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JUN 2025
뉴질랜드에 오기 전, 내 이웃이 할머니였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진 적이 있다. 나는 그 할머니의 이름을 ‘앤’이라고 지었다. 그리고 앤 할머니 집에 매일 놀러 가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상상했다. 앤 할머니는 인자하고 넓은 품으로 나를 보듬어 줄 것 같았다.
지금 내 현실은, 이웃 할머니는 없다. 그렇게 앤 할머니는 내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사람이 됐다.
그녀의 이름은 크리스다. 처음 그녀의 이름을 들었을 때, 중성적인 이름이 좋았다. 나는 사람의 얼굴과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하물며 외국 이름은 들어도 돌아서면 잊어버리곤 했는데, 그녀의 이름은 한 번에 기억했다. 그녀의 나이를 정확히 모르지만 내 부모와 비슷한 연령대인 것 같다. 첫날,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보였고, 그녀의 모든 이야기를 다 이해하지 못했지만, 나도 덩달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두 번째 만났을 때도 그녀는 슬퍼 보였다. 그때가 Mother’s day 다음날이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수업이 끝나고 나는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내가 안아주고 싶다고 하자 그녀는 나를 꼭 안았다.
우리가 만난 ART 모임은, 그날의 주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말한 뒤 명상을 하고 아트 활동을 하는 모임이다.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거나, 종이를 오리거나 잘라 붙여 표현하기도 한다. 감사한 일, 자연, 웰빙에 대한 이야기 혹은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고 그것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한다. 그렇기 때문에 치유하는 시간이다. 모두 공감해 주는 분위기라 편했는지, 나는 내가 말할 수 있는 모든 영어 회화 능력을 끌어당겨 해외살이에 대한 외롭고 힘든 마음을 이야기했다. 그 덕분인지 몇 주가 지난 지금 외로운 감정이 많이 사라졌다. 누군가에게 내 이야기를 말하고 싶었나 보다. 그저 감정을 말로 표현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위로받을 수 있었다.
오늘이 ART 모임이 있는 날이다. 매주 화요일마다 30분을 운전해 모임에 간다. 다행히 출근시간이 조금 지난 시간이라 차는 많이 밀리지 않았다. 그리 가까운 거리는 아니지만, 지금 나에게 가장 즐거운 시간이기 때문에 가는 길이 전혀 힘들지 않다. 오늘의 주제는
Look deep into nature, and then you will understand everything better.
-Albert Einstein-
였다. 명상을 하기 전 각자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자주 가는 집 앞바다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자연은 언제나 아름답고 편안함을 준다. 하늘과 나무, 별과 바다, 숲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명상을 하고 각자 아트워크를 했다. 나는 평소에도 나무와 숲을 그리는 걸 좋아하기 때문에 무척 즐거운 시간이었다. 물감이 취미용이라 표현의 한계는 있었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그림을 그리면서 즐겁고 행복한 마음을 갖았다는 것으로 충분했다.
크리스가 나에게 말을 건넸다. 그녀는 이 모임이 끝나고 들르는 카페가 있다며, 나만 괜찮다면 같이 가지 않겠냐고 했다. 나는 ART 모임이 끝난 뒤 영어 회화 수업이 있었지만, 기꺼이 그녀의 초대에 응했다.
우리는 약 2시간 동안 대화를 나눴다. 그녀는 예전에 한국의 MBC 방송국과 함께 일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의 삶에 대해 즐거운 이야기를 나눴다. 물론, 내가 그녀의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 그녀에게 다시 질문을 했어야 했던 순간이 많아 매끄러운 대화는 아니었지만, 즐거웠다. 우리는 북한과 남한의 통일에 대한 이야기도 나눴다. 꽤 깊은 주제였지만 대화는 어떻게든 이어졌다. 어려운 단어가 있어도 대화는 충분히 가능했다. 그녀는 내가 이해하지 못한 단어들을 쉽게 바꿔 다시 말해 주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녀와 헤어진 뒤 집으로 돌아와 글을 쓰려고 앉았다가 깜빡 졸았다. 2시간 내내 영어를 듣고 말하느라 집중했기 때문에 나의 뇌는 휴식이 필요했을 것이다. 짧은 단잠은 남편 전화 소리에 끝이 났다. 남편에게 크리스 이야기를 할 때 작은 행복을 느꼈다. 예전엔 내가 영어를 자유롭게 말하지 못해 외롭다고 생각했다. 영어를 원어민만큼 잘하면 외롭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외로움은 어쩌면 내가 스스로 만든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쩔 땐 작은 용기도 어려울 때가 있다. 그리고 그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크리스도 나에게 말했다.
내가 외롭고 힘들 수밖에 없었을 거라고.
낯선 환경에서 산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라고.
그건 무척 용기 있는 일이라고.
앤 할머니.
어쩌면 그녀는, 내가 상상했던 앤 할머니 일지도 모른다.
앞으로 우리의 인연이 어디까지 닿게 될지는 모르지만, 좋은 친구가 생긴 것 같아 마음이 따뜻했던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