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JUN 2025
비가 온다. 종일 죽죽죽 온다. 겨울이 오고 있는 뉴질랜드는 점점 비가 자주 내린다.
뉴질랜드에서 2년 6개월째 살고 있다. 매년 12월, 1월은 한국에서 지내고, 다시 뉴질랜드로 돌아온다. 한국의 봄, 여름, 가을을 3년째 경험하지 못했다. 언제쯤 비가 많이 왔고, 언제쯤 햇볕이 따뜻해졌는지, 바람은 언제 쌀쌀해지는지 정확히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집 앞의 목련 나무는 3월에 꽃 봉오리가 생겼고 4월 초엔 온 동네 거리에 벚꽃이 활짝 폈던 게 기억난다. 여름이 오기 전, 더위를 한 움큼 쥔 바람이 뺨을 스치며 지나가는, 내가 제일 사랑하는 그 바람을 경험하지 못하며 몇 해가 지나가고 있다.
뉴질랜드에 살면서 새롭게 발견한 것은, 한국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다. 뉴질랜드가 아름답지 않아서가 아니고, 뉴질랜드가 정말 아름다웠기 때문에 한국이 아름답다는 사실을 새삼 발견하게 됐다. 이건 어쩌면 그리움일지도 모른다. 영영 뉴질랜드에서 살 것도 아니고, 기간이 정해져 있는 해외 살이 임에도 한국이 그립다. 내 삶의 버켓리스트 중 하나가 해외 살이었다는 사실이 가끔 새삼스럽다. 버켓리스트였던 만큼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정말 신나는 일들을 많이 해보고 싶다. 그중 한 가지가 여행이다.
뉴질랜드는 섬나라이고 내가 사는 오클랜드는 뉴질랜드 북섬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섬이기 때문에 해안을 따라 도시와 주거지역이 퍼져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어딜 가나 아름다운 경치를 만날 수 있다. 해안을 따라 걸을 수 있는 길도 많고 레저를 즐길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이 있다. 캠핑장도 많고 바다 수영이나 서핑, 로잉등은 말할 것도 없다. 남섬은 북섬보다 웅장한 대자연이 펼쳐져 있고 오로라와 다양한 해양 생물을 만날 수 있다. 뉴질랜드에서 진짜 여행을 하려면 남섬을 가야 하는데, 북섬이 아기자기한 아름다움이라면 남섬은 웅장하고 압도적인 풍경이 펼쳐져 있다.(고 다녀온 사람들이 말한다. 나는 아직 남섬에 가보지 못했다.) 뉴질랜드를 떠나기 전 남섬에 들러 여러 가지를 경험해보고 싶다. 일단, 아주 느린 여행을 하고 싶다. 가능하면 캠핑카를 빌려도 괜찮을 것 같다. 느릿느릿 조금씩 아래로 향하는 여행. 가능하면 사람이 사는 가장 아래쪽에 있는 섬인 stewart island까지 가보고 싶다. 이곳은 주민이 400명 밖에 안되고 90%가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야생 키위를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갈 수 있을까? 갈 수 있는 방법을 느릿느릿 찾아보자.
애들이 어렸을 때 우리 가족은 강원도로 여행을 많이 갔다. 아니, 거의 강원도로만 여행을 다녔다. 우리나라 남쪽보다 동쪽이나 서쪽을 찾았다. 남쪽을 많이 가지 않은 이유는 오랜 시간 운전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부산을 몇 번 간 적이 있는데, 한 번은 비행기로, 나머지는 모두 ktx를 타고 갔다. 우리나라 고속도로는 차가 밀리면 답이 없다. 어린아이들과 몇 시간을 도로 위 좁은 차 안에서 보내는 건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만약 아이들이 화장실 가고 싶다고 하거나 멀미 때문에 컨디션이 나쁘면 차 안은 난리가 난다. 울고 불고 화장실을 참네 못 참네 토가 나올 것 같네 하면서 다시 울고… 꽉 막힌 고속도로에 아이와 갇혀본 사람은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그리고 사는 게 바빠 여행을 느긋하게 다녀 본 기억이 별로 없다. 아이들은 학교 다니느라, 나와 남편은 각자의 일을 하느라, 참 바쁘게 살았다.
