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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생일

10 Aug 2025

by 게으른 곰

오늘은 뉴질랜드에서 맞는 세 번째 생일이다. 한국에서 생일을 어떻게 보냈는지 잘 기억이 안 나지만, 생일은 늘 신나고 바빴던 것 같다. 나이가 들면서 생일의 특별함은 점점 옅어졌지만 그래도 뭔가 발도장 찍듯 축하를 하기 위한 무언가를 하면서 보냈던 것 같다.

뉴질랜드에서 맞은 첫 번째 생일은, 놀랍게도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 아이들이 미역국을 끓여줬던 일이 기억난다. 뉴질랜드에서의 첫 해는 소극적이고 조용했고 불안했다. 햇빛 뜨거운, 여름의 절정이 내 생일이었는데 뉴질랜드에 오면서 겨울 생일로 바뀌었다. 축축하고 흐리고 비가 오는 날이 대부분인 겨울말이다. 겨울이 싫은 나는, 여름에 태어났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가끔 한다. 여름 더위는 내 인생 첫 온도였다. 그렇기 때문에 추위를 잘 타는 사람이 됐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생일이 겨울로 바뀌다니, 이보다 더 별로인 일은 흔치 않을 것이다. 그래도 생일날 비가 온 적은 없었다. 뉴질랜드의 겨울엔 비가 흔한데, 오늘도 날은 맑았다. 하지만 해만 떴을 뿐, 겨울은 겨울이기 때문에 무척 추웠다.

08102.jpg Emily Place Reserve. 나무가 바닥 가까이 누워있어 몸을 숙여 나무를 통과해야 한다.

마침 오늘은, 격주마다 모이는 어반 스케쳐스 모임이 있었다. 근래에 모임에 같이 가게 된 친구들이 생겨서 빠지지 않으려고 하는데, 딱 내 생일날이 모임 날이다. 아이들과 시간을 보낼까, 모임에 참석을 할까 생각하다가 아이들과 모임에 가는 탁월한 선택을 했다. 원래 아이들은 그 모임에 가는 걸 딱히 즐거워하지 않았지만, 엄마의 생일날이라 흔쾌히 동의했다. 이런 것이 생일날의 장점이다. 올해도 아이들이 끓여준 미역국을 먹고 타카푸나 스타벅스에서 커피 한잔을 마셨다. 마침 선데이 마켓이 열리는 날이라 프레즐과 만두도 구입했다. 오늘 어반 스케쳐스는 시티 안에 있는 작은 공원에서 모이기로 했다. 공원 옆 길을 몇 번 지나친 적이 있었는데, 길 위쪽에 이런 공원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래서 나는 이 모임이 좋다. 투어 가이드처럼 오클랜드 구석구석을 안내하는 느낌이다. 늘 가는 거리에도 내가 몰랐던 비밀 공간이 꼭꼭 숨어있다.

2주 만에 만난 사람들과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둘째와 벤치에 앉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늘에 앉았던 우리는 이내 찬 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햇빛 아래로 자리를 옮겼다. 뜨거웠다. 참, 이상한 기후다. 그늘은 너무 춥고, 햇빛 아래는 뜨겁다. 그렇기 때문에 뉴질랜드의 여름은 딱 좋은 날씨다. 해는 뜨겁지만 실내나 그늘 밑은 시원하다. 선풍기나 에어컨이 딱히 필요하지 않을 정도다. 하지만 겨울엔 집도 춥고, 나무 그늘도 춥고, 구름이 껴도 춥다. 비까지 내리면 최악의 겨울 날씨 완성이다.

다행히 해가 쨍하게 뜬 날이라 햇빛 아래 앉았는데, 얼굴이 너무 뜨겁다. 눈이 부셨다. 겉옷을 벗어 머리 위를 덮어 그늘을 만들었다. 물감을 슥슥 바르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스케치를 생략한다. 그래도 괜찮다. 조금 삐뚜르게 그려진 그림이 더 좋을 때가 있다. 자연이면 더 괜찮다. 오늘은 공원 나무를 그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공원 안 나무는 길바닥까지 아래로 누워 자랐다. 그래서 길을 가려면 허리를 숙여 나무 기둥 밑으로 납작 엎드리다시피 건너가야 했다. 이것이 뉴질랜드다. 길보다 나무가 먼저 자리를 차지했으니 나무를 피해 가는 게 당연한 일이다. 방해가 된다고 나무를 자르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이 오히려 멋이 되고 재미가 되는 장소가 되었다. 얼마나 멋진 일인가. 뉴질랜드에 와서 이런 것들을 많이 봤다. 자연은 자연 그대로 보존, 존중되고 있다. 그래서 뉴질랜드가 좋다.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이 나라도 지키려 애쓰고 있다.


