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JUN 2025
새벽 5시 30분 알람이 울린다. 나는 분명히 단 꿈을 꾸고 있었다. 무슨 꿈이었는지 벌써 잊었지만 기분 좋은 꿈이었다. 알람이 울리는 곳은 내 방 서랍 속이었다. 서랍을 여니 작은 딸 휴대폰이 열심히 알람을 울리고 있었다.
오늘은 King’s Birthday, 뉴질랜드 공휴일이다. 영국 연방 국가인 뉴질랜드는 왕의 생일을 기념하는 날이 있다. 찰스왕의 생일은 오늘이 아니지만 어쨌든 6월 첫째 주 월요일은 공휴일이다. 회사도, 학교도 쉰다. 그런데 왜 5시 30분에 알람이 울리고 있는 걸까.
둘째는 도통 예상할 수 없는 아이다. 내 딸이지만 이리 튈까 저리 튈까 항상 노심초사다. 물건을 부수는 것도 둘째 담당이다. 물건을 잃어버리는 것도 둘째 몫이다. 그리고 우리 집에서 가장 창의적인 사람도 둘째다. 오늘은 창의적인 방법으로 내 아침잠을 깨웠다. 기발하다.
침대에 다시 누웠다. 겨울이 오는 중인 지금은 7시 30분쯤이나 돼야 해가 뜬다. 밖은 아직도 어둡다. 드문 드문 집 앞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 소리가 들린다. 가만히 어둠 속에서 오늘 해야 할 일을 떠올렸다. 아침밥을 준비하면서 세탁기를 돌려야 한다. 오늘 일기 예보는 구름과 해가 같이 있는 날이다. 시간별 날씨 예보에도 다행히 비 소식은 없다. 겨울이면 비가 오다가 안 오다가를 반복하는 날이 많아서 빨래를 걷었다 널었다 하지 않으려면 반쪽 해가 뜨는 날에 빨래를 해야 한다. 뉴질랜드에서 살기 시작한 첫해엔 빨래를 널었다 걷었다 다시 널었다 결국 제습기로 빨래를 말려야 했던 날이 종종 있었다. 비가 종일 오락 가락 하는 날씨를 미워했다. 2번의 겨울을 겪고 나서 초보에서 중수가 된 나는 비가 와도 종종걸음으로 빨래를 걷으러 가지 않는다. 다시 해가 뜨면 빨래는 결국 마르게 돼있다. 간혹 폭우가 갑자기 쏟아지는 날도 있는데, 이런 날은 할 일이 두 배가 된다. 탈수를 다시 하고 건조기에 빨래를 말려야 한다. 그래서 아침 하늘이 흐리면 그냥 건조기에 빨래를 말린다. 해가 뜨지 않는 날은 어차피 빨래를 종일 널어놔도 바짝 마르지 않는다. 이제 건조기가 내내 돌아가는 계절이 왔다. 그래도 나는 이제 건조기도 있고, 빨래 타이밍도 제법 잘 맞춘다.
다시 고요가 찾아오나 싶더니 차들이 또 우르르 지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아침 일찍 어디 가는지 궁금하다. 오늘은 공휴일이고 아직 상점이나 카페도 문을 열지 않은 시간인데, 무슨 볼일이 있는 걸까. 친구네 집에서 놀다가 아침이 되어 집에 가는 사람일까. 가족 여행을 떠나는 중일까. 사람과 사람이 연결되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좋겠다.’라고 생각했다. 여전히 외로움을 느끼고 있다. 외로움이 사람을 통해 지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방법을 모르겠다. 혼자 살아본 적도 없고 남편과 떨어져 사는 것도 처음인 나는 여전히 외롭다. 책에서 봤는데, 외로움은 사람으로 채우는 게 아니라고 했다. 혼자 잘 사는 방법을 찾아본 적도 있다. 내가 더 부지런히 움직이면 외롭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아직도 하고 싶은 일이 별로 없다.
마흔이 넘어도 여전히 두려운 것은 존재하고, 그것과 맞설 수 있도록 용기를 내야 한다. 일흔 살쯤 되면 진짜 이 세상에 두려운 건 하나도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그때도 두려운 것이 있다고, 일흔의 누군가가 말할 것 같았다. 일단 귀를 닫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도저히 다시 잠이 오지 않아 결국 보조등을 켰다. 방구석이 환해졌다. 그리고 늘 그 자리에 있던 책을 집어 들었다. 오래간만에 책을 읽는다. 초중고등학교땐 책을 많이 읽었다. 공부가 싫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나는 매일매일 책을 읽었었다. 오래간만에 읽는 책이라 그런지 페이지가 계속 넘어갔다. 어쩌면 이렇게 글을 ‘슬슬슬’ 잘 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글쓰기 공부를 해볼까 하다가 이내 생각을 접었다. 너무 많은 욕심을 부리지 않아야 한다. 이곳에서 사는 동안 1순위는 ‘내 마음의 평화’다. 무언가 공부를 하면 삶의 질은 높아지고 정신 건강에도 좋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지만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지면 안 된다. 올해는 꼭 그림 작업을 하려고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책이 나온 지 2년이 다돼 간다. 너무 오래 놀았다. 사실 놀았다기보다 방황했다. 나는 참, 대책 없는 사람이다. 대책 없는 사람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동안 내 인생은 대책 없이 일을 벌여놓고, 수습도 참 잘해왔다. 그래서 그렇다. 이제 계획을 세워볼까 생각을 했다. 아직은 안 세웠지만.
한 시간 정도 책을 읽었다. 밖이 조금씩 밝아오고 있었다. 기분이 좋았다. 매일은 왜 이렇게 순식간에 지나가는지, 책 읽을 틈이 없다. 아니 틈은 무척 많은데, 그 틈을 책 읽기로 사용하지 않는다. 다시 누워 천장을 멍하게 바라봤다. 기분 좋은 감정을 유지하며 잠깐 시간을 보냈다. 지나온 시간을 거꾸로 올라가 봤다. 길을 잘못 들어선 그때가 언제였는지 찾아보고 싶었다. 나는 왜 도망치듯 하루를 흘려버리고 있을까. 나는 정말 하루가 빨리 지나가길 바랐던 적이 있었다. 하루가 가고 또 하루가 가면 한 달이 지나고 반년이 지나고 일 년이 지나서 한국에 가고 싶었다. 지금 생각하면 이해되지 않지만 그랬던 마음이었던 적도 있었다. 방대한 자유가 나를 짓눌렀다. 자유는 차고 넘쳤는데 뭘 해야 할지 몰랐다. 할 게 없었다. 친구도 없었고 작업할 수 있는 재료도 없었고 책을 읽고 싶지만 책도 없었다. 아니 없었다고 생각했었다. 당연히, 모든 걸 할 수 있었다. 친구도 만들 수 있고, 작업은 연필 하나만 갖고도 할 수 있고, 이북 리더기도 사 왔었다. 그냥 마음이 그랬었다. 무기력했다.
이때의 기억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기록하고 있다. 자꾸 이때의 마음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 기억과 감정을 기록하며 마음을 조금씩 정리하고 있다. 오늘 아침에도 또 한 번 그때를 생각했다. 이렇게 나에게 한걸음 더 가까이 다가갔다.
아이들이 깼다. 고요한 시간은 끝났다. 아침 8시다. 세탁기를 켜고 빨래를 돌렸다. 아침밥을 준비했다.
오늘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