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Aug 2025
*약 한 달 전, 남편이 뉴질랜드에 방문했을 때의 기록*
2025년 6월 26일. 새벽 4시 50분, 눈을 떴다. 요즘은 6시 알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있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니 잠깐 서글퍼졌다가, 저녁을 적게 먹고 있는 중이라 그런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뉴질랜드에 와서 7kg이 늘어난 뱃살을 조금이라도 줄여보고자 시작한 일인데, 아침에 눈을 뜰 때면 배가 텅 빈 느낌이 든다. 배가 고픈데 별로 먹고 싶은 음식이 없다. 뉴질랜드 살면서 점점 식욕이 줄어드는 것 같다. 딱히 입에 맞는 음식이 없다. 그러니 먹고 싶은 음식도 없다. 첫해엔 한국 음식 중 이것저것이 문득 먹고 싶은 욕구가 강하게 생기는 날이 있었다. 시간이 가면서 욕구는 점점 흐려지고 있다. 맛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맛을 알지만 알고 있는 지식정도로 생각이 끝난다. 점점 감정이 수평선을 따라가는 느낌이다. 이게 좋은 건지, 안 좋은 건지도 잘 모르겠다. 생각은 점점 단순해진다. 영어로 말할 수 있는 문장이 아이 수준이라, 감정이나 생각도 말을 따라 바뀌는 건가 싶다. 책을 읽어야 할 이유가 점점 많아지고 있으니, 나는 조만간 어떤 방식으로든 책을 읽을 것이다.
며칠 동안 바빴다. 바쁨이란 건 언제나 그렇듯 근거 없는 핑계 같은 느낌이다. 바쁘긴 했지만 글을 쓸 수 있었던 시간은 분명히 존재했다. 하지만 왜 그런지 바빴다. 그 시간을 바빴다는 말로 지워버린다. 어렵게 구입한 세탁기는 훌륭히 제 역할을 하고 있다. 여전히 세탁기를 볼 때마다 흐뭇한 마음이다. 친구들과 밥도 먹고 커피도 마시고 크리스와 연극을 보고 영어 수업도 갔다. 3일을 나름 정신없이 보냈다. 그리고 오늘, 남편이 뉴질랜드에 도착한다.
어젯밤 6시 비행기를 타고 한국을 떠날 때 그가 나에게 걸었던 전화를, 연극을 보느라 받지 못했다. 비행기 출발 2시간 전에 조심히 오라는 짧은 통화를 마치고 연극을 보고 집에 돌아오니 밤 10시다. 뉴질랜드에서 늦은 시간에 문화생활을 한 게 처음인 것 같다. 밤 10시이지만 이미 세상은 고요하다. 이웃집 불은 모두 꺼졌다. 역시 일찍 잠들고 일찍 일어나는 나라답다. 막 얕은 잠에 들었을 그들을 깨우려는듯한 자동차 엔진 소리가 미안하게 느껴졌다. 극장이 집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금방 집으로 돌아왔는데, 크리스는 차로 20분 정도 가야 한다. 걱정이 되어 잘 도착했냐는 문자를 보냈지만 답장이 오지 않았다. 잘 도착해 피곤함을 안고 자느라 휴대폰을 확인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1시간을 보냈다. 오늘은 침대 밖 기온이 그리 차갑지 않다. 아침 기온은 15도이다. 나는 10일 전부터 매일 기상 예보를 확인했다. 남편이 오는 기간 동안 비가 얼마나 오는지, 얼마나 추울지를 매일 체크했다. 기상은 조금씩 이랬다가 저랬다가 바뀌었는데, 바뀌지 않은 것 한 가지는 도착하는 오늘과 내일, 바람이 불고 비가 올 거라는 예보다. 겨울치고 그동안의 날씨는 꽤 괜찮았는데, 하필 도착하는 날 날씨가 안 좋다. 바람에 나무가 흔들리는 소리가 들린다. 작년에도 남편이 도착하는 날, 바람이 40km/h였다. 어느 글에서는 바람이 40km/h가 넘어가면 비행기 착륙이 어렵다고 했다. 나무가 허리를 숙여 춤을 추는 모습을 보면서 작년에 내내 걱정했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오늘은 28km/h다. 작년에도 무사히 비행기가 착륙했으니 오늘도 문제없다. 기상 예보 중 바람의 세기를 확인하는 건 뉴질랜드에 살기 시작하면서 시작된 일이다. 바람도 많고, 비도 많고, 햇빛도 많은 나라다. 그러면서 점점 날씨를 걱정하고, 운전을 걱정하는 부모님처럼 돼 가는 느낌이 든다. 내가 점점 약해지고 있다는 말 같아서 지금 내 모습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
비와 바람을 몰고 오는 남편을 맞으러 곧 출발해야 한다. 비행기는 8시 35분에 오클랜드 공항에 도착한다. 마중 가는 길은 아침 출근 시간이라 거북이처럼 엉금엉금 가게 되겠지만 남편도 나오는데 시간이 걸릴 테니 조금 늦어도 괜찮다. 하버 브리지를 혼자 건너갔다가 함께 건널 것이다. 오늘 아침은 정신이 없을 것 같아 아이들 점심 도시락을 학교 매점에 미리 주문했는데, 생각보다 일찍 일어나 여유 있는 아침이다. 여전히 배가 고프지만 먹고 싶은 건 없고 기분은 평온하다. 일찍 일어난 탓에 조금 피곤하고, 허리가 조금 아프다. 세탁기를 옮길 때 아무래도 무리가 된 모양이다. 허리가 약한 나는, 항상 조심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지만, 아프지 않을 땐 그 생각이 왜 까맣게 사라지는 건지 모르겠다. 아프고 나서야 조심했어야 하는데, 하고 후회를 한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기도 전에 나는 집에서 출발했다. 공항까지 40여분 정도 걸린다. 아침 출근시간이라 군데군데 차가 밀렸다. West Highway를 타니 길이 뻥 뚫렸다. 공항으로 가는 길 반대 차선은 출근 차량들로 꽉 막혀 있었다. 신이 났다. 좋아하는 음악을 크게 틀고 남편을 데리러 공항으로 가는 중인 지금 이 순간이 무척 즐거웠다. 몇 달 전, 남편 비행기 티켓을 예약하자마자 공항 주차장도 같이 예약했다. 넉넉하게 2시간 정도를 예약했고 6달러 정도 지불했던 것 같다. 한참을 달려 도착한 공항은 한산했다. 오클랜드 공항은 한국에 비해 규모가 작다. 그래서 그리 헤매지 않아도 목적지에 쉽게 도착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최근에 공항 주변 시설을 공사했는데, 더 편리하고 깔끔해졌다. 이제는 익숙해진 국제선 입국장으로 향했다. 비행기는 이미 도착했고, 뉴질랜드는 공항 출국 심사가 까다롭기 때문에 걸릴 시간을 예상해 느지막하게 출발했는데도 아직 남편은 나오지 않았다. 출국장 옆 카페에서 커피 두 잔을 샀다. 자리를 잡고 앉아 남편을 기다렸다. 이곳은 나에게 항상 기쁨을 주던 장소다. 남편이 오는 걸 항상 기다렸고 만남의 순간은 늘 행복했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다. 옛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남편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나왔다.
연애할 때처럼 총총총 뛰어 그를 안았다. 5개월 만에 만나는 남편은, 어딘가 어색했고 여전히 다정했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