한참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둘째가 그림에 흥미를 잃었나 보다. 춥다, 허리가 아프다, 손이 시리다 말이 많다. 우리는 추위를 피해 근처 커피숍으로 향했다. 주말이라 시티인데도 불구하고 문을 닫은 상가가 많았다. 그렇게 이 골목 저 골목을 헤매다 우연히 발견한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이곳은 식사와 커피, 빵 모두를 다양하게 판매하고 있었다. 커피와 햄버거, 오렌지 주스를 주문하고 안내받은 자리에 앉았다. 커피와 샌드위치, 그리고 바게트 빵 모두 만족스러운 맛이었다. 커피를 마시며 그림을 마무리했다. 두꺼운 색연필로 나무 위에 잎들을 얹으며 둘째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가끔 둘째와 단둘이 즐기는 데이트 같은 시간이 참 좋다. 요즘 왠지 고민이 많아 보이는 사춘기 소녀에게 좋은 말을 많이 해주고 싶었지만 커피와 햄버거, 주스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그래도 둘째가 행복해 보여 좋았다. 문득 공부보다 건강이 제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내일은 또 공부 잔소리를 하게 되겠지.

08101.jpg Amano 식당. 꽁꽁 얼어붙은 손을 녹인 곳. 어반 스케쳐스 모임.

짧은 즐거운 시간이 흐르고 모임 시간이 되어 다시 공원으로 돌아갔다. 공원 이름이 Emily Place Reserve라, 이름의 유래가 궁금해 검색해 봤는데 그냥 거리 이름에서 따온 것이었다. 근처에 있는 St Paul’s 교회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했다. 모임장소에 도착하니 모두 모여있었다. 제일 늦게 그림을 제출했는데 누군가 나에게 칭찬과 함께 그림 재료를 물었다. 과슈라고 답하고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가끔 이렇게 내 그림이 이슈가 될 때가 있는데, 내가 그들과 그리는 방식이 달라서인 것 같다. 대다수가 풍경화를 주로 그리기 때문에 한 부분을 확대해 그리거나 색을 바꿔 그리는 내 그림이 신선함으로 다가오는 것 같다. 기분 좋게 기념사진을 찍은 뒤 모임이 끝났다.


아이들은 엄마 생일날 그림 그리러 온 것 외에 별다른 일정이 없는 걸 자꾸 신경 썼다. 포켓볼이라도 치러 가자는 아이들을 설득해 집으로 향했다. 이미 행복한 생일을 보냈다고 말했다. 뭔가 특별한 일을 하지 않았지만 충분히 행복한 생일을 보냈다. 아침 식사를 아이들이 차려줬고 예쁜 선물도 받았고, 남편과 아이들이 생일 노래를 불러줬고 내가 좋아하는 그림 모임에도 참여했다. 맛있고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을 우연히 발견했고 그 시간들이 모두 즐거웠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저녁까지 아이들에게 얻어먹었다. 이보다 더 완벽한 생일날이 있을까? 특별한 생일에 대한 정의를 다시 생각해 봤다. 뉴질랜드에 와서 삶에 대한 생각과 시선이 많이 달라졌다. 특별한 무언가 하지 않으면 지루하다고 생각했는데, 바쁘지 않은 삶 속에 작은 행복들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잔잔하고 평범하지만 그게 행복이 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래서 올해 생일은 내 생에 가장 행복한 생일이었다.

뉴질랜드에서 보낼 생일이 앞으로 2번 남았다. 내년엔 어떤 잔잔한 행복을 찾게 될지, 기대된다. 내년 생일도 즐겁고 행복한 날이 될 거라는 걸 안다. 아무 일도 없이 평범한 날이겠지만, 분명히 행복할 것이다. 뉴질랜드 경력이 쌓인 내가, 올해보다 더 많은 순간들을 찾아낼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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