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Aug. 2025
8월의 첫날 새벽, 뉴질랜드는 춥다. 춥다는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오늘 새벽 기온은 영상 7도이다. 찬 공기가 조용하고 묵직하게 방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새벽, 나는 끔뻑끔뻑 눈을 떴다 감았다를 가만히 반복하고 있었다. 휴대폰을 확인하니 새벽 4시 30분이다. ‘아, 망했다.’
잠이 너무 일찍 깼다. 한번 잠에서 깨면 다시 잠드는 게 어려운 나는, 일어나야 하는 시간에 일어나는 날이 좋다. 그 시간은 아침 7시쯤인데, 요즘은 6시 30분쯤 눈이 떠진다. 나이가 들면서 기상 시간이 점점 빨라지는 것을 느낀다. 그런데 그보다 2시간이나 더 빨리 눈을 뜨다니. 오늘은 하루 종일 골골골 하면서 보내게 될 것 같아 작은 숨이 나도 모르게 나왔다.
차마 찬 공기에 몸을 내놓을 용기가 없어 한동안 이불속 따뜻함을 즐기다 화장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몸을 일으켰다. ‘으..’하는 소리가 저절로 입술 사이를 비집고 나왔다. 춥다. 맨발을 차가운 마룻바닥에 내딛을 때마다 작게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화장실에서 나와 물을 한 컵 마시고 얼른 다시 이불속으로 들어가 누웠다. 작은 조명을 켜고 휴대폰을 들었다. 한국 뉴스와 뉴질랜드 뉴스를 번갈아 가며 확인했다. 내 아침저녁 루틴이다. 내 나라와 지금 살고 있는 나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매일 확인한다. 엊그제는 러시아에서 발생한 8.8 규모의 지진 때문에 재난 문자가 여러 차례 휴대폰을 울렸다. 뉴질랜드도 불의 고리에 속해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지진과 화산, 쓰나미에 민감하다. 러시아에서 일어난 지진으로 생긴 파도가 뉴질랜드에도 도착할 예정이라 온 나라가 촉각을 세우고 있었다. 문제는 새벽 1시쯤에도 재난 문자가 와서 전 날도 그리 좋은 잠을 자지 못했다는 것이다. 덕분에 목요일마다 하라케케 공예를 하러 가는데 12시까지 잠을 자느라 가지 못했다. 마오리 족의 전통적인 공예인 라랑가는 하라케케라는 식물을 이용해 여러 가지 소품을 만드는 것이다. 바구니나 가방, 장식품 등을 만드는데, 지금까지는 납작한 꽃과 장미꽃을 만들었다. 생각보다 어려웠다. 나중에 바구니를 과연 만들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꽤 흥미로운 시간이다. 손가락에 힘이 많이 필요해 2-3시간 동안 하라케케 잎을 접고 나면 손가락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는다. 하지만 결과물은 늘 뿌듯하다. 무엇보다 다른 문화를 알게 되는 것이 가장 즐거운 점이다. 이렇게 즐거운 모임에 잠 때문에 참석하지 못했는데, 오늘 또 4시 30분에 일어나 버린 것이다.
점점 잠이 하루의 성과를 좌우하고 있음이 느껴진다. 잘 자야 한다는 말이 요즘처럼 와닿은 적이 없다. 이럴 때마다 나이가 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싫지도, 좋지도 않은 감정이다. 나는 나이가 들고 있다. 그래서 잘 자야 한다. 그래야 하루를 힘차게, 내가 계획한 스케줄을 해내며 보낼 수 있다. 물론 잠이 부족했어도 하라케케 공예 수업에 갈 수 있었겠지만 부족한 잠이 가기 싫다는 마음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나는 그 마음에 동의 버튼을 눌러버렸다.
8월부터 시작하는 일들이 있다. 그래서 아마 오늘 아침 눈이 일찍 떠졌을 것이다. 첫째 딸은 새로운 것을 마주할 때마다 늘 긴장한다. 어린이 집에 처음 등원했을 때도, 유치원에 처음 갔을 때도,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도, 피아노를 처음 배웠을 때도, 수영장, 수학 학원, 놀이터 등 뭐든 처음 경험하는 일은 늘 쉽지 않았다. 하지만 늘 잘 해냈다. 울면서 시작해도 나중엔 제일 즐기고 있었다. 뉴질랜드도 그랬다. 처음은 어렵고 긴장했지만 지금은 내 예상보다 더 많은 성과를 내며 잘 지내고 있다. 초반에 영어가 들리지도 않고, 말하지도 못했던 그 시간을 묵묵히 인내하며 보냈을 아이가 대견하다. 나도 그렇다. 처음 시작하는 일은 항상 긴장된다. 나는 오늘부터 6시 30분에 매일 운동을 하기로 했다. 뉴질랜드에서 만난, 운동을 좋아하는 어떤 분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약속을 해버렸다. 그래서 오늘부터 나는 운동을 시작한다. 아침 6시 30분에.