그렇게 살다가 갑자기 지구 아래 외딴섬에서 살기 시작했고, 그곳은 마침 자연이 빼어나게 아름다운 곳이었다. 나에겐 그것을 즐길 수 있는 많은 시간이 주어졌고, 마음에 차곡차곡 쌓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새들과 나무, 끝도 없이 넓은 잔디밭, 집 앞바다와 산, 나는 아름다움 속에 둘러싸여 있었다.
처음엔 새로운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했다. 뉴질랜드만 가지고 있는 특별한 것이라고 여겼다. 한국은 겨울에 방문하니 동물도 식물도 많이 보지 못했다. 모두 다음 해를 기다리며 겨울잠을 자고 있을 때다. 의외로 내가 한국의 아름다움에 대해 느끼기 시작한 건 sns를 통해서였다. 한국 사람들이 계절마다 여행을 하며 올린 사진을 많이 봤다. 아니, 대체 이렇게 아름다운 곳을 왜 나만 모르고 있는 건지, 우리나라엔 아름다운 곳이 참 많았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뚜렷한 사계절마다 가지고 있는 색이 달랐고 처음 보는 식물과 동물도 많았다. 그러면서 내가 지난날 했던 여행을 생각해 봤다.
지역 맛집을 찾아가 줄을 서서 밥을 먹고 전망 좋은 커피숍에서 커피를 한잔 마신다. 일이 많은 언젠가는 여행 중 카페에서 일을 한 적도 있다. 저녁엔 바닷가 앞에 있는 횟집에서 술 한잔 마신 다음 숙소로 돌아와 잠을 잔다. 다음날 아침을 먹고 숙소를 나와 아이들을 위해 워터파크에서 시간을 보낸다. 인스턴트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며 종일 시간을 보내다가 숙소로 돌아와 영화를 한 편 보고 잠을 잔다. 그다음 날, 근처에 있다는 레일 바이크를 타러 간다. 아이들은 페달을 밟아도 힘이 없으니 나와 남편이 땀나도록 커다란 자전거를 움직이기 위해 페달을 밟는다. 근처 맛집에 가 점심을 먹고 누군가의 생가나 민속촌이나 시장에 간다. 저녁이 되면 다시 맛집에 가서 밥을 먹고 숙소로 간다. 그다음 날은 아침을 먹고 집으로 출발한다. 차가 밀려 집까지 2시간 거리인데 3시간 30분이 걸린다. 녹초가 된 채로 여행 가방을 정리하고 씻고 피곤한 몸으로 잠이 든다. 다음날 아이들은 다시 학교로, 남편과 나는 일터로 출근한다.
간단히 적었고, 생각나는 대로 적었다. 내 여행이 모두 이런 식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글을 적으며 그동안 내가 했던 여행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 먹는 것도 중요하고 아이들을 위한 활동도 중요하지만, 조금 더 의미 있는 여행을 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여행하는 지역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조금 더 찾아볼걸, 박물관이 있는지 찾아볼걸, 우리나라 문화재를 더 많이 보러 갈걸, 나는 왜 밥집부터 검색했는지 모르겠다. 그냥 어디 산속에 들어가 3박 4일 동안 나무랑 흙이랑 하늘을 보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여행을 많이 다닐걸, (물론, 이런 여행도 자주 했다. 캠핑이 주로 이런 여행이다.) 조금 느리게 욕심내지 말걸.. 이런 여러 아쉬움들이 떠올랐다.
내가 뉴질랜드에 살아서 마음과 생각이 느려졌고, 어제보다 오늘 나이를 더 먹었고, 아이들이 많이 자랐기 때문에 이제야 이런 생각이 드는 걸지도 모른다. 그때는 그런 여행이 최선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또 나를 위로한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으니, 앞으로의 내가 살고 싶은 인생을 그리면 되는 것이다. 느리고 넓은 마음으로 앞으로 내가 하게 될 여행을 그려본다. 자연 속에 푹 파묻혀 있는 내가 있다. 숙소는 한옥이고 한 중턱에 위치해 있어 전경이 기가 막히다. 평상에 앉아 경치를 즐기며 막걸리 한잔을 하고 있다. 가을이면 좋겠다. 상상만 해도 행복하다.
한국에 가면 느린 여행을 실컷 해보고 싶다. 우리나라 전국 일주를 해보는 게 새로운 버켓리스트다. 나라 구석구석 숨어있는 명소를 찾아다녀야지. 느리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