젠가 그림책 더미를 하나 꼭 만들어야지. 그게 나의 이번 주 임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