이불 밖에 내놓은 손가락이 시리다. 휴대폰을 내려놨다. 베개 옆에 항상 자리 잡고 있는 책을 펼쳤다. 이 책은 언제쯤 베개 옆을 벗어나게 될까. 나는 근래에 참 게을렀다. 남편이 뉴질랜드에 다녀가고 한 달을 그렇게 게으름을 피웠다.
오래간만에 펼친 책은 재미있었다. 어쩌면 이렇게 글을 잘 쓰는지, 어쩌면 이렇게 통찰력 있는 생각을 하는지, 어쩌면 이렇게 인생을 꽉 채우며 살아가는지, 부러움이 가득 담겨있었다. 책엔 가족과 시간을 보내고 자신의 일을 하면서 살기에도 시간이 부족한데 게으름을 피울 새가 없다는 내용이 있었다. 멋진 사람이다.
잠깐 천장을 바라보고 누워 나의 하루를 돌아봤다. 2년 전, 뉴질랜드에 와서 영어 공부 목적으로 유튜브를 보기 시작했는데, 이젠 너무 많은 시간을 잡아먹고 있다. 그동안 내가 즐겼던 세계 여행을 하는 사람들, 한국에 놀러 온 외국인들의 인터뷰나 후기 동영상, 영어 공부법, 영화 소개 등 여러 채널이 화면에 뜬다. 유튜브 사용 시간을 줄여야겠다고 늘 생각하지만 나도 모르게 어느새 유튜브를 보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영상을 보는 순간에도 생각한다. ‘이것만 보고 그만 봐야지.’하지만 무의식으로 다른 영상을 또 누른다. 이게 요즘 나의 가장 큰 고민이다. 해야 할 일도 많고 공부해야 할 것도 많은데 인생을 이렇게 사용하면 안 될 것 같은 죄책감이 날 질책하고 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책을 보다 어느새 6시 30분이 됐다. 첫 번째 날, 8명이 줌에서 모여 순조롭게 운동을 마쳤다. 조금 긴장했던 일은 겪고 나면 별일 아니다. 항상 그렇다. 그런데 왜 새로운 일을 할 때마다 다시 긴장하는지 알 수가 없다. 아침을 먹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낸 뒤, 영어 수업에 참석했다. 요즘 내가 제일 즐거워하는 시간이다. 지난번 영어 수업과 이번 영어 수업은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 전에 다니던 곳이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였다면 이번 수업은 활기차고 수다스럽다. 스피킹을 목적으로 하는 나에겐 지금 이곳이 더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오늘도 역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도서관에 왔다. 앞으로 나는 매일 도서관에 가기로 결심했다. 8월부터 새로 시작하는 글쓰기를 위해서다. 집에 돌아가면 분명히 유튜브를 볼 것이다. 아무리 안 보겠다고 다짐해도 실패한다. 한 개만, 두 개만.. 하면서 하루를 보낸 날이 많다. 그래서 나는 지금 도서관에서 글을 쓰고 있다. 첫날은 내가 계획한 대로 잘 지나가는 중이다. 기특하다. 첫날부터 계획에 차질이 생기면 김이 빠진다. 내일 다시 시작해도 되지만 첫날은 왠지 의미가 남다르다.
한 겨울인 8월 1일, 곧 봄이 올 테고 여름이 시작될 쯤엔 나는 겨울인 한국으로 간다. 올해는 시간이 참 빠르다. 그리고 올해는 지난 2년보다 더 바쁘고 더 즐겁고 행복하다. 요즘 나는 처음으로 뉴질랜드가 편안하고 즐겁고 기대된다. 첫해부터 이랬으면 더 좋았겠지만 지금에 와서야 이런 마음이 드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이제부터 그동안 못 즐겼던 이곳을 두배로 즐겨보자! 그러니까 오늘은 꼭! 푹, 자자. 꿈도 꾸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